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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걸 믿느냐 하는 겁니다.

  • 허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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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믿느냐 하는 겁니다.

막15:34-35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임을 드러내려는 용의주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광야에서 활동하며, 낙타털옷, 가죽허리띠 같은 의복이나 메뚜기·석청 같은 음식을 먹는 모습은 영락없이 사람들의 기억 속의 엘리야 바로 그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말라기서」의 다음과 같은 구절과 관련이 있습니다.

 

너희는 내가 호렙산에서 나의 종 모세를 시켜 온 이스라엘에게 내린 법과 규정과 계명을 되새기도록 하여라. 이 야훼가 나타날 날, 그 무서운 날을 앞두고 내가 틀림없이 예언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엘리야가 어른들의 마음을 자식들에게, 자식들의 마음을 어른들에게 돌려 화목하게 하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세상을 모조리 쳐부수지 아니하리라. ―말라기3장:22~24절

 

여기서 보듯이 엘리야에 관한 대중적 기억은 ‘종말’과 ‘심판’이라는 전통적 인식 코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현재에 대한 강력한 부정(否定)이 대중의 열망으로 간직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세례자 요한의 “회개하라.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는 대중의 현 체제에 대한 불만을 증폭시켜 종말에 대한 신앙과 연계시키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가 요한의 운동을 계승했을 때, 대중의 기억 속에서 다시 부활합니다. 즉 요한의 부활한 몸이 예수라는 대중적 인식은 ‘엘리야=요한’이라는 대중의 믿음과 연결되어, 예수에게서 엘리야를 떠올리는 연상 작용을 낳았던 것입니다(막8:28).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처절한 고통 속에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라며 절규하는 고성을 지르며 임종하는 장면에서 사람들은 그 소리가 ‘엘리야’를 부르는 소리로 오인했다고 합니다(막15:34~35). 그만큼 예수는 동시대에 부활한 엘리야로 인식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에 더욱 깊이 다가갔음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세례요한이나 예수를 대중들은 다시 태어난 엘리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역사의 엘리야는 어떤 존재였을까요? 그는 정말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을 만한 성공적인 이였을까요? 아니면 실존의 그와는 전혀 엉뚱한 모습으로 변형되어 기억된 것은 아닐까요?

 

엘리야 예언자는 오므리 왕조, 특히 아합 왕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 입니다. 오므리와 아합 왕의 시대는 아마도 팔레스티나 역사에서 이스라엘이 가장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영토만 보더라도, 요르단 동편의 암몬, 그 남부의 모압, 그리고 에돔과 유다 왕국을 속국으로 지배했던 것으로 보이고, 북으로 갈릴래아 북부 지역 끝의 ‘단’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다마스커스 왕국과의 국경인 시리아 남부 지역까지 차지하였습니다. 상부 갈릴래아의 북단의 단과 하솔, 하부 갈릴래아의 므기또와 이즈르엘, 그리고 사마리아 지역 등에서 오므리-아합 대에 건조된 거대한 왕궁 및 요새가 발굴되었는데, 그 규모나 세련미가 당대뿐 아니라 상당한 후대에까지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특출 납니다. 특히 이 도시들에서 발굴된 지하수로나 마구간의 규모는 이 왕조가 얼마가 강력한 위용을 가진 나라인지를 시사하고 있어요.

오므리 왕조에 이르러서 팔레스티나 거의 전역을 통제할만한 강력한 왕조가 비로소 탄생한 것입니다. 흔히 다윗-솔로몬 대의 왕국을 팔레스티나에서 성립한 최초의 고대국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러한 이해의 근거는 단지 성서의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인 묘사에서만 얻을 수 있을 뿐입니다. 솔로몬이 건립했다는 도성의 보잘 것 없는 흔적을 비롯한 고고학적 증거도 그것을 입증해주지 않고, 외국의 비문에는 전혀 언급조차 얻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반면 ‘오므리의 집안’은 외부의 시선에서 남북의 왕조를 통틀어 이스라엘 족속들의 나라를 대표하는 존재로서 오랫동안(이 왕조가 몰락한 이후에까지도) 기억되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페니키아의 왕녀인 이세벨이 아합의 부인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전승에는 아세벨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합니다. 그만큼 이세벨의 상징적 이미지는 아합의 정책에서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성서는 그것을 바알과 아세라 신앙과 관련시킵니다. 이 텍스트들에서는 이 왕실신앙을 혼합주의로 다루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선후대 왕조들은 예언자들의 지지에 힘입어서 왕위를 획득합니다. 그것은 대중과의 계약이 왕권 형성에 중요한 기반이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필경 오므리 왕조도 그러한 예언자적 지원을 기대했을 성 싶습니다. 그러나 바아사, 지므리 등으로 이어지는 계속되는 군사쿠데타의 상황에서 예언자의 지지는 그다지 정당성을 갖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오므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직후 티브니를 주축으로 한 세력과의 내란 상황에 빠진 것은 이러한 예언자적 지지의 약한 정당성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란을 극복한 뒤, 이러한 약한 정당성은 오므리 왕조의 강점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언자적인 계약 전통에 덜 의존적인 정권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여 이 왕조는 보다 자유롭게 강한 전제군주적 모델을 구축하기 위한 모색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므리가 아들 아합을 페니키아의 왕녀 이세벨과 결혼시킨 것은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가능했습니다. 그러므로 아합은 보다 적극적으로 이즈르엘에 왕궁을 건립하고, 그곳을 전제군주적 통치의 기초로 삼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합의 혼합주의’ 정책은 종족 연합에 기초한 고대의 국가로서는 불가피한 상황이었고, 오므리 왕조는 그런 점에서 이러한 이질성을 효과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성공을 거두었던 것입니다.

 

오므리 왕조가 페니키아의 바알 신학을 도입한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왜냐면, 오래전부터 지중해 무역 시장 형성에 뛰어든 페니키아의 문화전통은 보다 사적인 소유 개념을 발전시켰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능력이 있으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자유방임주의적 관점과 어느 면에서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므리 왕조에 의한 ‘국가의 성공’은 이러한 신학적 발전의 중요한 단서가 되었습니다. 대대적인 건조물은 모든 백성에게 그 위용을 드러냄으로써 국가주의적 성공의 미학을 홍보합니다. 또 국가적인 지원에 힘입은 대규모 제의는 그 화려한 전례 행사를 통해 성공주의를 찬양합니다. 반면 이러한 국가주의적 신학에 도전하는 자들은 국가의 공공연한 억압을 받았겠죠. 많은 이들이 지하로 숨어들었고, 그들의 담론 또한 침묵의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이제 전 사회는 왕조의 찬란한 성공 신화에 온통 사로잡힌 듯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문화 속에서 태어났고, 자랐으며, 그 속에서 문법화 된 성공 게임에 몰두해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엘리야가 등장하고, 이런 사회적 배경를 바탕에 두고 활동을 합니다. 왕조의 이러한 성공의 미학이 한참 활기를 띠던 바로 그 때 말입니다. 어느 나라를 점령했다는 전령의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연일 들렸고, 그 나라에서 보내온 공납물의 행렬이 계속되는 도로 한복판을 거닐면서, 그는 그 화려한 성공에 문뜩 ‘불편함’을 느낍니다.

 

그에 관한 성서의 묘사는 문학 양식상 ‘전설’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예수에 관한 담론처럼, 서기관적 저술가들의 지적인 매체를 통해 기억된 것이 아니라, 민간전승을 통해 입에서 입으로 오랫동안 간직되어 온 이야기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만큼 이 이야기는 대중의 분노와 희망의 언어로 가득하다는 뜻이죠.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역사의 엘리야’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합니다.

 

「열왕기상」 17장의 시돈 지방의 사렙다의 과부 이야기를 보시지요. 여기에는 왜 그가 대중적 분노와 꿈의 이야기, 그러한 기억의 대상이 되었는지에 관한 근거가 슬며시 들어가 있습니다. 여기서 그가 베푼 기적은 작은이들의 매우 일상적인 고통과 관계하고 있습니다. 다른 예언자들이나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의 기적 같은 것이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인 큰 메시지를 담고 있는 데 반해, 엘리야의 활동은 이념에 채색되지 않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생생한 역경과 그것의 극복 과정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과부와 어린아이가 그의 기적의 수혜자로 나온다는 점은 대중적 고통의 극한에 더욱 가까운 곳에서 그에 관한 애틋한 기억이 잉태하여 자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요컨대 엘리야는 아합 왕조가 추진하던 강력한 전제군주제 정책이 대중의 희생을 동반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불편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권력을 동원하여 왕이나 귀족들이 소농들의 토지를 몰수하는 일이 숱하게 일어났고,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이나 부역에 동원되어야 했던 대중으로선 땅을 지키는 일이 너무나 버거웠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과부나 고아는 무수히 양산되기 마련이고, 그들의 생존권은 전혀 보장될 수 없습니다. 이런 부의 극심한 편중 현상이 국가주의의 발전과 관련되어 있고, 페니키아식 바알 종교에 의해 미학 화 되고 있다는 사실은, 아마도 엘리야를 통해 대중에게 속속들이 들춰졌을 것입니다. 그의 활동이 얼마나 성공적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성공한 정도만큼은 그것이 들춰졌다고 하는 것은 이론의 여지없습니다.

 

갈멜 산은 페니키아와 이스라엘 접경지대에 있는 산입니다. 또한 이즈르엘 성읍에서 그리 멀지 않은 중요한 요새 성읍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곳은 양국의 상이한 종교 전통간의 대립이 빈번한 지역이기도 했고, 이 점에서 이 지역의 상징성은 단순한 장소의 점유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넘어섭니다. 아합과 이세벨은 아마도 이곳에 바알신앙을 기리는 신전을 세웠을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야훼신앙이 그 하위에 포섭되어 있었을 것이고, 사람들에게 전혀 불편하지 않은 것으로 기억되게 하는 장치를 포함하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대규모의 사제들이 국가제의를 수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대중을 선동하여 이들을 몰살합니다. 성서가 묘사하듯 천 명에 이르는 대대적인 학살극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실상은 훨씬 소소한 사건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그는 이 거사가 혁명으로 발전하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세벨의 공권력에 그는 추격당하는 신세가 되었고, 유다 남부 네겝 지역인 브엘세바로까지 도주해야 했습니다.

 

먼 길을 달음질하느라 온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더욱 그를 좌절시킨 것은, 그토록 열망해마지 않던 새 세상에의 희망이 좌절된 것이었을 것입니다. 차라리 죽여 달라고 절규하는 모습은, 아마도 엘리야보다 더욱 절망했던 대중의 심정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대중은 엘리야를 기억하면서 갈멜의 실패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실패의 기억은 엘리야에 관한 전승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그가 천사에 이끌려 호렙으로 간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혁명적 거사 실패와 그에 따른 절망에 사로잡힌 상황을 극복하는 대중의 자존적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호렙 산에 이른 엘리야는 야훼의 계시를 받고자 했습니다. 새로운 희망의 근거를 갈망하는 자의 몸부림으로 말입니다. 그때 엄청난 바람이 휩쓸고 지나갑니다. 모세 전설에서나 나올 법한..., 과연 야훼의 임재를 체험할 만한 기세였습니다. 그러나 야훼는 거기에 없었지요. 이윽고 온 땅을 뒤흔드는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이 세상의 최고 지배자이신 야훼의 발소리에 놀란 땅의 요동이기라도 한 양. 하지만 여전히 야훼는 나타나질 않습니다. 도대체 어떤 어마어마한 일이 더 일어나야 한단 말인가요.

 

갑자기 불길이 치솟습니다. 그래, 이제야 말로, 야훼가 나타나시나보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야훼는커녕 송사리 귀신도 보이질 않습니다. 이를 어쩐단 말인가? 야훼는 바알에게 졌단 말인가? 바알이 더 강한 신이란 말인가? 세상은 악이 지배할 수밖에 없단 말인가? 그렇다면 민중의 해방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말인가!

 

그때였습니다. 솔바람이 스치듯이, 세미한 소리가 그의 귓가를 슬쩍 건드리고 지나갑니다. ‘엘리야, 네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느냐?’ ‘광풍에도, 지진에도, 천길 불꽃 속에서도 없던 신이..., 아 이런, 그렇구나.’ 엘리야는 야훼의 임재가 이렇게 오는 듯 마는 듯 다가오는 것임을 비로소 발견합니다. 천지를 진동시킨 혁명적 대사건에서가 아니라, 미세한 일상 속에서 감각 세포들을 살며시 건드리며 다가오는 것, 밖에서 오는 것인지 안에서 발아하는 것이지도 모르도록 다가오는 것. 천지와 자아가 합류하는 곳, 바깥에서 흘러오는 물과 안에서 솟아오른 물이 어우러져 뒤섞이는 곳, 나와 신이 아와 타로 구분되지 않고 하나로 합체되는 곳, 그곳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도래하는 것이라고.

 

대중은 엘리야 이야기를 통해 국가주의적 성공의 미학을 불편해하는 예언자적 감수성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의 이야기에는 혁명적 이념의 이데올로기가 담고 있는 또 다른 성공주의에 대한 불편함이 스며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갈멜 실패의 기억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간직하는 대중의 니힐리즘적 지혜가 되살아나고 있는 겁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누구나 죽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대중은 이런 시간의 법칙에도 굴복하지 않는 엘리야를 기억하고자 합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불 말이 끄는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날아갔다고. 이러한 믿음은 그가 언젠가 바로 그런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리라는 소망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런 대중의 믿음은 시간이 지나도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욱 증폭됐습니다. 후대의 역사에서 그는 메시아 왕국 도래의 상징으로 기억됐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그러한 메시아 왕국이 또 다시 저항의 성공주의에도 물들지 않는 전통으로 부활했습니다.

 

엘리야, 그는 칼을 든 예언자다. 그는 혁명가입니다. 그러나 성공한 혁명가가 아닙니다. 그는 실패했습니다. 요한은 무저항의 예언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혁명은 성공하지 못하였고, 혁명대상자의 칼에 죽었습니다. 예수도 혁명자였습니다. 칼 대신 말씀의 검을 든 혁명자였지만 그도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좌절하는 모습을 보여줄 틈도 없이 역사의 무대에서 긴급히 사라져야 했습니다. 하지만 대중은 바로 그 실패 때문에 괄호 쳐진 후속의 이야기를 채워 넣어야 했습니다. 성서는 엘리야와 세례 요한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미완성 교향곡을 완성시킨 대중의 기억술의 단초를 보여줍니다. 그들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실패로 말미암아, 대중에게 실패는 곧 더욱 온전한 성공의 흔적임을 알려주었습니다. 대중은 엘리야, 세례 요한, 예수로 말미암는 온전한 성공의 담론을 창조하는 주역으로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사건을, 그 속에서 영웅이 탄생하고 그의 뒤를 추종함으로써 거대한 변화가 이루어지는 사건을 통해 단박에 확보되는 그런 성공의 파노라마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약간의 성공과 약간의 실패가 끝없이 교차되는 가운데 되는 듯 마는 듯 만들어지고, 끝없이 지양되면서 펼쳐지는 일상적 사건의 연쇄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들의 실패를 담론으로 하여 성공의 변화를 도모하는 가운데 끝없는 일상 속에서 그들의 삶을 이어가는 주역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성공했으므로 그들을 따르고 믿는 게 아닙니다. 실패했기 때문에, 그 실패를 우리의 일상에서 완성하려고 그들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엘리야나 세례요한이나 예수께서 단박에 변화와 혁명 혹은 새 나라의 도래를 이루었기 때문에가 아니라 그 반대로 그 일이 실패하였다고 보기 때문에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왜냐, 우리가 일상에서 그 일을 성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의 요체는 엘리야, 세례요한, 예수그리스도가 추구했던 혁명과 변화의 새 나라가 당시에 실패했다는 사실, 이걸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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