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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댄 여인

  • 허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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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댄 여인

막5:25-34

 

지난주에는 거라사의 귀신들린 사람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의 치유 기적이 개인의 불행을 표방하고 있지만 실상은 로마의 식민지 통치 아래서 겪는 고통의 극복을 위한 시작이 어디인지를 제시하고 있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가가 말하는 예수의 복음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에 있었지요. 오늘은 예수님의 치유 기적 하나를 더 볼 텐데요, 이 이야기는 당시 사회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차별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오늘 하혈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문학양식상 ‘샌드위치 기법’이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하혈하는 여성의 이이기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치료하는 그 중간에 끼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는 이야기는 다 아시죠? 5:21-24이니 한 번 읽고 가 볼까요? 그렇게 그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큰 무리가 뒤 따라는데 그 때 하혈하는 여성의 치유 사건이 일어난대서 그걸 ‘샌드위치 기법’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여성이 고침을 받아서 그녀와 이야기하는 도중에 야이로의 집에서 전갈이 왔는데 그만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죠. 예수님은 회당장의 집으로 가서 죽은 딸을 살려내죠.

 

이 샌드위치 기법은 마가가 자주 사용하는 문학 기법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양식을 선택하여 기사를 쓰는 걸까요? 두 개의 공통되는 요소를 부각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회당장의 딸을 살리는 이야기와 하혈하는 여성의 이야기가 갖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샌드위치 기법으로 엮은 마가의 의도를 읽게 되죠.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먼저 주인공이 모두 여성이라는 겁니다. 뭐 인구의 절반인데 그럴 수 있지 않느냐 하시겠지만 당시에 여성이 어떤 일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일은 아주 예외적입니다. 하혈하는 여성이 12년을 고생했다면 야이로의 딸은 12살이라는 게 그 다음 공통점입니다. 이 소녀가 살아온 12년 동안 다른 여인은 하혈을 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차이점은 한 쪽은 소녀이고 다른 한쪽은 성인 여성이라는 것이겠죠. 여성신학자들은 하혈이 월경과 상관이 있는 질병이라고들 합니다. 그래서 드러내지 못하고 몰래 예수님의 옷을 만졌다는 거죠. 반면 회당장의 딸은 부유하고 신분이 높은 집안에서 삽니다. 그러니까 하혈하는 여인처럼 소외된, 배제된 여성이 아니라는 것이죠. 소녀는 병에 걸려 집에 누워 있는 반면, 여성은 매우 적극적으로 자기의 살길을 찾아 세상 밖으로 나와야 했던 존재입니다.

 

이렇게 마가는 샌드위치 기법을 통해 공통점과 차이점을 나타내 보이고, 두 여자가 고침을 받은 이후에 이들이 나타내는 믿음의 강도를 드러나게 해 줍니다. 5:34에서 하혈하던 여인에게는 “딸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하시는 반면에 회당장 야이로에게 말합니다. “두려워 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36절에 등장하는 말씀이죠.

 

좀 더 자세히 두 이야기를 들여다봅시다. 먼저 12년 동안이나 하혈을 했던 여인에게서는 ‘하혈’과 ‘12년’이 도드라져 있습니다. 여성신학자들은 이 질병이 병적일 정도로 심한 월경이라고 합니다. 자궁 내출혈일 거라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질병은 개인의 삶을 무력화 시킬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 결부되어 이 여성의 삶을 구속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레위기 15:25에서 여성의 피는 불결의 표지였습니다. 이러면 그 자신도 불결하고 다른 사람까지 부정하게 하는 것이 됩니다. 여성들은 피를 흘리는 동안 불결한 존재입니다. 다른 죄를 짓지 않아도 근원적으로 불결한 존재로 태어난 것입니다. 만약 월경 불순이 되면 그 기간 동안 부정한 존재가 되고 대략은 7일간이 부정한 기간입니다. 매달 여성은 7일 동안 부정해지는 것입니다. 이걸 정결법이라고 했는데, 이러다 보니 이 여성은 신체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차별과 고통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여인이 감내해야 할 내면의 상처는 어마어마할 것이 아니겠어요? 자존감을 갖기 어려웠을 것이고, 12년 동안은 가족과 사회에서 강제 격리 되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접촉하는 모든 게 부절한 게 되기 때문에 그녀를 그대로 둘리 없는 세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녀의 행동을 보세요. 12년 동안이나 골방에 쳐 박혀 살았던 불안하고 나약하게 망가진 여성의 태도입니까? 아닙니다. 자신의 변화와 혁신을 추구하기 위한 의욕으로 넘쳐나서 적극적인 의사가 표출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녀는 12년 동안 세상의 압박에 저항하면서, 자신의 육체적인 구속에 포위당하지 않고 그것을 넘어 서겠다는 의지가 지속되었을 것입니다. 예수가 지나간대서 안 되면 말고 하는 심정이 아니라 ‘기필코’ 극복하겠다는 의지와 신뢰가 담긴 태도입니다. 그녀의 고통스러운 12년은 저항의 축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예수 앞에 당도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의사는 이스라엘에서 지식인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말이죠. 그들은 대략 부유층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에게 의사는 부정한 직업군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 고장난자, 피 흘리는 자를 상대하기 때문에 그들도 그런 존재라는 거였죠. 그러니 그들에게 의사는 기피의 대상이었죠. 이런 종교적인 터부에다가 일반 국민들은 의사에게 갈 처지가 되지 못하니까 주술에 의지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의사들은 주술사들을 사기꾼이라고 했을 거고, 예수가 귀신을 축출하니 의사들은 예수를 사기꾼의 한 사람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자, 이러면 가난한 일반 백성들은 오도 가도 못 하게 됩니다. 의사에게 갈 수도 없고(가려니 돈도 없고)주술로 치유하는 사람에게 갈 수도 없습니다(지식인들이 사기꾼에 속는다고 비난을 해대니). 그런데도 이 여성은 예수에게 뛰어 들었고 예수님은 여성을 치유했습니다. 3:10을 보면 예수는 이미 세상의 그런 관념을 무시하고 병자들을 고치고 있었습니다. 여성도 이런 예수의 이야기를 듣고 예수의 옷을 만집니다.

 

예수의 옷을 만지자 어떻게 되었나요? 여성의 몸이 나은 것을 알았습니다. ‘레위기의 몸’ ‘레위기의 세상’에서 ‘일반적인 세상’ ‘살만한 세상’으로 여성이 복귀한 것입니다. 출혈 혹은 하혈이라는 그리스어 단어는 [마스티고스 mastigos]인데 이는 ‘채찍질’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신체적인 고통(채찍질)과 사회적인 채찍질에서 벗어나는 순간입니다. ‘고통에서 나은 것을 느꼈다’입니다. 이는 단순한 신체적인 질병의 치유를 넘어서는 의미를 갖습니다.

 

그런데요 정말 중요한 대목은 그 다음입니다. 여인이 ‘나은 것을 느낄 때’ 예수님도 ‘자기의 몸에서 능력이 나간 것을 몸으로 느꼈다’고 합니다. 이 ‘느끼다’의 단어가 ‘기노스코’라는 단언데 여성과 예수의 몸이 느낀 그 ‘느낌’이 모두 같은 단어입니다. 여인의 몸이 해방된 것을 느낄 때, 예수께서도 그의 몸속에서 능력이 나간 것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능력은 사람을 구속으로부터 해방하는 능력인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예수님과 이름 없이 소외된 존재로 살아온 여성 사이에 깊은 상호 소통이 이루어진 사건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녀에게 말합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돌아가 다시는 아프지 말아라.” ‘딸, 네 믿음, 아프지 말아라’ 이 단어들이 의미하는 바가 얼마나 크고 놀라 운지 이해할 수 있습니까? 피 흘리며 살던 12년의 그 여성에게는 너무 벅찬 언어들입니다. 그녀는 부정한 존재라 누구의 ‘딸’도 될 수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능력 있는 존재의 딸이 된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입니다. 그녀는 부정하므로 ‘믿음’을 가질 기회조차 박탈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마음으로나 몸으로 아프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세상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동시에 풀려버린 것입니다. 이 세 단어 속에서 말입니다. 그녀는 이제 예수의 믿음의 동지가 되었고, 가족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아, 물론 여인의 믿음이 예수를 구주로 믿는 믿음은 아닙니다. 아직 기독교 신앙이 없었던 때이니 그녀의 믿음은 예수라는 존재에 대한 신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당하고 있는 신체적이고 사회적이며 내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길 간절히 원하고 필사적으로 예수에게 다가가 그의 옷을 만지기까지 했던 굳건한 신뢰 말입니다. 이 신뢰를 ‘피스티스’라고 하는데, 이는 황제에게나 쓰는 말입니다. 그런데 마가는 이 진정한 신뢰의 대상을 황에게서 예수에게로 옮겨 놓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사회의 권력에 대한 도발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인은 그를 둘러싼 상황에 저항하였고, 그것이 곧 피스티스로 나타난 것입니다.

 

자, 이제 예수님이 하신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무너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여인에게 일어난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를 신뢰하므로 그녀가 자유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매개는 질병의 치유였지만 이는 단순하게 병을 고치는 차원을 넘어서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일은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예수를 신뢰 즉 ‘피스티스’했기 때문입니다. 마가는 이것이 바로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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