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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강자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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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아비브 욥바교회 2017년 7월 1일 설교 이익환 목사

여호수아서 강해 9 강자의 조건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 하기를 오늘까지 행한 것 같이 하라 [9] 이는 여호와께서 강대한 나라들을 너희의 앞에서 쫓아내셨으므로 오늘까지 너희에게 맞선 자가 하나도 없었느니라 [10] 너희 중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 [11]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수23:8-11)

 

이런 사회를 꿈꾼 사람이 있다. “노인들은 편안하게 일생을 마칠 수 있고, 젊은이는 모두 직업이 있으며, 여자는 다 시집갈 자리가 있고, 어린이는 잘 자라날 수 있으며, 과부, 홀아비, 병든 자를 모두 사회가 봉양한다” 참 괜찮은 꿈이다. BC 500년 무렵 춘추전국시대에 공자가 꿈꾼 대동(大同)사회의 모습이다. 이것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아주 이상적이고 완전한 사회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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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공자는 “지금은 큰 도(道)가 사라졌으니 천하는 자기 집안만을 위하는 세상이 되었다”고 한탄했다. 즉 사람들이 각각 자신의 어버이만 어버이로 여기고, 자기 자식만을 자식으로 여기며, 재물과 힘은 자기만을 위해 쓴다는 것이다. 공자는 이러한 사회를 ‘소강(小康)’이라고 표현했다. ‘대동(大同)’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소강,’ 즉 작은 평강을 누리는 사회라는 것이다. 그는 소강사회에서는 임금과 백성의 사이가 바르게 되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돈독하게 되고, 형제가 화목하며 부부가 조화를 이룬다고 보았다. 소강사회만 되어도 그리 나쁘지 않은 것이다.


지금 중국의 성장이 무섭다. 2013년 국가 주석에 선출된 시진핑은 그의 취임 연설에서 중국의 꿈에 대해 말했다. 먼저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이 되는 2021년에 전면적 소강사회를 완성하겠다는 비전이다. 백성들이 인간답게 생활하는 삶의 질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두번 째 중국 건국 100주년이 되는 2049년에는 부강하고 조화로운 사회주의 국가를 만들겠다는 비전이다. 자기 집안만을 위하는 천하위가(天下爲家)를 뛰어 넘어 천하위공(天下爲公)의 대동사회를 이루겠다는 비전이다. 이런 꿈을 이야기하는 시진핑의 모습에서 강한 중국의 모습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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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강한 것일까? 흔히 힘을 가진 자를 강하다고 한다. 세상은 힘을 가진 강자가 그 힘을 바로 사용해주길 바란다. 그러나 세상은 그 힘을 가진 강자가 힘을 남용하기에 고통을 당한다. 모든 인류가 서로를 위하여 힘을 쓰는 대동사회라는 비전은 그저 꿈에 불과한 것일까?


오늘 우리는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게 된 여호수아가 남긴 고별사를 살펴보려한다. 애굽에 노예로 있었던 이스라엘은 광야를 통과하고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국가가 되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국가의 최고통치자였다. 그 역시 모든 백성이 하나님 안에서 한 뜻을 이루는 위대한 나라를 꿈꿨다. 그가 남긴 마지막 연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강자의 조건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수 23:1-2,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들로부터 이스라엘을 쉬게 하신 지 오랜 후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은지라 [2]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 곧 그들의 장로들과 수령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불러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나이가 많아 늙었도다” 여호수아는 110세에 생을 마감한다. 그는 죽을 날이 가까워오자, 먼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불러 고별메세지를 전한다.


수 23:3: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다 보았거니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이시니라” 여호수아는 가장 먼저 지도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상기시켰다. 여호수아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표현을 열 세번 사용한다.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하나님은 모세의 하나님도, 여호수아의 하나님도 아닌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였다. 여호수아는 자신은 비록 사라지지만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이는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이끌어 갈 지도자들 안에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있길 바랬다. 다른 누구의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그들 자신들의 하나님으로 인식되고 고백되어지기를 바랬던 것이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강하다. 자신이 직접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싸우시는 전쟁을 하기 때문이다. 수 23:5,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 앞에서 그들을 쫓아내사 너희 목전에서 그들을 떠나게 하시리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 하나님의 작정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작정이 이루어지는 삶을 살게 된다. 그래서 강하다. 철병거가 없고, 수가 적어서 객관적으로 상대가 될 수 없는 싸움도 하나님의 작정 때문에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되길 축원한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때 수치와 통계를 따르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을 따르는 삶을 살게 된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이어서 말한다. 수 23:6,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치우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쑤르’다. ‘떠나다, 외면하다’라는 뜻이다.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우로나 좌로나 떠나지 말라는 당부다. 이것은 여호수아 자신이 이스라엘의 최고지도자로 세워질 때 하나님께서 직접 명령하신 것이다. 그는 이 명령을 따랐고 그 결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형통을 경험했다. 그가 경험했기에 형통의 비결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전수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깔아주시는 길을 가는 사람은 강하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기에 ‘second to none’, 천하무적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힘써 지켰기에 하나님께서 힘써 그의 삶을 지켜주시는 것이다.


수 23:8-10,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 하기를 오늘까지 행한 것 같이 하라 [9] 이는 여호와께서 강대한 나라들을 너희의 앞에서 쫓아내셨으므로 오늘까지 너희에게 맞선 자가 하나도 없었느니라 [10] 너희 중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한 사람이 천명을 상대하는 강자가 된다.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의 비전이기도 했다. 사 60:22,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세상 나라의 지도자는 부강한 국가를 만들어 국민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을 비전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단순히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 비전이 아니다. 작고 약하지만 하나님 때문에 영적으로 거룩한 강자들이 세워지는 것,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다. 그러한 영적 강자들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진행되는 것이다. 그것이 교회가 힘써야 할 하나님나라의 비전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는 작지만 강한 교회가 되길 바란다. 여러분 한 사람이 천명을 감당하는 일당 천의 사람들이 되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수 23:11,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는가? 사랑은 선택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여자를 다 사랑하겠다는 사람을 사랑꾼이라 부르지 않는다. 난봉꾼이라 부른다. 오직 한 사람만을 선택하는 게 사랑이다. 여호수아는 하나님 한 분을 선택했다. 수 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기로 선택한 것, 그것이 여호수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그 선택을 위해 그는 이전 문화 속에서 섬기던 우상을 치워버렸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민족과 혼인하여 서로 왕래하게 되면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올무와 덫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거룩하지 않은 세상의 문화를 떠나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섬기고 의지하는 우상들을 치워야만 한다. 하나의 선택을 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이다. 여러분 모두가 여러분이 의지하던 우상을 버리고 한 분 하나님을 선택하는 결단이 있기를 축원한다.


여호수아에게 또한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었다. 수 22:5, “오직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명령과 율법을 반드시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의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하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요한복음 14:15절도 말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지 못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 그저 ‘나’를 사랑하는 삶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의 사전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사전, 나의 목표대로 사는 삶에 머물기 때문이다. 나 자신과 가족을 위한 삶에 성실한 것, 물론 그것도 훌륭하다. 그러나 그것은 공자가 말했던 소강사회의 행복만 누리다 가는 삶인 것이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비전을 제시하셨다.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 나와 아무 관련없는 사람을 왜 사랑해야 하는가? 내가 싫은 사람들을 왜 사랑해야 하는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것이 가능하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자가 말했던 모든 인류를 내 가족처럼 섬기는 대동사회의 비전은 돈이 있다고, 이제 좀 먹고 살만하다고 이룰 수 있는 비전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나중에 내가 성공해서가 아니라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이룰 수 있는 비전인 것이다.


이스라엘에 있으면서 가장 하기 힘든 설교가 있다. 유대인을 사랑하라는 설교다. 나와 별 상관도 없고 또 사랑하기 싫은 사람을 왜 사랑해야 하는가? 그것은 이들이 하나님께서 회복하기 원하시는 민족이기 때문이다. 바울 당대의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내어주었기에 그들은 끝난 민족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 11장 1절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한다. 바울 자신도 이스라엘 사람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핍박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바울도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해주셨다. 그는 엘리야 때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는 칠천을 남겨두신 것처럼 자신의 당대에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고 말했다. 왜 남겨두셨을까? 하나님나라 선교의 완성을 위해서다.


바울은 말한다. 롬 1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남은 자를 제외하고 이스라엘의 대부분이 넘어졌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넘어졌기에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남겨진 유대인들을 통해 이방인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행13:46-48,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47]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한 것은 땅 끝까지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넘어졌기에 복음의 진행 방향이 바뀌었다. 그래서 구원이 한국인인 우리에게도 임하게 된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참감람나무의 원가지가 꺾이고 그 자리에 돌감람나무 가지인 이방인이 접붙여진 것으로 표현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접붙임은 이 반대라고 한다. 더 좋은 올리브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참감람나무 가지를 꺽어 돌감람나무에 접붙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바울이 도시사람이라서 비유를 잘못 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905년 윌리암 램세이 경의 글에 의하면 바울의 묘사가 정확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늙어서 더 이상 열매맺을 수 없는 감람나무에 어린 돌감람나무 가지를 접붙이면 나무의 수액이 다시 나와 죽어 가는 감람나무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돌감람나무 가지가 접붙여진 궁극적인 이유는 죽어가는 참감람나무를 살리기 위함이다. 마찬가지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임한 것은 이스라엘을 잘라내고 이방인을 살리기 위함이 아니다. 이방인도 살리지만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살려 다시 열매맺는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한 원예학자의 말이다. 접붙임을 위해 잘려졌던 원가지를 참감람나무에 드릴로 공간을 만들고 다시 접붙일 때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그 가지가 다시 접붙여졌을 때 이미 접붙여져 수액을 받고 있는 돌감람나무 가지를 ‘시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꺽여서 다 말라버린 원가지들이 다시 수액을 내며 기적적으로 소생한다는 것이다. 이 분은 믿는 분이 아닌데도 성경적인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 롬 11:14, 23-24,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이스라엘이 다시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여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나와 우리 가정이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을 사랑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장자로 부름받은 이스라엘이 끊어진 곳에서 이방인인 우리의 구원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하나님은 다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회복하기 원하신다. 롬 11:12,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이스라엘이 실패했기에 이방인에게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 충만함으로 회복될 때 세상이 누릴 수 있는 은혜의 풍성함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나에겐 형이 있었다. 내가 13살 때 형은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형이 끊어진 자리에서 내가 맏아들이 되었다. 그 사건이 계기가 되었기에 나는 다시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결국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 이 세상에서 형이 다시 살아 올 수 없겠지만 만약 형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면 그 때 우리 가족은 얼마나 기쁘고 더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될까 상상해본다. 끊어졌던 장자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는 것, 그것은 아버지가 가장 원하시는 일일 것이다. 나는 육신의 형을 대신해서 하나님이 가장 먼저 택하셨던 당신의 장자, 끊어진 유대인들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다. 그들의 눈이 가리워지고 마음이 둔해져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지만 하나님은 이들을 다시 접붙이실 능력이 있음을 나는 믿는다.


이스라엘에 온 지 6년이 되었다. 교회 성도의 수는 더 작아졌고 돌아온 유대인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작지만 강한 교회로 이 땅에 존재하길 원한다. 이 땅에 예배공동체로 심어진 우리를 보고 유대인들이 시기하고 영적으로 살아나는 시간이 오길 기다린다. 우리의 수는 작지만 이곳에 있는 동안 우리 모두가 영적 강자로 세워지는 시간들이 되길 바란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되길 바란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 우로나 좌로나 그 말씀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이 되길 바란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세상 모두가 섬기는 우상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는 자들이 되길 바란다. 이것이 영적 강자의 조건인 것이다. 바라기는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 자식만을 위해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회복이 필요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사는 자들이 되길 소원한다. 그리하여 진정한 대동사회,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세워나가는 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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