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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환경을 변화시키는 믿음

  •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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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을 변화시키는 믿음 (누가복음 17장 1-10절)


< 환경을 변화시키는 믿음 >

 사람의 사람다움은 환경을 변화시키는 모습에서 나타난다. 성도에게는 더욱 환경을 변화시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환경을 변화시키는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1. 배려하는 믿음

 작은 자를 실족시키는 죄가 매우 큰 죄다(1-2절). 물론 살다 보면 상처를 주는 상황이 없을 수는 없다. 있는 자가 무심코 한 말이 없는 자에게 큰 상처가 되고 때로는 웃기려는 유머가 큰 상처를 낳기도 한다. 그래서 있는 위치에 있으면 더 언행을 조심하라. 없는 위치에 있으면 언행을 덜 조심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있는 자도 없는 자를 배려하고 없는 자도 있는 자를 배려해야 한다. 배려하는 사람이 큰 사람이다. 다만 배려하는 믿음을 분별없는 믿음이나 부조리한 사랑으로 오해하지 말라. 부당한 배려는 언젠가 터질 분열의 폭탄을 만드는 것과 같다.

 어느 날 한 초신자가 경제적으로 어려워 구역장 집사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구역장은 돈을 빌려주지 않으면 그녀가 교회에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배려하는 마음으로 돈을 빌려주었다. 그것은 부당한 배려다. 돈을 빌려주지 않아 시험에 들어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람됨의 기본 문제에서 큰 흠이다. 그런 사람은 다른 빌미를 내세워 “교회가 사랑이 부족해, 설교가 마음에 안 들어.”라고 하면서 교회를 떠난다.

 그렇게 시험에 들까봐 그를 교회에 붙들려고 돈을 빌려주는 잘못된 배려가 결국은 영혼도 망치고 교회도 망친다. 교회에서는 원칙적으로 돈을 빌리거나 빌려주지 말라. 다단계 판매처럼 교우를 돈벌이 도구로 삼으면 더욱 안 된다. 배려하는 마음으로 돈을 빌려주어도 돈을 빌린 사람이 막다른 골목에 처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채무 관계에서 생기는 살인 사건은 대부분 돈을 빌린 사람이 돈을 빌려준 사람을 죽이는 사건이다.

 교회에서 채무관계에 얽히는 것은 죽음의 사슬을 목에 거는 것과 같다. 교회에서 돈을 빌려주는 일을 배려로 여기지 말라. 돈으로 인한 아픔을 많이 겪고 목격하면서도 영혼을 붙잡겠다는 배려심으로 돈을 빌려주면 잃어버린 영혼을 얻기보다 더 잃게 만든다. 성도는 목숨을 거는 십자가도 지려는 존재다. 교회에서 돈 문제를 만들지 않도록 자기 목숨까지 걸 각오를 해야 한다. 돈이 없으면 밑바닥부터 시작하라. 그런 마음으로 나아가면 어디선가 신비하게 자발적인 도움의 손길도 생기고 하나님의 신비한 도움의 손길도 나타난다.

2. 용서하는 믿음

 본문 3절을 보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이 구절에서 “스스로 조심하라.”는 말씀은 “남을 실족시키지 말라.”는 뜻도 있지만 다음 말씀과 관련해 “남을 미워함으로 실족되지 말라.”는 뜻도 있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라는 말씀은 죄를 무조건 덮어주지 말라는 말씀이다. 죄를 범했는데 경고나 회개도 없이 용서하면 잘못에 대한 인식을 약화시켜 잘못을 더 부추길 수 있다.

 가끔 보면 소외나 징계가 두려워 가짜로 회개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도 잘 분별해서 바르게 용서해야 후유증이 없다. 정당한 용서는 정의도 회복시키고 환경도 회복시킨다. 얼마나 용서해야 하는가? 본문 4절을 보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이 말씀은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면 무한정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때로는 야단도 치고 분노도 표출하고 전략적으로 멀리해도 미워하지는 말라. 그것이 쉽지 않기에 사도들이 예수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했다(5절). 무한한 용서는 하나님이 용서하는 사람을 용서하고 큰 축복을 주신다는 믿음으로 가능하다. 믿음의 능력이 용서의 능력이다. 믿음이 커질수록 용서 수준과 용량도 커진다. 믿음으로 용서하면 환경도 신기하게 변화되지만 그 전에 사람과 상황과 환경을 보는 시선부터 달라진다.

 저는 집에서 가끔 외톨이가 된다. 3명의 모녀가 여성들의 관심사로 자기들끼리만 재밌게 얘기하고 저를 대화에 껴주지 않으면 왕따가 된 느낌이다. 그처럼 왕따 상태에서 3명의 대화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면 더 사랑스럽다. 그러면 외적으로는 왕따가 된 것 같아도 실제로는 왕따가 아니다. 그처럼 공동체에서 결코 왕따가 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 바로 용서하는 사람이다. 사랑과 용서는 질투나 소외감은 물론 어떤 환경도 극복하게 만든다.

3. 진실한 믿음

 작은 믿음이라도 진실한 믿음이 중요하다(6절). 영성을 과시하는 믿음은 대개 거짓 믿음이다. 이단 교주의 분별은 아주 쉽다. 평소의 거짓 언행을 보면 분별된다. 거짓 언행이 심한 사람이 한 찬란한 약속을 어떻게 믿는가? 신분을 숨기게 하고 거짓말을 사주해 가족과 사회를 속이고 거짓 대출을 받으려고 서류를 위조하고 수많은 뻔한 거짓을 행하는 이단이 내세우는 축복과 선택과 기적 약속을 믿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진리와 영생도 없지만 말세에 선택된 십사만 사천 명에 속하는 일은 더욱 없다.

 거짓 교주의 영생과 치유와 기적과 축복 약속을 믿지 말라. 영생의 비밀과 미래를 알고 사람 마음을 안다고 과시해도 거짓 언행이 잦은 사람은 즉시 멀리하라. 예언이나 치유 약속이 한번 틀리면 마음을 멀리하고 두 번 이상 틀리면 몸도 멀리하라. 하나님이 대통령 선거에 나가면 당선된다고 계시하셨다고 하면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서 허경영보다 낮은 표를 받아 하나님의 이름을 크게 훼손하면 그가 아무리 “오직 예수!”를 말해도 즉시 멀리하라.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 나았다고 치유를 선포하고 낫지 않는 거짓말을 수시로 하는 사람도 즉시 멀리하라. 왜 그런 뻔한 거짓말을 강단에서 하는가? 그래도 찾아오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단한 약속과 선포를 해도 거짓말이 상습적인 사람은 즉시 멀리해서 거짓의 힘이 커지지 않게 하라. ‘믿음으로 말하는 것’과 ‘거짓말을 선포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거짓말에 속지 말라. 거짓말로 커지거나 큰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언젠가 비참하게 추락한다. 커지는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거짓으로 커지면 무서운 추락의 때가 온다.

 거짓말에 속는 사람이 많아지면 나중에는 거짓말하는 사람 자신도 스스로 속아서 뻔한 거짓말도 대수롭지 않게 한다. 그러면서 점차 교주나 선동가 자신의 정신이 병든다. 정신이 병든 사람을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 따르는 것처럼 불행은 없다. 거짓은 진실을 이기지 못한다. 그럴듯한 거짓말쟁이가 거짓의 장막을 아무리 크게 쳐도 거대한 사실을 덮지 못하고 언젠가 진실은 드러난다. 진실한 믿음만이 참된 변화를 만들어낸다.

4. 겸손한 믿음

 용서하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겸손한 믿음의 중요성을 알려주려고 예수님은 본문 7-10절에서 간단한 비유를 들려주셨다. 종이 일을 끝내고 밭에서 돌아오면 주인이 종을 수고했다고 대접하지 않고 종이 주인의 먹을 것을 준비하고 주인이 먹고 마신 후에 먹고 마신다. 그때 주인이 자기가 명한 대로 했다고 종에게 “감사합니다.”라고 하지 않는다. 그처럼 종은 주인의 명령을 다 행한 후 “우리는 무익한 종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하는 겸손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비유다.

 보상과 축복을 너무 바라는 것도 기복주의다. 좋은 일을 하면서 무엇을 얻기를 기대하지 말아야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다. 참된 사랑은 감정적인 애정 표현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묵묵히 할 일을 해서 기쁨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기쁘고 즐겁게 순종하고 교회에 충성하면 일이 자기 뜻대로 안 되고 복이 예상대로 주어지지 않아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왜 교회에서 시험에 드는가? 보상에 대한 생각이 무언중에 있거나 참된 예배자의 모습을 잃고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면 시험에 들기 쉽다. 남의 시선을 너무 의식하지 말라. 예수님의 산상수훈 말씀처럼 좋은 일을 할 때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고 기도할 때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고 금식할 때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낯을 씻고 금식하라. 보상과 칭찬에 연연하지 않고 헌신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아들은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충성하지만 종은 보상을 기대하면서 충성한다. 결국 보상과 축복에 연연하면 즐거운 아들의 길이 아닌 비천한 종의 길이 펼쳐진다. 왜 회개가 중요한가? 죄 사함과 더불어 겸손한 믿음 회복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회개를 앞세우면 죄 사함을 통해 병도 나을 확률이 커지고 겸손함을 통해 마음의 병이 나을 확률도 커진다. 참된 회개를 통해 겸손한 믿음을 예비하면 환경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난다.

< 믿음으로 승리를 고백하라 >

 겸손한 믿음을 가지라는 말은 현실과 환경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종속적인 믿음을 가지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나쁜 환경을 운명처럼 받아들이지 말고 기도할 때도 문제 앞에서 위축된 상태로 기도하지 말라. 문제 앞에서 위축되면 수많은 부정적인 생각이 생긴다. “너는 안 돼! 희망이 없어! 너는 성공할 수 없어! 네 자녀도 희망이 없어! 너는 빚과 중독에서 벗어날 수 없어.”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부정하고 문제 앞에서 당당하면 문제가 힘을 잃는다.

 당당히 믿음으로 내면을 향해 스스로 문제 해결의 역사를 선포하라. 남이 기도해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내면에서 울리는 믿음의 소리다. 내면에서부터 문제를 믿음으로 압도할 때 성령님이 역사해서 문제의 산이 맥을 못 추고 무너질 것이다. 남이 들으라고 굳이 큰 소리를 낼 필요가 없다. 아무리 큰 소리를 내도 믿음이 뒷받침이 안 되면 허풍이 된다. 믿음으로 자기 내면에 외치라. “이 문제는 나를 이기지 못한다. 당장 물러가라.” 그 담대한 믿음의 소리를 하나님이 기쁘게 들으시고 문제 해결의 역사를 속히 이뤄주실 것이다.

 한 자영업자가 있었다. 거의 파산 직전에 그는 끊임없이 상담과 기도를 목회자에게 요청했다. 그러자 목회자가 말했다. “집사님! 이제 문제에 대해 제게 말하지 마시고 문제를 향해 믿음의 말을 하십시오.” 그때부터 그가 상담을 그치고 계속 고백했다. “나는 축복 받은 존재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실 것이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찬란한 계획이 있다. 조만간 새로운 손님이 확보될 것이다. 힘들어도 불평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감사하겠다.”

 얼마 후 그가 목회자를 환한 얼굴로 찾아와 지난 얘기를 했다. 그는 목회자의 말을 듣고 깊은 깨달음을 얻어 그때부터 매일 승리의 고백을 하며 흑암 상태에 빛이 있으라는 믿음의 말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회사가 사업 설명회를 하라고 했다. 평소에 믿음과 감사 훈련으로 내면에 승리의 역사가 넘쳤던 그가 밝은 표정으로 설명회를 잘했다. 그때 초대형 납품 계약을 맺어 반전의 역사가 나타났다는 얘기였다. 그런 역사가 지금 내게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늘 환경을 변화시키는 믿음을 가지고 역경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복된 심령이 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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