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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도행전 저자의 편견을 고발함

  • 허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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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저자의 편견을 고발함

행16:16-40

 

은행원인 강문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남자가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어서,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외상은 다 치료가 됩니다. 그런데 사고 이후 그에게 후유증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그의 후각이 갑자기 예민해 진겁니다. 다른 사람이 맡을 수수 없는 냄새를 맡을 수 있게 된 겁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의 외양 속에 감추어진 냄새 같은 걸 그가 맡을 수 있게 된 거예요. 또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사람들의 냄새를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꽃, 나무, 하늘, 밤, 낮, 계절 등 삼라만상의 향기가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또한 인간 가공물의 악취, 문명의 역겨운 냄새가 자연의 향기로움을 얼마나 착취하고 있는지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한갓 인간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세상 만물의 고통스런 울부짖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래서 점점 그는 ‘환각’에 빠집니다. 문명이라는 환각에 빠진 인간과는 다른 종류의 환각이죠. 인간의 육체적 한계 밖의, 보통 인간으로서는 닫힌 문명의 세계를 향한 초문명의 샤먼(자연/우주와 인간을 중개하는)이 되어갔습니다. 그는 별의 냄새를 이야기하는 샤먼이 되었습니다. 이야기가 진짜냐구요? 아닙니다. 정찬의 「별들의 냄새」라는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소설속의 강문규는 미친 남자가 아니라 또 다른 차원과 소통한다는, 소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소통은 한계 안에 있는 인간의 구원을 갈구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여 이 소설은 언어의 지평을 자연, 우주로 확장시키고 있죠. 그런데 강문규는 직장을 잃고 정신병원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를 정신이상으로 판단한 그의 아내가 그를 닫힌 세계에 가둬버린 것입니다.

 

강문규가 정신병원에 갇혀야 하는 이유는 세상 사람들이 하지 않는, 할 수 없는 대상들과 소통으로 한다는 것이었고, 세상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진 세계를 발설한 탓입니다. 이른바 천기누설과도 같았던 것이죠. 오늘 우리에게 이런 사람이 옆에 있다면, 가족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사도행전 16:16-40에는 흥미로운 일화 하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악령’들린 한 소녀를 치유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소녀는 점쟁입니다. 남의 운명을 감지하는 존재죠. 그는 무언가 남들이 갖지 못한 언어를 가지고 있고, 남들이 모르는 세계를 이야기합니다. 비록 이 일화가 그녀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지도 않고, 심지어 단지 바울 영웅담을 위한 대상화된 몰주체적 존재로만 취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속에는 당시의 사회와 「사도행전」 저자가 꿈꾸는 소통 상황에 대한 하나의 암시가 들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폭력이, 착취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여기에서 이 소녀를 둘러싸고 있는, 이 은폐된 소통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탐구하려 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회의에 참석한 뒤에 바나바와 불화하여 갈라진 후, 소아시아 지역을 두루 다니며 선교하던 중 꿈에 마케도니아인의 환상을 본 것을 계기로 그곳을 새로운 선교 개척지로 삼기로 합니다. 하여 본문이 묘사하는 대로, 소아시아의 트로아스를 출발하여 사모드라게 섬을 거쳐, 네아폴리스에 당도한 후 빌립보(Philippi)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그리스 이북 지역인 마케도니아의 항구도시로, 주전 356년,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필립 2세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건설함으로써 도시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이래, 소아시아와 가까이 있다는 점에서 전략적으로(군사적 상업적) 중요한 곳으로 크게 번성하였습니다.

 

주전 168년 로마가 마케도니아를 정복하여 이곳을 네 지역으로 분할하여 원로원의 속주로 삼았는데, 빌립보는 동부마케도니아의 속주 수도가 되었습니다. 후에 아우구스투스(Augustus, 옥타비아누스, BCE. 63~AD 14)가 악티움 해전 이후 투항한 안토니우스의 추종자들을 이 도시에 이주시켜 정착하게 함으로써, 많은 유력한 로마인들이 거주하게 되어 도시의 정치적 위상이 더욱 격상하였습니다. 즉 이 도시는 고대 지중해 문명의 핵심을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특히 로마적 도시의 전형성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 일행은 이곳에서 유대인들의 모임을 찾았는데, 성 밖 외딴 곳에 유대인의 기도처가 있었습니다. 이는 유대인 결사체가 상대적으로 약한 상태임을 말해주는 것이죠. 이곳에서 바울은 여러 신실한 여인들을 만났는데, 그중 루디아는 초기 바울 선교에서 매우 유력한 활동가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입니다. 그녀는 비유대인 출신의 부유한 상인(고급의류)이었는데, “하느님을 공경하는 사람”, 곧 유대교 개종자의 한 사람으로 공동체에서 유력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런 이가 바울의 가르침에 동화되어 그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고, 자기 집에 그의 거처를 마련해 주었습니다(15절).

 

어느 날 기도처로 가는 길에, ‘점치는 귀신’ 붙은 소녀를 만납니다. 아마도 점치는 귀신 붙은 소녀는 복화술사처럼 거의 입을 움직이지 않은 모습으로 사람들의 감추어진 것들을 이야기하는 부류의 점쟁이였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고대인들에게 그녀가 말하는 것이 아닌 그녀 속의 영이 말하는 것으로 비추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행태는 신뢰받는 점쟁이의 전형적 모습(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소녀는 ‘주인들’에 의해 고용되어 있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점술사 소녀는 바울 일행을 보자 그들의 신원(identity)과 지향 목적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떠벌렸습니다. 여러 날을 그렇게 하자 바울은 귀찮아서 그녀를 사로잡고 있던 악령을 내쫓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점술을 둘러싼 이권행위를 방해한 것이고, 도시의 상업 질서를 교란시킨 셈이 됩니다. 결국 바울과 실라(실루아노)는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된다는 거 아닙니까?.

 

이 이야기는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하나님이 그를 구원했으며,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바울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있음을 예시하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또한 부수적으로 다른 신이 아닌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점술의 주역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즉, 여기서 악령들인 소녀는 아무런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도리어 ‘악령’이라는 가치판단을 따라, 소녀도 은연 중 비하되고 있죠. 다시 말하면, 소녀에게서 악령을 추방한 것으로 텍스트는 충분한 선행을 베푼 듯이 묘사합니다. 그러나 추정컨대, 이 이야기가 사실적 묘사라면 그녀는 생계 수단을 상실한 셈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저자의 편견을 봅니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동시에 대중의 불안감을 깊이 유념하지 않은 채 사회의 구축과 변화를 기도한 주류 사회의 시각과 다르지 않습니다. 즉, 점술을 한갓 사술로 보는 편견입니다. 점술가들은, 마치 태풍이 몰아친다거나 지진이 일어난다거나 하는 자연의 변화를 미리 알아차리는 동물의 감지 능력과 같은 예지력을 갖춘 존재입니다. 동물들에게서 그런 것처럼 그것은 예민한 감각의 대가이며, 그런 감각은 소통불가의 타자적 대상과의 소통을 통해 가능한 것입니다. 즉 점술은 인간의 언어 행위 속에 감추어진 감각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하나의 소통수단입니다. 그것이 다른 것의 상위에 있음으로써 다른 의미를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니다. 단지 하나의 의미, 하나의 소통의 결과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다른 것의 우위에 있다고 보는 것 혹은 그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 이 양극단의 태도에 있습니다.

 

「사도행전」 저자는 바울이 이 소녀가 자신의 뒤를 따라다니며 자신들이 하나님의 사도며, 구원의 길을 선포하는 자라는 것을 이야기한 것에 화났다고 합니다. 그들이 숨기고 조심스레 해야 할 것을 폭로한 것이 문제가 되었을까요? 그러나, 실재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것을 기술한 사도행전에는 복음 전파를 굳이 숨기고 다녀야 한다는 ‘은폐의 동기’가 별로 부각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텍스트에서 바울의 격분은 그 동기가 정당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텍스트는 사도의 격분이라는 권위에 찬 이미지를 구마 과정에 개입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즉 사도는 이미 권위 있는 존재이고, 그런 점에서 대상들에게 자혜로운 이의 모습을 띠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소녀의 점술을 무가치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로마제국 시대 도시 대중사회의 역경과 그 속에서 잉태한 신앙 유형은 한마디로 쓸데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고대인에게 있서 ‘점’은 원래 신탁의 개인적 차원을 가리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점술사는 치부를 목적으로 점술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점술의 대가로 일정양의 보답을 받을 수는 있었습니다. 한데 도시화의 진척, 그리고 도시화와 (그 부수적 현상이라 할 수 있는) 전쟁 등으로 인한 급속한 인구 이동은 많은 사람들의 비교적 안정된 기초생활을 교란시켰을 뿐 아니라 가치의 붕괴를 초래했습니다. 일상생활에 관여되는 신뢰 메커니즘의 붕괴 속에서 사람들은 불안정한 생활 여건을 보상받기 위해 크게 두 유형의 방편을 구축하죠. 하나는 실리적 판단의 영역으로, 비교적 강력한 자치 결사체에 소속되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혈연적이건 종교적이건) 귀속성이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에게 있어 유리한 결사체에 소속되는 일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해서 자연스레 사람들은 신비주의적 종교나 점술사 등을 통해서 위안을 구했습니다. 신앙적 판단의 영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소비사회인 도시에서 잉여가치의 창출은 비생산적 가치창출을 통해 일어납니다. ‘위안’이라는 가치를 창출하는 점술사들은 그렇기 때문에 도시사회의 잉여창출 메커니즘의 도구로서 활용되게 됩니다. 이런 일은 신성 중심적인 전통적 가치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의 영역인데, 점술사들은 신접 체험을 통해 신성적 가치에 묶여 있기 때문에 대체로 이윤을 위해 자발적으로 일하기 어려운 존재들입니다. 해서 브로커가 존재하게 되며 점차 그들에 의해 예속되어 일하게 됩니다.

 

점술업은 구역별로 활동영역이 나뉘고, 그러한 인위적인 구분을 통해서 조합이 결성되었습니다. 물론 이런 조직화의 주체는 대개 점술가가 아니었습니다. 구역별 점술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그들의 후견인들이 생기고, 이들 후견인들은 한편으로는 주먹패들과 결연되어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하위와 상위의) 행정 당국과 연계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복잡한 이해의 고리를 형성하며 점술의 상업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사도행전 전체가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텍스트의 주된 관심은 신의 말이 인간에게 어떻게 전달되는지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대중을 향한 신의 말의 ‘내용’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고상한 말이라고 해도, 때로 그것이 전달되는 방식 때문에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것이 있습니다. 많은 종교들이 그렇듯이 그리스도교의 제국주의적 선교 행태의 맹아가 여기서 이미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텍스트에는 루디아와 악령 들린 소녀가 연이어 나옴으로써 자연스레 그들이 비교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부유하고 점잖은 부류로서(바울 텍스트에 나오는 활동적인 암시가 여기에는 어디에도 없다), 단지 사도를 부양하는 여인의 모습입니다. 반면 신들린 여인이 있습니다. 바울의 텍스트에서 여러 차례 시사되고 있는 것처럼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이런 여인은 거의 언제나 악령 들린 사람으로 묘사할 뿐입니다.

 

이와 같은 부정적 여성상은 특히 문제적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회에서 여성이 교회에서 발화권을 가질 수 있는 주된 통로는 바로 이런 비일상적 소통수단과 관련되어 있고, 그것은 비일상적 감지능력을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이 텍스트는 그리스도 공동체에서 통용되는 언어매체를 제한하고 있고, 그것을 통해서 그 제한된 영역 외부의 언어에 대해서 배제적인 제도화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막힌 사회를 돌파하는 대중의 언어로 등장하셨습니다. 그것은 비록 비현실적이긴 해도, 현실의 닫힌 구조를 비판하는 신랄한 저항담론이자 희망의 이야기였습니다. 그것은 전파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요소들과 마주치면서 변형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시간이라는 요소는 아마도 예수담론의 비일상성, 그 혁명성을 시대와 어느 정도 타협시키게 하는 결정적인 변수였겠습니다. 그밖의 여러 요소들 또한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이 점에서 「사도행전」은, 특히 점치는 귀신 들린 소녀 텍스트가 그리스도교 역사의 뚜렷한 체제내화의 흔적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생명력을 긴 시간 존속할 수 있게끔 하였지만, 동시에 많은 시대적 한계를 공유하는 존재로서 그리스도교를 재탄생시켰습니다. 그 중의 한 양태를 「사도행전」 16장의 이른바 ‘점치는 귀신 붙은 소녀’ 텍스트는 보여준다는 겁니다. 인류 문명이 인간 언어를 제한시켰다면, 교회의 문명화 또한 신앙의 언어 양상을 제한시켰습니다.

 

‘영’은 자유로움에 그 본질이 있습니다. 무엇에 구속되지 아니함입니다. 어떤 것으로 형태화함에 대한 저항입니다. 무한한 일탈인 것입니다. 한편, 자유로움의 반대에는 ‘육’이 있습니다. 그것은 종종 제도화의 신앙적 언어로 쓰입니다. 바울이 교회를 주의 몸이라고 묘사하는 것이 그렇습니다(고전12:27). 바울 후대에 그를 추종하는 한 공동체 또한 이러한 수사어를 제도화의 언어로써 해석하여 계승했습니다(에베5:30). 교회는 분명 신앙의 제도화의 하나로서 발전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발전에서 영은 제도화의 장애물 내지는 견제 장치였습니다. 육과 영, 이 둘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발전에서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모두가 예수의 삶과 신앙을 계승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경험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특히 그 길항성, 서로 모순되면서도 서로 얽힌 관계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신앙의 요소였습니다.

 

한데 육의 체계, 곧 교회는 이러한 영의 자유로움을 교회를 통한 신앙의 언어에서 제거시켜버렸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비극입니다. 교회는 제도화에 ‘순응하는 영’만을 허용했고, 자유로움을 신앙 외부를 밀어내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여기서 ‘교회의 비극’이 되었다는 뜻은 교회를 이루는 본질적인 영적교통의 수단을 제거하고 제도화된 뼈대만을 운영하므로 외형만 남고 피가 흐르지 않는 현재의 건물 중심의 물상적인 교회가 되었다는 의미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교회는 인간과 대화하는 또 하나의 주된 통로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대화의 가능성을 잃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교회가 대화할 수 있는 세계가 패권주의적인 문명화의 주체, 도구적 이성의 소유자로서의 인간인 이상, 교회는 인간에 의해 비인간화된, 비주체화 된 대상세계를 착취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대화가 아니라 독백이며 폭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다보니 오늘날 교회의 주 된 언어가 된 ‘성령’또한 신과 인간, 인간과 우주, 나와 대상 혹은 타자와의 소통으로 작동하는 게 아니라 제도와 질서의 유지를 위하고 대중을 통제하기 위한 폭력의 힘으로 작동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물론 물질에 노예가 된 오늘날의 교회는 욕망을 성사시키는 절대적 권위로도 작동하지만, 이런 변형과 왜곡은 결국 사도행전의 ‘귀신들린 점쟁이 소녀’를 제대로 해석해 내지 못한 사도행전 저자의 편견에서 기인했다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신앙적 과제는 사도행전이 제거해 버린 그 무한의 소통기능으로서의 ‘성령’이 교회의 본질이 되게 하는데 있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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