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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둘 수 없는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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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아비브 욥바교회 2017년 10월 14일 설교 이익환 목사

사도행전 강해 9 가둘 수 없는 영혼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24]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행16:22-25)

 

우리 모두는 뭔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 싶은 갈망이 있다. 구글에 ‘자유로운 영혼’이라 쳐 보았다. 검색 결과 한 아티클에서 이런 내용이 있었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책임감을 다 저버린 사람들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는 잘못된 인식이다. 진정 자유로운 영혼이란 삶의 역경에 더 잘 대처할 수 있는 현실과 관계하는 방식, 태도, 성격과 관련되어 있다.’ 공감이 가는 글이었다.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 말씀을 통해 한 자유로운 영혼을 만나보고자 한다. 사도 바울이다. 그가 특히 역경을 만났을 때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었는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바울은 한 때 이스라엘 사회에서 앞 길이 창창한 젊은이였다. 최고의 랍비 가말리엘에게서 랍비수업을 받은 유학파였다. 지금 국회의원이라 할 수 있는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이기도 했다. 그런 젊은이가 예수를 만나고 소위 세상에서 성공으로 가는 길을 접었다. 자신의 모든 타이틀을 잃어버리고 그것을 배설물처럼 여겼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후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이방인들을 구원하는 사도가 된다.


그에게 펼쳐진 세상은 너무도 넓었고 할 일은 많았다.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 그는 이방세계로 나아갔다. 1차 전도여행을 통해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주시고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고 음식법을 지켜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유대인들에게 그것과 상관없이 이방인들이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은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는 사안이었다. 사도행전 15장에서는 이를 정리하는 예루살렘 회의가 열린다. 사도와 장로들 간에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여기서 베드로는 이방인들도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한다. 행 15:10-11,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베드로가 바울을 지지하는 발언을 한 것이다. 바나바와 바울도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선교 보고를 한다. 이후 당시 의장 역할을 했던 야고보가 결론을 내린다. 행 15:19-20,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이방인들이 유대인처럼 할례와 음식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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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2차 전도여행 여정

 

바울은 이제 예루살렘 교회의 공식 지지를 얻어 더욱 힘차게 2차 전도여행을 준비한다. 이 때가 AD 50년경의 일이다. 그러나 팀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바울은 바나바와 결별하게 된다. 바울은 실라를 택하여 전도여행을 떠난다. 루스드라에 이르러 바울은 디모데를 팀원으로 합류시킨다. 이들은 여러 성에 다니며 예루살렘 회의에서 정한 규례를 지키게 했다.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갔다.


부흥을 지켜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거기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소아시아 지역에서 계속 말씀을 전하길 원했다. 그런데 그 때 성령의 이끄심이 있었다. 행 16:6-7,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그 이끄심은 다름 아니라 바울의 계획을 막는 것이었다. 우리가 계획한 것을 하나님이 막으시고 방향을 트실 때가 있다. 바울은 자신의 계획을 내려놓고 드로아로 내려간다. 거기서 바울은 밤에 환상을 본다. 한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나 마게도냐로 들어와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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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6: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자 여기서 ‘우리’가 누굴까? 그동안 사도행전을 3인칭으로 기록되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1인칭으로 기록된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드로아에서 바울의 선교팀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이제 바울과 실라, 디모데와 누가는 배를 타고 네압볼리에 도착한다. 네압볼리는 지금 그리스의 ‘카발라’라는 조그만 항구 도시다. 거기에 바울의 도착을 기념하는 교회가 있다. 바울은 본인의 의도와는 다르게 역사적인 유럽선교의 첫발을 내딛은 것이다. 한 사람의 발걸음이 유럽의 교회 역사를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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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압볼리 (현재 그리스의 항구 도시 ‘카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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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발라에 있는 바울 도착 기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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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 우리를 도우라’ 마게도냐 환상 벽화

 

원래 바울은 자신에게 익숙했던 소아시아 지역부터 복음을 전하기 원했다. 하지만 성령은 낯선 곳으로 바울을 이끄셨다. 바울은 마게도냐의 첫성인 빌립보에 도착한다. 빌립보는 알렉산더의 고향이었다. 바울은 거기서 기도할 곳을 찾다가 루디아라는 여인을 만난다. 주님은 그 여인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한다. 빌립보에서 유럽 최초의 신자가 탄생한다.


바울은 기도하는 곳을 가다가 이번에는 귀신 들린 여종을 만난다. 이 여인은 점을 쳐서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였다. 그런데 바울 일행이 그곳을 지나갈 때마다 이 여자가 따라 오며 소리쳤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귀신이 바울의 존재를 귀신같이 안 것이다. 이런 일들이 여러 날 반복되었다. 바울이 괴로워 그 귀신에게 명령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귀신이 즉시 나왔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그 여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귀신이 나가자 그 여자에게 있었던 점치는 능력도 사라졌다. 그러자 수입원이 끊기게 된 여종의 주인들이 분노한다. 그리하여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관리들에게 끌고간다.

행 16:20-21,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이 당시에도 반유대주의가 있었던 것 같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여러 도시들에서도 미움의 대상이 되었다. 주인들은 당시 사람들에게 있었던 반유대주의 감정을 자극했다. 바울과 실라가 유대인임을 강조하며 그들을 고발한 것이다.


행 16:22-24,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24]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바울과 실라는 매 맞고 발이 차꼬에 채워진 채 감옥에 갇히게 된다. 함께 동행이었던 디모데와 누가는 왜 제외되었을까? 그들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이 당한 고난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설명하는 장면이 있다. 고후 11:23-25,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아마도 세 번 태장을 맞은 것 중에 한 번이 이 빌립보에서 맞은 것이 아닌가 한다. 태장은 가죽 끈의 끝에 납 덩어리를 매달아 매질하는 로마의 형벌이다. 노예와 반역자들을 다스리기 위해 고안한 것인데 로마시민에게는 금지된 형벌이다. 살이 찢어지고 고통이 극심해 태장 집행 중 많이 죽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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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 감옥 전경

 

감옥에 갇힌 바울의 심정이 어땠을까? 빌립보는 바울이 오고 싶어서 온 도시도 아니었다. 자신은 비두니아로 가고 싶었지만 성령이 허락하지 않아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하나님이 이끄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따라 달려온 삶인데 결과는 감옥행이었다. 하나님이 원망스러운 마음도 들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바울은 의외의 반응을 한다. 행 16: 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매맞고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도 시원치 않을 판에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송한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보통 고난을 당하면 사람들은 위축되기 마련이다. 상황의 크기와 내가 받은 고통의 크기 때문에 눌리는 것이다. 그러나 기도하면 그 상황보다 더 크신 하나님과 연결된다. 그리고 그 고통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관점이 기도하는 사람의 영혼에 스며들게 된다. 바울의 몸은 비록 고통 중에 갇혀있었지만 그 영혼은 기도를 통해 자유로워진 것이다. 그는 모든 상황 속에서 상황보다 크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찬송을 부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어쩌면 시편 말씀을 암송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시 46:1-3,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2]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3]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바울은 산이 흔들리는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에게는 주님에 대한 변함없는 믿음이 있었다. 로마서에서 그 믿음을 이렇게 고백한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고난과 역경 중에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바울에게 있었다. 이 믿음이 그가 감옥에서도 찬송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바울은 후에 로마에서도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 때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기뻐하라고 편지한다. 빌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감옥에 갇힌 바울이 감옥 밖의 성도들에게 기뻐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감옥 안에 있는 바울에겐 기쁨이 있었고 감옥 밖에 있는 빌립보 성도들에게는 기쁨이 없었던 것이다. 바울은 이 기쁨이 있었기에 자유로운 영혼이 되었다. 몸은 비록 감옥 안에 있었지만 그 영혼은 누구도 가둘 수 없었던 것이다.


기쁨이 환경과 상황에 따라 그 크기가 달라진다면 그것은 진정한 기쁨이 아니다. 물론 외부에서 주어지는 기쁨도 있다. 하지만 진정한 기쁨은 우리의 마음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 빌 4:10-12,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여러 고난 속에서 바울의 영혼은 연단되었다. 그리하여 어떠한 형편에서도 자족할 수 있는 정금과 같은 영혼을 얻었다. 그에게는 고난이 절망과 좌절의 이유가 아니라 더 깊은 자유로 나아가는 촉매제가 된 것이다.


바울과 실라는 고난과 고통에 집중하지 않고 기도와 찬양에 집중했다. 그 결과 기적이 일어난다. 행 16:26,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바울이 했던 기도는 무엇이었을까?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서 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만약 그랬다면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렸을 때 그는 바로 감옥을 떠나 갔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감옥을 지키던 간수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의 온 가족에게 세례를 준다. 그는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우리가 고난을 벗어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1차원적인 기도다.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는 사람은 고통과 고난도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단순히  고난의 잔이 지나가기를 기도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되길 바랬지만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기도하셨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리가 감당해야 할 고난이라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모든 고난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니다. 인생의 그 누구도 고난에서 열외 될 수 없다. 오히려 우리가 믿기 때문에 더 큰 시련의 밤을 맞이 할 수가 있다. 시련으로 나의 삶이 묶여질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는가? 시편기자는 노래한다. 시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환난을 통과할 때 기도하는 자가 되길 바란다. 낙심과 절망과 좌절로 이끌리는 마음을 내버려두지 말고 모든 상황과 인생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길 바란다. 이해 안되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당신만이 옳습니다. 당신이 내 인생의 주권자가 되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길 바란다. 그러한 기도와 찬양은 우리의 영혼을 자유케 할 것이다. 불같은 고난을 통해 연단받을 때 정금과 같이 순전한 영혼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영혼은 아무도 가둘 수 없는 것이다. 그럴 때 옥문은 열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기적을 맛보게 될 것이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아무도 가둘 수 없는 영혼이 되어 상황에 지배당하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을 창조해내는데 사용되어지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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