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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님을 기대하는 신앙으로! (행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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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을 기대하는 신앙으로! (행 2:1-13)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인간의 능력보다 위대합니다.  아무리 죄가 많다고 하더라도 죄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큽니다.  죄의 권세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권세가 훨씬 더 강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높고 넓습니다.  그래서 은혜만 받으면 살 길이 있습니다.  위로부터 은혜만 오면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나의 문제가 무엇이든 다 접어두고 위로부터 물 붓듯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우리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드십시오.  오늘 이 시간 여호와의 신으로 다시 권능의 채움을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신의 권능의 채움을 받으면 사랑이 나타납니다.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힘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신의 권능의 채움을 받으면 남을 지도하고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라 남을 섬기며 봉사할 수 있는 힘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그의 삶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을 보십시오.  그들을 보면 세상적으로는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형편인데도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전에는 이 같은 사실을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말을 하지 않아도 온 몸으로 고백할 수가 있습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들이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려도 이 한 가지는 꼭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삶을 살지 말고, 은혜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맞느냐, 저것이 맞느냐는 단세포적인 흑백논리에 빠져서 분열시키는 삶을 살지 말고 온유함을 가지고 은혜를 따라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은혜가 풍성한 삶을 사십시오.

가만히 보면 사람들은 은혜가 막히면 억지를 부립니다.  은혜가 떠나면 억지가 많습니다.  자기가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를 부립니다.  자기 안에 사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가니까 사랑이 없다고 억지를 부립니다.  자기의 그릇됨과 실수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를 부립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삭막하게 만들고 분열시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자기 억지로부터 자유 하십시오.  남이 주는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자유 하려고 하지 말고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고 자유 하십시오.  내 안에 임하신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모든 삶과 모든 사건으로부터 자유 하십시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말고,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다스려 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영혼에 변화가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가치관에 변화가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성령강림절입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우리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있을 주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 사건이 바로 오늘 본문에 기록된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난 성령 강림의 사건입니다.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은 아무 기대도 없고 용기도 상실한 실패자의 집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집단이었습니다.  내가 나를 보아도 답답하고 꽉 막힌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집단이었습니다.  형제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동네에서 손가락질을 받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속에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갑자기 하늘로부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강력한 능력의 기운이 그들이 앉은 온 집안을 가득 채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기운이 그들 각 사람 위에 임하면서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됩니다.  이 한 번의 성령의 사건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사람들을 엄청난 역사를 일으키는 역사의 주역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한 순간의 성령의 기름 부으심의 사건이 저들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강한 주님의 제자로 만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초대교회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났던 성령의 사건을 과거에 일어났던 한 사건으로만 끝내지 마십시오.  그 성령의 기름 부으심의 사건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오늘 우리들에게서도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저들의 답답함을 한 번에 바꾼 성령의 사건이 하나님을 믿는 이 자리에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똑같이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역사의 주역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의 모든 삶의 비극이나 고통은 하나님과의 석연치 않은 관계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은 기도하는 사람들은 다 압니다.  인간의 모든 삶의 고난은 하나님과의 어설픈 관계에서 시작됩니다.  인간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고통의 삶을 살게 된 출발점은 바로 하나님과의 어설픈 관계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시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이 어설픈 관계, 석연치 않은 관계가 삶의 고통과 비극을 가져왔습니다.

오늘 주 앞에서 예배를 드리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에 대한 지식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눈을 뜨시기를 바랍니다.  강력한 내 아버지와의 관계, 내 생명의 관계에 눈을 뜨십시오.  성령의 교통하심을 따라 인간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강력한 감동을 힘입고, 거짓으로 감추기 위해서 스스로 파놓은 자기 위선의 그 무덤들을 파헤치십시오.  가면도, 가식도, 허위도, 조작도 다 끊어 버리십시오.  인간은 살다 보면 어느 날인가 삶의 보다 깊은 밑바닥을 꿰뚫어 보는 그런 지혜와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시간이 그 시간입니다.  이 날이 그 날입니다.  이 장소가 그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거짓된 자신의 가면을 내려놓고 진실된 마음으로 주 앞에 서 보십시오.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어설픈 관계, 분명하지 않은 관계를 청산하십시오.  "너를 낳은 부모는 너를 버려도 나 하나님은 너를 결코 버리지 아니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그분의 만져주심을 기대하십시오.  그분과의 어설픈 관계를 청산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막간 시대입니다.  감히 정상적인 사람의 입으로는 담기 험악한 사건과 일들이 시시 때때로 우리들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과 현상들을 보면 분명한 것은 주님의 오심이 더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말세의 징조가 점점 더 분명해 지고 있습니다.

정말 이 시대가 마지막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말세라고 한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의 모든 교회와 믿음의 사람들은 성령의 충만을 외쳐야 합니다.  황무한 이 땅이 회복되고, 이 땅의 기초를 다시 쌓는 길은 성령의 충만함 밖에는 없습니다.  이것만이 이 땅에 죽어 가는 수많은 영혼을 살기는 길입니다.  이것만이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더욱 강력하게 증거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 방황하는 저 생명들을 향해 외쳐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그리고 우리들 스스로가 먼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 충만은 무슨 논쟁의 주제가 아닙니다.  성령의 충만은 부활하신 우리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있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주신 축복의 선물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후 거리에 나가서 복음을 외칠 때 사람들에게 성령의 선물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성령은 강의실에서 듣는 학문도 아니고 논쟁의 주제도 아닙니다.  성령은 삶의 실제요 능력입니다.  능력 있는 성도의 삶은 책상에 앉아서 배워진 훈련된 지식이 아닙니다.  바른 신앙은 훈련된 사상도 아닙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우리가 그렇게 자기 훈련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까?  정말 기가 막힌 자기 명상 훈련을 한다고 할지라도 원수 앞에서 자기 감정이 조절이 됩니까?  천만의 말입니다.  내 아내도 사랑하기가 힘듭니다.  내 자식들도 사랑하기가 힘듭니다.  하물며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를 보고 마음이 평안할 수가 있다!  그것은 전설의 고향에서나 볼 수 있는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능력에 생포되면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에 사로잡히면 그 마음은 늘 평안할 수가 있습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참된 평화는 하늘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그 하늘의 평화가 여러분의 영혼을 온전히 덮어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저들이 모인 곳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것이 임했습니다.  그렇게 하늘 문이 열리면서 바람이 이리 치고 저리 치는데 불의 혀 같은 모습이 각 사람의 머리 머리마다에 임합니다.  그러니까 낙심과 좌절과 실패와 불안에 싸여있던 그들이 생기를 얻었습니다.  힘을 얻었습니다.  저들이 뛰어서 골목골목을 다닐 때 저들의 그림자만 닿아도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오늘 우리가 진정으로 사모해야 할 일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은 우리가 정말로 꿈꾸어야 할 일입니다.  성령 충만한 제자들의 모습은 우리가 정말로 탐내야 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취하시기를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저들이 성령의 역사를 보기 전에는 삶에 아무런 의욕도 없었습니다.  불안과 낙심과 절망뿐이었습니다.  그들은 갈 길을 몰라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이 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변했습니다.  변해도 완전히 변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심령에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출만했습니다.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첫 번째 축복입니다.

아무쪼록 사랑하는 여러분, 신령한 세계에 대해서 눈이 열려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성령에 대한 눈이 열려지기를 축복합니다.  훈련된 지성, 숙련된 의지, 이것이 신앙생활의 마지막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때마다 시간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에 사로잡히는 일입니다.

성령을 헬라어로는 '파라클레토스'라고 합니다.  이 말은 조금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교통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무리 넘쳐도 성령이 교통하지 않으면 감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무리 넘쳐도 성령이 교통하지 않으면 기쁨과 감격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들어도 성령이 교통하지 않으면 그 말씀이 내 말씀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충만하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시간 시간이 은혜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강단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꿀송이 같아서 내 영혼을 풍성하게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건강하고 바른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성령의 교통하심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시간마다 때마다 성령의 교통하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감사와 감격이 넘치지 않으면 이것은 종교론입니다.  그러나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시간마다 감사한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이 감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이야기합니다.  성령은 논쟁의 주제가 아니라 축복의 주제입니다.  성령 충만은 학문적 토론의 주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의 선물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 우리들 주위에 보면 성령 충만을 구시대적인 유물 정도로 취급하는 교인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에 대해서 아주 너절한 것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령의 사역에 대한 무시가 결국에는 그리스도인들을 맥없는 종교꾼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성령의 사역이 무시됨으로써 교회는 지배와 다스림만이 있는 관료적이고 경직된 구조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사람들에게는 알게 모르게, 그들이 인정하든 하지 않든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어떤 기대감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분명히 그런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지 않는 자기들과는 뭔가 달라야 한다는 그런 거룩한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비록 자신은 온전하게 살지 못해도 자신과는 다르게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봄으로써 세상에 대한 소망을 보고자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타락한 자신들이 살지 못하는 삶에 대한 꿈을 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들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기대감이 마침내 배신감과 미움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를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내부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성령의 역사를 제한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성령의 역사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의 이성을 강조합니다.  모든 것을 이성으로 이해하고 이성으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경험되고 이해되지 않는 것은 다 거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는 인간의 이성으로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유한이 무한을 담을 수는 없습니다.  유한한 인간의 이성이 무한하신 성령의 역사를 이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성령의 역사를 거부했습니다.  제한했습니다.  무시했습니다.  결국에는 교회가 맥없는 종교꾼들을 양산하는데 앞장 서 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행전 19장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의 어떤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아십니까?  사도 바울이 그들을 만나서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물었더니 그들은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얼마 어리석고 불쌍한 제자들입니까?  그런데 그들이 바울로부터 안수를 받는 순간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십니다.  성령이 임하는 순간 그들도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이 경험했던 동일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부디 성령의 눈이 열려지기를 바랍니다.  성령에 대한 감화와 감동의 세계를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끝없는 꿈을 줍니다.  성령님은 믿음의 자녀들에게 끝없는 이상을 줍니다.  끝없는 예언을 하게 하십니다.  제자들이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예수님의 뜻을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이 깨달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는 모든 상황에 굴복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에 사로잡히고 나니까 모든 상황을 정복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는 수시로 넘어지고 자빠졌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보니까 그들은 세상도 감당할 수 없는 강한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 성령님의 역사가 오늘 여러분 속에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성령님의 역사에 완전히 사로잡히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해야 성령의 임재를 경험할 수가 있습니까?  무엇보다 성령님을 기대하는 신앙으로 거듭나셔야 합니다.  매 순간마다 성령님을 기대하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성령님을 기대하는 신앙이 되기 위해서 따라야 할 삶의 지침이 무엇입니까?

먼저는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본문 1절에 보면, 그들이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기 전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1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령을 기대하고,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일단은 모이셔야 합니다.  열심히 모이셔야 합니다.  주일 신앙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모든 공적인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셔야 합니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연약하지만 모든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훌쩍 자란 자신의 신앙 상태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일 오전예배에만 참석하는 신앙은 결코 신앙의 성장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일 오전예배에만 참석하는 신앙은 언제나 2% 부족한 것 같은 허전함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이런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교회가 사랑이 없다, 교회에 가도 별로 재미가 없다, 끼리끼리 모인다.  그러나 여러분, 모든 예배에 열심히 참석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런 말들이 입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모이는 가운데서 성령의 임재를 뜨겁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25절에 보면,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시대가 되면 사람들은 지극히 이기적이 됩니다.  그래서 모이기를 싫어합니다.  싫어할 뿐만 아니라 모이는 것 자체를 없애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가 바로 그런 시대가 아닙니까?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사탄의 계략입니다.  사탄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것을 가장 싫어합니다.  그래서 교회 역사를 보면 사탄은 어떻게 하든지 그리스도인들이 모이지 못하도록 교회를 폐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모이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더 모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의지만으로는 열심히 모이는 것이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더 잘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에 의지해서 모이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 46절에 보면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그들이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이 성전에서만 모이기를 힘쓰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도 모여서 함께 떡을 떼며 기쁨을 나누었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모이기를 귀찮아하지 마십시오.  피곤하고 힘들어도 더 모이기를 힘쓰십시오.  그러나 그것은 내 힘과 의지만으로는 안됩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의 임재와 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일단은 모임에 열심을 내셔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모이기를 싫어하고 힘들어하는 분들에게 종교개혁자 칼빈이 프랑스 신앙고백에서 한 말을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아무도 혼자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움츠리거나 폐쇄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두 번째는, 기도하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120명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무엇을 했을까요?  답답하고 좁은 그 장소에 모여서 그들이 도대체 무엇을 했을까요?  세상이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을까요?  아니면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인생 상담을 했을까요?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열심히 모이십시오.  생명을 걸고 모이십시오.  그런데 우리가 모여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기도하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도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더 많은 기도의 시간을 가지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지도력은 당시 바리새인들과 달랐습니다.  사두개인이나 서기관들과도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지도력은 권세와 위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더 많이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지도력이 기도였습니다.  한 시대에 쓰임을 받았던 모든 지도자들의 지도력도 기도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의 실패는 곧 바로 신앙의 실패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기도의 밀실이 필요합니다.  조용히 하나님과 만나는 밀실을 잃어버리고 나면 자기 신비를 잃게 되고 영적 성숙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 고독한 노동인 기도의 훈련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 훈련이 안된 사람은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가 안된 사람은 결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성령과 일체감을 갖게 됩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시니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확신에 차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의 훈련은 모든 훈련 중에서 제일 우선되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시간을 아까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일이 바빠질수록 기도의 시간을 더 많이 가지셔야 합니다.  더 많은 일을 꿈꾸는 사람일수록 기도의 공간을 더 많이 가지셔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피곤해도 기도하는 훈련을 중단해서는 안됩니다.  잊지 마십시오.  삶의 극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마지막 행동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은 성령이 역사 했던 바로 교회의 일번지입니다.  이곳에서 성령이 역사하고 나니까 자기만 알던 저들이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남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나니까 저들이 일어나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안에 성령이 역사 하면 밥을 먹어도, 꿈을 꾸어도, 잠을 자도, 일어나도 주님을 섬기고 싶어집니다.  성령이 역사 하면 나의 꿈이 아닌 하나님의 기대감으로 충만해져서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 푯대를 향해 달려가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성령이 역사 하셔야 하나님의 증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성령이 역사 하셔야 전도를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간이 한 생애를 살면서 탐내야 할 복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제일 탐내야 할 복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사모하십시오.  거룩하신 성령의 만지심을 느껴보십시오.  성령님이 오시면 사람은 변화됩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교회는 새로워집니다.  성령님이 역사 하시면 나라와 민족이 달라집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성령님을 뜨겁게 기대하는 신앙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1907년 평양의 대부흥이 있었던 그 시대만큼 우리 민족사에서 고통스러웠던 때는 없었습니다.  국권은 일본의 손에 통째로 넘어가고 황제는 폐위를 당했습니다.  나라를 살려보려던 애국지사들의 처절한 몸부림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모든 국민들은 허탈과 절망에 빠져있었습니다.  세계가 한국을 버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이 이 땅을 찾아오셨습니다.  성령님이 임재하셨습니다.

1907년 1월 14일 저녁, 암울한 민족의 아픔과 영적 위기 의식을 가지고 평양 장대현 교회에 모인 선교사들과 천명이 넘는 수많은 성도들은 교회 안으로 들어올 때에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 찬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분명하고도 확실한 것은 100년 전 평양 장대현교회에 임하셔서 역사하셨던 그 성령 하나님은 지금 이곳에도 동일하게 임하시고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령 하나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의 임재와 역사를 기대하셔야 합니다.  사모하고 기대하지 않으면 어떠한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평양 장대현 교회에 모였던 성도들은 모두가 성령의 임재와 역사를 간절히 사모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심정은 마치 야곱이 얍복강 나루에서 나를 축복하시지 않고는 그냥 보낼 수 없다며 날이 새도록 하나님의 사자와 겨루었던 야곱의 심정과 같았습니다.

그날의 상황을 증거하고 있는 선교사들의 글에 보면,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을 간구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주님의 전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십시오.  성령의 강력한 기름 부으심을 갈망하십시오.  성령님을 기대하십시오.  입으로만 그렇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생활 속에서 그렇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모이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모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기도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성령의 역사를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1907년 14일, 그날 평양 장대현 교회의 저녁 집회 도중 건너편 한쪽에서 어떤 사람이 흐느끼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모든 회중은 약속이나 한 듯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그날 밤 그곳에 참석한 사람들은 주변을 의식할 겨를도 없이 강한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 앞에 하나같이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날 성령의 역사는 강력한 회개와 함께 임했다고 했습니다.

당시 그 현장에 있었던 이길함 선교사는 그 사건이 일어난 지 약 2달 후에 다음과 같은 보고를 했습니다.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일어나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고꾸라져 울었다.  그러고 나서 바닥에 엎드려 죄인이라는 완전한 고통 속에서 주먹으로 바닥을 쳤다.  나의 요리사는 회개를 하려고 애쓰며 그 가운데 거꾸러져 방 건너 쪽에 있는 나에게 소리쳤다.  '목사님, 나에게도 희망이 있는지요.  나도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고 나서 바닥에 엎드려 울고 또 울며 거의 고통 중에 부르짖었다.  때때로 회개의 고백 후에 모든 회중이 통성기도를 했다.  수백 명의 회중이 통성 기도를 한 효과는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다시 회개의 고백 후에 그들은 참을 수 없는 울음을 터트렸고 우리 모두 함께 울었다.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모임은 기도와 고백과 눈물로 새벽 2시까지 계속되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는 결코 중단된 적이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쉬어도 성령의 역사는 한 순간도 쉬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뜨겁고 놀랍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목사인 저는 이곳에 모인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교회도 그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열심히 모이십시오.  억지로가 아니라 주도적으로 모임에 참여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성령님을 기대하는 신앙으로 열심히 모이고 뜨겁게 기도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지금은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공통의 비전을 찾아 함께 모여 교회의 부흥을 소망하자고 뜨겁게 부르짖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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