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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떡 때문에 믿지 말라

  •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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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 때문에 믿지 말라 (요한복음 6장 26-27절)


< 떡 때문에 믿지 말라 >

 오병이어의 기적 후 예수님이 말씀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떡 문제는 현실적인 문제지만 그것을 주된 목적으로 예수님을 찾고 기도하고 교회에 나오면 복된 믿음을 얻을 수 없고 자신의 가치도 낮아진다는 암시다. 성경을 보면 에서가 큰 잘못을 한 것 같지 않지만 팥죽 한 그릇 때문에 장자의 축복을 판 것 자체가 큰 잘못이다. 돈이 있어도 주님이 없으면 못산다고 고백하는 가난한 심령이 되고 세상의 떡 때문에 생명의 떡을 잃지 말라.

 공산주의와 기독교의 대결은 간단히 말하면 빵과 말씀의 대결이다. 공산주의의 창시자인 마르크스가 말했다. “먹는 문제만 해결하면 다른 문제는 다 해결된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먹는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했다. 먹는 문제에 집착하면 먹는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한다. 반면에 기독교는 사십일을 굶어도 빵보다 말씀을 앞세운다. 그래서 사탄이 떡으로 유혹할 때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말씀을 앞세우면 신비하게 먹는 문제도 해결된다.

 나그네는 정처 없이 떠돌다가도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갈 존재다. 천국 나그네는 돌아갈 고향을 천국 생각으로 이 땅의 것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기에 하나님이 그를 기뻐하신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고백은 “하나님! 제가 하나님 덕분에 성공했습니다.”라는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 제 소망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라는 고백이다. 천국 나그네에게 세상은 다리와 같다. 천국 나그네는 다리를 건너가는 사람이지 다리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 아니다.

 많은 다툼은 다리 위에 화려한 집을 짓고 살려고 하면서 생긴다. 천국 나그네가 많아지면 세상 다툼은 줄어든다. 천국 나그네 의식을 가지면 미워하거나 시기할 사람도 없다. 다 같이 천국 고향으로 가는 나그네임을 알고 서로 도와주고 사랑하는 천국 나그네의 삶은 위대한 삶이다. 사람들이 성공하려는 것은 자존심의 결실을 위해서다. 그래서 많이 소유하고 많이 드러나면 성공했다고 하지만 성공한 것이 위대한 것은 아니다. 천국 나그네 의식을 가지고 철저히 예수님을 증언하는 거룩한 자존심이 사람을 진정으로 위대하게 만든다.

< 떡 때문에 일하지 말라 >

 예수님이 말씀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사람들이 하는 많은 일이 썩을 양식을 위한 일이다. 썩을 양식을 탐하면 마음과 몸이 다 괴로워진다. 사람이 실컷 잘 먹으면 좋을 것 같지만 그때 오히려 몸은 더 괴롭고 위암 발생률도 높아진다. 위는 70% 이상 채우면 부담을 느낀다. 위를 100% 채워 식도까지 차면 몸이 더 괴로워진다. 다른 삶에서도 너무 많이 채우면 몸과 마음이 불편해진다. 육신적인 일은 70% 정도만 채워도 만족하고 돈 때문이 아닌 영생하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

 시편 127편 2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사람들은 일만 하면 다 잘되는 줄 알고 열심히 일하지만 실제로는 헛고생이 많다. 아무리 애써도 좋은 결과는 얻지 못하고 불안만 늘어나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면 하나님이 편안한 잠을 주시고 결국 은혜도 넘치게 된다.

 위대한 것이 성공한 것은 될 수 있어도 성공한 것이 위대한 것을 될 수 없다. 성공한 삶과 위대한 삶을 분명히 구분하라. 성공한 것은 명예, 권세, 물질 등을 소유한 외적인 소유와 관계된 것이지만 위대한 것은 인격과 관계된 것이다. 어떤 환경과 처지와 조건에서도 아름다운 인격을 표출하는 것이 위대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무엇을 소유했느냐.”보다 “어떤 사람이 소유했느냐.”에 더 관심이 많으시다. 즉 소유보다 인격이 먼저 준비되기를 원하신다.

 두 종류의 신앙이 있다. 신앙을 통해 소유를 추구하는 ‘기복적 신앙’과 신앙을 통해 존재의 변화를 추구하는 ‘구원적 신앙’이다. 참된 기독교적 신앙은 존재의 변화를 추구하는 구원적 신앙이다. 사람이 만사형통을 소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런 것이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더 깊은 데에 있다. 사람은 외적인 소유에 관심이 많지만 하나님은 그가 변화되는 데 관심이 많으시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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