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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염려하지 말라

  • 이정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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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하지 말라                           

눅12:22-34


  저는 입대하기 몇 달 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군복무를 마친 후 무작정 대학에 진학하여 신학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준비된 것이라곤 하나님의 부르심에 뜨겁게 순종하는 마음 하나뿐이었습니다. 주님께 나를 온전히 드려 이 길을 가기로 했으니만큼 주님께서 모든 것을 온전히 준비해주실 줄 믿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부딪히고 보니 너무나도 막막했습니다. 소명을 받고 늦게 시작한 신학 공부는 너무나도 재미있고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학기가 돌아올 때마다 등록금이 마련되지 않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지난 학기 등록금도 아직 내지 못했는데, 새 학기를 맞이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맡긴다고 하면서도 미납된 등록금과 새로 내야 할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 늘 애가 탔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준비해 놓으셨다면, 때로는 생각지도 못했던 길을 통해 등록금이 마련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여름, 중등부와 고등부가 연합하여 여름 수련회를 갔습니다. 저는 고등부를 섬기고 있었고, 동기 전도사님은 중등부를 지도하고 있었습니다. 수련회 셋째 날 밤, 친구 전도사님이 저를 찾아와 다짜고짜로 성령님께서 왜 염려하느냐고 책망하신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편한 마음으로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마음속에 염려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등록금이 지난 학기와 이번 학기 것까지 밀려 있었으니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형편이 이 정도가 되면 염려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염려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요? 당신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염려하지 말라


  사람들은 하루하루 생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에 대해 늘 염려합니다. 어느 정도 저축해 놓은 돈이 있고 안정된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은 염려를 덜 할지 모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할 수만 있으면 돈을 모아 놓으려고 합니다. 그래야 안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탐심을 물리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제자들에게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 즉 생계문제를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22절)


  이 교훈은 무리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있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설명해주셨습니다. 우리의 몸과 영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음식과 의복을 틀림없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까마귀도 기르시고 들의 백합화도 아름답게 입혀주시는데, 까마귀나 백합화와는 비교할 수 없이 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를 돌보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 주님께서는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은 염려한다고 달라질 것이 없으니 하나님께 맡기고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이미 알고 계시는 우리의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몸이 의복보다 귀하다


  사람들은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하여 최대의 관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염려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중요한 원리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심으로써 우리가 더 이상 이 문제로 염려하지 않게 해주셨습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23절)


  목숨이 음식보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목숨은 어디서 왔습니까? 두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사람은 누구도 목숨을 창조하지 못합니다. 요즘 동물을 복제하는 일이 가능해졌으며, 사람을 복제하는 일까지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을 창조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생명을 만들어 내거나, 죽은 것을 살려내는 일은 하지 못합니다. 생명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이 순간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셨고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목숨은 하나님께서 주신 큰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선물인 목숨을 주셨다면, 그 목숨을 유지하기 위한 음식도 준비해 놓으셨으리라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토록 귀하게 여기시는 생명을 위해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준비해주실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밭 갈고 씨 뿌리고 추수하여 곡간에 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일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 우리의 양식이 부족하여 우리가 살 수 없게 되지나 않을까 하고 염려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와 비슷한 논증을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겠느냐”(롬8:32). 아들까지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서 무엇인들 우리에게 주시지 않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천하보다 더 귀한 목숨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목숨을 위해 음식을 준비해 주시며, 우리의 몸을 위해 의복을 공급해주실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까마귀와 백합화


  예수님께서는 까마귀도 돌보시고 기르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얼마나 더 돌보시겠느냐고 하시면서,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24절)


  이 말씀을 기억하고 새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너희들 참 귀하고 사랑스럽구나.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돌보시는구나!”하는 따뜻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까마귀와 같은 공중의 새들을 먹이시며 길러주실까요? 하나님께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하나님은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이것을 알게 되는 순간, 이 진리를 우리 마음에 적용시키는 순간 두려움과 염려는 즉시 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를 얼마든지 입혀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27-28절)


  솔로몬은 역사상 가장 큰 영화를 누린 왕으로 유명합니다. 구약의 역사에서 우리는 솔로몬의 화려하고 찬란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왕상4:29-34,10장). 그의 놀라운 지혜, 왕과 신하들의 화려하고 질서 있는 모습들, 금으로 싸고 보석을 박은 가구들, 백향목 궁전, 헤아릴 수 없이 풍부한 재정 …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영화였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영화들은 이 한 송이의 꽃과 비교해 볼 때 빛을 잃고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립니다.


  이 백합화는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들풀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그렇게 보살피십니다. 허허벌판에서 헛되이 향기를 소비하는 것 같은 들풀도, 그리고 베어지면 곧 말라져서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이렇게 아름답게 입히시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얼마나 더 돌보시겠습니까?

 
  우리는 영원불멸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잠깐 이 유한한 세상에서 살고 있으나 영원에 소속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분의 형상을 따라 존귀하게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영혼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홀히 여기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염려하므로 키를 늘일 수 있느냐?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를 말씀해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염려한다고 해서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을 염려하느냐”(25-26절)


  여기서 ‘키’라는 말에는 ‘신장’이라는 의미와 ‘생명의 길이’, 즉 ‘수명’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의미를 취하여도 이 말씀의 뜻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은 생명의 길이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결국 이 말씀은 “너희가 근심하고 걱정하며 염려하므로 한 순간이나마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느냐?”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수명을 연장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의학이 발달하면서 인류의 수명이 늘어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의학 지식과 기술로도 수명을 연장할 수 없다는 것은 여전히 사실입니다. 비슷한 증세를 보인 두 사람이 똑같은 치료를 받았는데, 한 사람은 살고 또 한 사람은 죽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 누구도 자신의 수명에다 한 치도 보탤 수 없습니다.


  생명과 수명의 문제는 오직 하나님께서 결정하십니다. 현대 의학의 눈부신 발달에도 불구하고 수명의 문제는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보다 효과적인 암 치료제가 개발되었다 해도, 사람이 자기의 수명을 늘렸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이런 것들에 달려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왜 너희는 그렇게 염려하고 안달이냐?’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그래 봐야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는 우리의 생명과 수명에 무슨 보탬이 되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시작하게 하시고, 또 그 생명을 끝나게 하십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생명을 유지시키십니다. 생명의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문제로 염려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보다 작은 문제들 역시 모두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달려 있는 이러한 문제들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일들만 열심히 하면 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


  주님께서는 염려하는 자들에게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28절)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믿음이 작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작은 믿음이란 구원받은 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그 구속의 은총을 힘입어 구원받은 후 거기서 멈추어 버리는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처럼 염려합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29-30절) 하나님의 약속들은 우리의 생활전체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작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이 약속들 가운데 일부만을 붙잡고 나머지는 붙잡지 않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세상 백성들처럼 근심하며 염려합니다. 그들의 믿음은 구원에만 관계되지 일상생활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작은 믿음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서 삶에 적용하지 못하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왜 작은 믿음을 가지고 살게 될까요? 주님에 대하여, 말씀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새들을 보면서 새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에 관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들의 백합화를 보면서 우리의 삶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모든 염려를 던져버려야 합니다.
 
    실제 상황에서


  그런데 실제로 당장 필요한 것이 채워지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염려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제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군복무를 마친 다음 해에 총신대학에 입학하여 신학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에 결혼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학교를 다니며 가정을 꾸려가야 했습니다.


  수입은 당시 교회에서 사례비로 받는 오만원이 전부였습니다. 그야말로 밥만 먹고 살기도 어려웠습니다. 그 때 우리는 그냥 그렇게 살았습니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견디며 살았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돌보시며 인도하시는 것을 믿고 궁핍하고 막막한 나날을 감사와 기쁨으로 살고자 힘썼습니다. 많은 것들을 아예 포기했고, 엄두조차 내지 않았습니다. 때로 인간적인 초라함이 느껴질 때마다 “나는 하나님의 종이다!”라고 외쳤으며, 레위인에게는 기업이 없었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어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했습니다. 그러면 소망과 감격과 감사와 자부심으로 채워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채워주시지 않는다고, 가난하게 살게 하신다고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훈련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학업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렇게 7년의 세월을 하나님 은혜 가운데서 지냈습니다.
  우리는 궁핍한 형편이나 어려운 상황 속에서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견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선하게 인도하심을 확신하며 이겨내야 합니다. 까마귀들과 야생초들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언젠가 그것들의 태연한 모습 속에서 그것들을 돌보시는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보는 것 같아서 가슴이 뜨거워졌던 적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염려하거나 불평하거나 안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살아갑니다. 얼마나 평화롭고 귀한 모습인지 모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만 의지하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믿음으로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의 나라를 구하라


  주님께서는 염려하는 대신 하나님 나라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1절)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셨습니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33절)


  하나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그 나라를 위해 헌신하며, 그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구제를 강조하셨습니다. 구제하는 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일은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일입니다. 가장 안전할 뿐만 아니라 가장 많은 이익이 보장되는 투자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덤으로 주십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어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나라에 집중될 수 있습니다.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느니라”(34절) 보물을 어디 쌓아두느냐가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합니다.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에 보물을 쌓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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