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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를 입은 자의 삶

  •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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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입은 자의 삶 (창세기 18장 1-8절)


<점과 미신을 믿지 말라 >

 며칠 전 유명한 연예인 커플의 파경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자 그 파경을 미리 알아맞혔다고 자랑하는 점쟁이가 여기저기 등장했다. 어떤 점쟁이는 그 결혼이 오래 가지 못할 운세라면서 남자에 대해 “두 번 결혼할 운세다. 바람기 많은 여자나 과거 있는 여자를 아내로 맞는다.”라고 했다. 이런 말도 했다. “이혼수가 있다. 그래도 자기 노력에 따라 이혼수를 극복할 수도 있다.” 이혼할 가능성과 아닐 가능성이 다 걸리도록 마구 던지는 아무 말 대잔치다. 야구 해설자가 “다음 공은 직구 아니면 변화구에요.”라고 하는 것과 같다.

 점쟁이는 “운수가 그렇지만 노력에 따라 달라진다.”고 탈출구를 꼭 둔다. 그렇게 막 던진 말 중 하나라도 맞으면 그것을 맞혔다고 선전한다. 특히 유명 연예인이 결혼하면 수많은 점쟁이가 “이별수가 있어.”라고 말해놓고 기다리면 그 자체로 복권을 사 놓은 셈이 된다. 그래서 틀리면 조용히 지나가고 맞으면 크게 선전한다. 정확성 여부를 떠나 남의 운명에 대한 점괘를 마구 던지는 것은 비윤리적이고 명예 훼손 죄에 가깝다.

 남의 아픈 사생활에 관한 수많은 억측은 당사자가 들으면 가슴 찢어질 말들이다. 남 말을 쉽게 하면서 신령한 척 하는 것은 나쁜 죄다. 다른 악플도 주의해야 하지만 가정사나 이혼이나 이별에 관한 악플은 더 주의해야 한다. 당사자는 그 일로 이미 많은 상처를 입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다(요 8:7). 얼굴을 숨기고 막말하는 잔인성과 무지를 버리고 자기부터 돌아보라는 말씀이다.

 남의 아픔을 흥밋거리로 삼는 것도 나쁘지만 점괘까지 내세워 혹세무민하는 것은 더욱 나쁜 태도다. 요새는 인터넷에 기록이 다 남으니까 옛날처럼 점괘를 막 던지지 않고 애매모호하게 던진다. “사슴을 쫓는데 몰이꾼이 없다. 말을 탔다가 내린다.”라는 식으로 내놓고 그것은 하노이 북미 회담의 결렬을 맞힌 예언이라고 나중에 결과에 맞춰 해석하면서 용하다고 한다.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다.

 하나마나한 점괘도 많다. “건강이 안 좋겠어. 운동하고 술은 조금만 마시는 게 좋아. 산만하니까 집중력을 길러.” 또한 어떤 점쟁이는 “과거 있는 상대를 만날 운이야.”라고 하는데 이 세상에 과거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막 던져서 몇 개 맞는 점에 미혹되지 말라. 아무 점괘나 내놓고 “아니면 말고...” 하는 미혹에 요즘 사람은 잘 속지 않는다. 일반인도 점쟁이의 말장난의 실체를 대략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연말이 되면 매년 점쟁이가 신년 점괘를 내놓는다. “내년은 연애할 운이야. 기인과의 만남이 있어. 이성 때문에 마음고생을 해. 이별수를 피해 가급적 늦게 결혼해.” 다 하나마나한 얘기다. 인생은 수많은 만남과 이별로 이뤄졌다. 늘 생길 수 있는 현실을 바탕으로 막 던진 점괘를 용하다고 믿는 것은 자기 영혼을 파는 것이다. 요즘 매년 연말에 가장 많이 나오는 점괘는 “내년에 김정은 신변에 변고가 생긴다.”는 점괘다. 틀리면 다음해에 또 비슷한 점괘를 내놓는다. 그렇게 막 던진 점괘를 한두 개 맞혔다고 신기해서 소름끼친다고 하지 말라.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 어쩌다 소도 뒷발로 쥐를 잡는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사람 심리를 이용해 누군가 걸리도록 점쟁이가 막 점괘를 던질 때 거기에 미혹되지 말라. 심약한 사람 한 명만 꿰차도 점쟁이는 많은 것을 털어갈 꿀단지를 얻게 되기에 점괘를 막 던지는 것이다. 이단 교주가 치유되는 사람 한 명이라도 걸리라는 식으로 “치유되었습니다.”라는 말을 막 던지고 마구 안수하는 것과 똑같다.

 유명한 연예인들이 결혼하면 일반인도 한번쯤은 생각한다. “화려한 연예계 생활에 젖은 그들이 서로를 섬기며 잘 지낼까?” 또한 연예인의 이혼율이 일반적으로 높은 것은 상식이다. 그런 상황에서 파경을 맞췄다고 용한 역술인이라고 믿고 찾아가서 점을 치고 소원까지 빈다면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그만큼 인간이 연약하다. 그것도 죄의 흔적이다. “앞으로 내 삶에 점과 미신은 흔적조차 없게 하겠다.”고 다짐하라. 성도는 더욱 그래야 한다.

 한 장손이 40년 전 예수님을 믿고 모든 제사를 다 없앴고 제기도 다 버렸다. 그때 집안 어른들과 동네 무속인이 무섭게 저주했다. “조상을 무시하는 너와 네 자손들이 얼마나 잘사나 보자.” 40년이 지난 지금 90이 넘은 그때 어르신들은 다 “너 그때 참 잘했다.”고 칭찬한다. 미신의 실체를 깨달은 것이다. 또한 그의 자녀들은 세계를 누비고 사업하면서 다 정직하게 잘살고 있지만 그때 저주했던 무속인은 패가망신해서 죽었다.

 오래 전에 용하다는 점쟁이가 한 청년에게 ‘3년 안에 객사할 운세’라고 했다. 그 후 50여년이 지나 70세가 된 그 청년이 최근에 그 가짜 점쟁이를 붙잡아 혼내주려고 수소문하자 오래 전에 객사했다. 대신 그의 수제자란 젊은 점쟁이를 붙잡고 무섭게 혼내자 그 젊은 점쟁이가 죄송하다고 싹싹 빌었다. 잘못된 점괘로 사람을 속이고 물질을 탈취했으면 법적인 책임을 물어야 하는데 대부분 그냥 넘어가니까 좀도둑처럼 점도둑이 계속 활보하는 것이다.

 예전에 부적을 고액으로 팔아먹는 점쟁이가 많았다. 어떤 부모는 자녀가 공부를 못하자 800백만 원 내고 무속인에게 산 부적을 아이 방에 붙였다. 효과가 전혀 없었다. 그런 미혹자가 도처에 많다. 가장 안타까운 사실은 그런 점쟁이 수법을 따라 헛된 예언으로 영혼을 훔치는 이단과 사이비 교주에 넘어가는 교인이 많다는 사실이다.

 길에서 포교하는 사이비 종교인의 미혹 패턴은 크게 2가지다. 하나는 띄워주면서 미혹한다. “얼굴을 보니까 무슨 기가 흐르는 것 같아요.”라고 하면 자기가 신비하게 된 줄 알고 미혹된다. 또 하나는 은근히 떠보면서 미혹한다. “가정에 어떤 우환이 있어요?” 그 질문에 “신기히다. 어떻게 내 사정을 알지?”라고 하면서 미혹된다. 이 세상에 크고 작은 문제가 없는 가정이 어디에 있는가? 애매한 말장난 예언에 미혹되지 말라. 점치는 사람 치고 잘 되는 사람이 거의 없듯이 예언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 치고 잘 되는 사람도 거의 없다.

 하나님은 점을 무엇보다 싫어하신다. 점은 아예 안 믿겠다고 작정하고 점쟁이는 찾지도 말고 예언으로 포장된 예수 점도 믿지 말라. 미래는 하나님의 영역에 두셨다. 하나님이 모르게 하신 것을 너무 알려고 하지 말라. 호기심이 지나쳐서 미래를 알아내려는 것은 미래를 훔치려는 불의한 태도다. 은혜를 입는 자는 미래의 운명을 정확하게 아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미래를 대비하고 미래의 운명을 개척하는 자다.

< 은혜를 입은 자의 삶 >

 본문 3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이라고 말하면서 행동하는 장면이 나온다. 은혜를 입은 자에게는 어떤 삶이 생기는가?

1. 겸손한 삶

 어느 날 하나님이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숲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그곳은 아브라함이 롯과 헤어진 후 정착지로 삼은 헤브론 인근의 장소였다. 거기서 날이 뜨거울 때 아브라함이 장막 문에 앉아있었다(1절). 그때 눈을 들어 보자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었다. 아브라함은 그들이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 급히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혔다(2절). 그 태도는 아브라함의 겸손함을 잘 보여준다. 그의 겸손함은 은혜를 입게 한 핵심 요소였다.

 역사상 아브라함보다 힘이 있었던 사람이나 대 제국의 황제도 많았다. 그들이 아브라함처럼 4천년 영향력을 가지지 못한 것은 힘이 있을 때 겸손해지는 삶과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요새 어떤 언론인은 여론을 주도하기에 때로는 대통령보다 더 힘이 있는 것 같다. 그때 잃지 말아야 할 것이 겸손이다. 그가 힘을 과시해서 여론을 억지로 만들어내려는 순간 곧 역풍이 불어 자신도 스스로 만든 덫에 빠진다.

 사회나 공동체에서 피해자의 입장을 대변해주려는 마음은 좋은 마음이지만 늘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좋은 마음인 ‘선(善’)보다 바른 마음인 ‘진(眞)’이 우선이란 사실이다. 때로는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진짜 피해자가 아니라 동조자나 공모자나 심지어는 가해자인 때도 있다. 그 경우에 상대의 정당한 반론조차 무조건 ‘2차 가해’란 딱지를 붙여 매도하면 그것은 바른 마음도 아니고 좋은 마음도 아니다. 그런 마음의 변질을 막으려면 수시로 “겸손하자.”고 다짐하라. 그래야 선한 영향력도 잃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도 계속된다.

2. 대접하는 삶

 아브라함은 세 사람에게 자기가 물을 조금 가져와 발을 씻게 하라고 했다. 당시 문화에서 물을 가져와 여행자의 발을 씻어주는 것은 손님에 대한 최고 예우였다. 게다가 뜨거운 햇빛을 피해 나무 아래에서 쉬고 떡을 조금 가져올 테니까 그것으로 마음을 상쾌하게 한 후 떠나시라고 했다. 몸에 배인 대접성이다. 대접받으려고 하면 대접도 못 받고 은혜도 못 받지만 대접하려고 하면 대접도 받고 은혜도 받는다.

 어느 날 한 사람이 큰 고난 중에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다짐했다. “하나님! 이 시련의 때를 지나면 주일성수도 열심히 하고 목사님의 비전을 위해 힘써 후원하겠습니다.” 마침내 시련의 때가 지났다. 그리고 일이 예상보다 기적적으로 잘 풀려서 담임목사에게 말했다. “목사님! 좋은 사람들이 저를 이끌어주어서 길이 잘 열리고 있습니다. 열심히 해서 고난 중에 다짐한 대로 좋은 일도 많이 하고 목사님의 비전도 힘써 후원하겠습니다.”

 목회자가 기뻐하면서도 당부했다. “성도님! 저의 비전을 후원하려는 마음은 기쁘고 고맙지만 후원을 늦게 해도 좋고 못해도 좋으니까 성공이 늦거나 혹은 성공하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최대한 바른 길로 가면서 성공을 추구하세요.” 그 뒤로도 목회자가 여러 번 같은 말을 잔소리처럼 하면 그가 대답했다. “꼭 명심하겠습니다.” 누군가를 잘 대접하려는 마음은 좋지만 늘 바른 방법으로 대접하려고 하라. 바르게 대접하려고 할 때 그 대접이 복의 원천이 된다.

3. 섬기는 삶

 아브라함의 대접하는 말에 그들이 “네 말대로 그렇게 하라.”고 하자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떡을 만들게 했고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어 급히 요리하게 했다(6-7절). 그리고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자 그들이 먹었다(8절). 종이 시중들듯이 극진하게 그들을 섬겼다. 그처럼 섬김의 삶을 실천할 때 영혼도 견고해지고 하나님의 은혜도 넘치게 된다.

 왜 요새 교회가 젊은이들을 잃는가? 세상 재미가 너무 크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혼이 강건하고 교회생활의 참된 의미를 알면 세상 재미에 넋을 잃지 않는다. 문제는 영혼이 약해진 것이다. 왜 약해졌는가? 교회에서 열정적이고 화려한 찬양 예배는 드리면서 음지에서 청소하는 섬김은 없기 때문이다. 화려한 찬양 예배 후 교회를 떠날 때는 왠지 허전하지만 청소한 후 교회를 떠날 때는 왠지 뿌듯하다. 섬김이 없는 믿음은 허전하다. 교회 청소와 같은 음지에서의 섬김을 통해 영혼이 강건해질 때 행복과 축복도 따라온다.

 하나님은 섬겨주기를 기뻐할 때 섬김 받는 위치로 올려주신다. 물론 섬겨주는 삶이 식사나 물질로 섬겨주는 삶만 의미하지 않는다. 명예를 높여주고 인격을 존중해주고 남을 생각해주는 것도 섬김이다. 그런 섬김의 삶을 꾸준히 실천하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적절한 때에 약속된 축복을 얻게 하신다. 겸손한 삶, 대접하는 삶, 섬기는 삶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붙들어서 아브라함처럼 복의 근원과 믿음의 조상이 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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