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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충만한 삶을 산 사람 (창 50: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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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충만한 삶을 산 사람 (창 50:15-26) 

  
성령과 신자와의 관계는, 신앙생활의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다. 시작과 과정이요, 중간과 끝이다. 성령 안에서 신앙이 시작된다. 이를 중생이라고 한다. 성령 안에서 신앙이 성장한다. 이를 성화라고 한다. 성령 안에서 신앙이 완성된다. 이를 영화라고 한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출생하고, 자라고, 열매맺는다. 그러므로 성령충만하지 않고는, 성경이 요구하는 하나님의 숭고한 뜻을 지켜 나갈 수 없다. 요셉은 성령충만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창39:2-3)을 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그의 인생은 형통할 수 있었다. 
요셉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잘 섬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성령충만을 체험한 사람이 아니라, 성령충만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요셉의 믿음은, 관념적인 믿음이거나, 추상적인 믿음이 아니었다. 살아 역사 하는 믿음이었다. 행동하는 믿음이었다. 

요셉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신앙생활의 표준을 보여준다. 그는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 지금도 우리에게 말한다. 믿음으로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믿음으로 사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고 말한다. 믿음으로 시작한 사람들은 많지만, 계속해서 믿음으로,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느 때에 성령충만했었다가 중요하지 않다. 계속 성령충만한 생애를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성령은, 일시적으로 방문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항상 동거하는 분이다. 그러면 성령충만한 삶을 살았던, 요셉의 특징은 무엇인가? 

1. 용서의 삶을 살았다. 

(창50장)은, 요셉이 사랑하는 아버지 야곱을, 장례 하는 모습이 나온다. 요셉은 정성을 다해, 장례를 치른다. 그리고 아버지의 유언대로, 가나안 땅에 아버지를 안장한다. 

아버지의 장례가 끝나고, 고센 땅으로 돌아왔을 때, 요셉의 형제들 사이에 큰 문제가 생겼다. (15)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자신들이 행한 죄를 깨달았다. 

형들에게 남아있는 두려움은, 요셉이 자신들을 용서했음을 믿지 못했다. 그래서 형들은 살아남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16-17)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요셉의 형제들 속에는, 요셉이 당한 일에 대하여, 복수할 것이라는, 불안함이 있었다. 

형제들의 생각 속에는, 자신이 요셉이라도 절대로, 용서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18)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형들은 요셉에게 엎드려, 우리는 당신의 종이라고 말한다. 왜 이런 말을 했는가?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열 명의 형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요셉을, 구덩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애굽의 장사꾼들에게 노예로 팔아버리고, 아버지에게는 악한 짐승에게 잡혀 먹혔다고 했다. 요셉은 애굽에 팔려와,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다(창37장). 

요셉은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열심히 일을 해, 가정총무가 되었다.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의 총무로 근무할 때, 친위대장 보디발의 아내에게 유혹을 받았다. 그러나 거절하여, 누명을 쓰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힌다.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범죄 하여, 친위대장 집 옥에 갇힌다. 

여기서 그들을 섬겼고, 술 맡은 자의 꿈을 요셉이 해석하여, 복직하게 된다. 그러나 요셉을 공을 잊어버린다. 그 후 바로가 꿈을 꾸었는데, 점술가와 현인들이 바로의 꿈을 해석하지 못한다. 술 맡은 관원 장이 요셉을 추천하여, 그 꿈을 해석하므로, 이 일을 좋게 여긴 바로가, 그를 총리로 삼는다. 

형들이 살던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었고, 식량을 사기 위해 애굽에 왔다. 복수할 수 있는 기회다. 그래서 형들은, 요셉이 최강대국 애굽의 총리가 된 사실 앞에, 반가움보다 두려움에 떨었다. 요셉이 옛날 일을 기억하고, 자신들에게 보복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다. 

그러나 요셉은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마음에 원망과 미움을 담아두지 않았다. 단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그리고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총무로 있을 때에나, 모함을 당하여, 왕의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요셉은 모든 일에 적극적이면 충성했다. 

요셉은 형들이 행한 일 하나만 가지고도, 평생 이를 갈며, 복수를 꿈꿀 수 있었다. 그가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하나님, 이럴 수 있나요? 원수를 갚아주세요."하면서, 원한을 품고 살았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했겠는가?  그러나 요셉의 삶에 있어서, 가장 절정은 용서하는 마음에 있다. 

요셉을 위대하게 만든 것은, 용서하는 사랑 때문이다. 형제들을 용서하지 못했다면, 요셉은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형제들을 용서한다.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지 않았다면, 빨리 죽었거나, 폐인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마음의 상처를 말한다면, 요셉만큼 큰 상처를 받은 사람이, 또 있을까? 형제들에게 당한 배신감과 충성스럽게 일하고 섬겼던 사람들로부터 받은 마음의 상처, 이런 것들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면 아마도 세상을 저주하며 살아가는, 사회 부적응형 인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셉이, 은혜의 성령의 사람이었다는 증거는, 자기에게 잘못한 형들과 사람들을, 모두 다 용서하고 살았다. 얼마나 억울한가? 총리가 되었을 때, 자신의 결백을 들어내고, 원수갚을 기회가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용서는 이전보다 더 굳은 결합을 가져온다. 우리는 서로에게 늘 잘못한다. 그때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해 줄 때, 더 깊은 이해와 사랑을 갖게된다. 따라서 잘못하고 섭섭하게 한 일에 대하여, 용서를 빌자.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나라는 더욱 튼튼해지고, 교회는 성령의 위로 가운데 진행하게 된다. 

얼마 전, 전문적인 여론 조사기관에서, 한국을 위시하여 동남아지역에 있는, 여러 나라 젊은이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일이 있다. 가장 이상적인 배우자의 조건이, 무엇인가를 묻는 설문조사였다. 그런데 한국의 젊은이들의 경우, 71%에 해당하는 사람이, 제1순위로 '성격'을 들었다. 

그래서 어떤 성격을 가장 원하는지 묻자 '너그러운 성격'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너그러움 마음을 좋아한다. 요셉은 참 너그러운 마음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주님은 자신을 못박은 자들을 용서하셨다. 그러므로 성령이 역사하면, 용서하는 사람이 된다. 용서의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2. 관용하며, 섬기는 삶을 살았다(19-21).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요셉은 자신을 팔아먹은 형들과, 형들의 자녀를 기르겠다고 하였다. 요셉은 용서할 뿐만 아니라, 섬기는 삶을 살았다. 

섬김은 용서 이상이다. 천국은 서로 섬기는 곳이다. 지옥은 서로 판단하고, 책임전가 하는 살벌한 곳이지만, 천국은 서로 위하고, 약점을 서로 도와주고, 이웃에게 봉사하는 곳이다. 따뜻한 인정과, 깊은 배려가 있는 곳이 천국이다. 

요셉은 타향살이를, 오래 해본 사람이다. 형제들이 이국 땅에 오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고, 억압받는지를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형제들이 애굽으로 올 때, 애굽 사람과 구분해서 살 수 있는, 고센 땅을 허락 받았다. 

(창46:33-34) "바로가 당신들을 불러서, 너희의 직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당신들은 이르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들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 

고센 땅에서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봉양했다. 아버지 야곱이 떠난 후에, 형제들을 모두 용서하고 그들을 섬기며 살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성령충만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믿을 때, 용서를 베풀 수 있다. 요셉은 자신이 당한 어려움을, 하나님의 섭리의 눈으로 보고, 해석했다. 

이것이 바로 성령충만한 사람의 눈이다. 당신들이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고 말했다. 물론 요셉을 구덩이에 던지고, 팔아 넘긴 형제들의 죄악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실수를 통해서도, 위대한 일을 이루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보았다. 

비록 형제들이 잘못이지만, 그들이 요셉을 팔았기에, 요셉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다. 요셉이 그 당시 세계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요셉을 보면, 신비한 하나님의 섭리가 보인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놀라운 신비한 능력이 보인다. 그래서 원망하고 불평하지 않는다. 

오히려 용서하고, 자신을 힘들게 한 사람을, 섬기는 삶을 살게 된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이 잘 되도록 하는데 있다. (창12:2-3)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하였다. 하나님이 주신 복은,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철저히 타인 중심의 삶이다. 

욕심이 많아서, 자신의 유익을 위해 남을 헤치는 사람,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박노해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 '나뿐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 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은, 복의 전달자가 되게 하심이다. 

사랑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축복은 사명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면, 우리를 통해 타인의 유익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품어야 한다.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복을 주시려는 계획을, 이해하고 따라야 한다. 내가 잘됨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가!(에4:14). 

복을 잘못이해하면, 복에만 관심을 갖게 되어서, 자신의 명예를 높이는 방향으로 나가려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그러나 받은 복을 사명으로 알고, 연약한 자를 돌볼 때, 진정한 복이 된다. 세상에서는 약자가 강자를 섬기지만, 하나님의 뜻은 강자가 약자를 섬기게 하신다. 

어린 아기는 힘이 없고, 어머니는 강자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아이를 섬긴다. 젖도, 빨래도, 모두 다 섬겨야만 한다. 그러나 아기가 장년이 되고, 어머니가 나이 많아 늙면, 아이가 어머니를 섬겨야 한다. 우리가 많은 돈을 벌었다면, 그 돈으로 약자를 섬기라고 주셨다. 하나님의 비전은 이렇다. 

큰 민족을 이루고, 창대하게 되어야 하는 이유는, 복을 나누어주기 위함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복을 자랑하고 즐기려고만 했지, 섬기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촛대를 옮겼다. 요셉은 자신이 잘 된 이유는, 오늘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고, 당신들과 자손들을 섬기도록 하셨다고 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출세하기 원하는가? 남을 섬기기 위해서인가? 남을 부리기 위해서인가? 우리는 성공을 위해서, 부름 받은 자들이 아니라, 사명을 위해서 부름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이 주신 복에는 사명이 있다. 이 복을 감당하지 못하면 썩기에, 복을 올바로 사명하지 못하면 회개해야 한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복을 알기에 나누고, 섬기기를 원한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섬김 받기 위함이 아니라, 섬기려고 오셨다(마20:28). 요셉은 특별한 상황에서만, 성령충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꿈이나 꾸고, 해석하는 사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복을, 일생을 통하여, 형제와 자녀와 자기 민족을 섬기고 길렀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사람을 살리고 섬긴다. 영혼을 사랑하고 돌본다.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여 배려하고, 최고의 선을 베푼다. 

(22-23) "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며,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섬김을 통하여, 성령의 충만을 확인하시기 바란다. 

3.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았다(24-26).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성도는 두 세계를 살아야 함을 안다. 잠시동안 머물다(  , 구르) 가야 하는 세계와, 영원히 사는 (  , 솨칸)이다. 구르(  )가 게르(  )가 되면, "나그네, 이방인, 손님"이 된다. 그래서 나그네로 이 땅을 지나가는 존재, 방랑하는 존재를 말한다. 자기 거주지가 따로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신앙인은, 이 땅에 완전히 거주하는 것이 아니다. 잠시 이 땅에 머물다가, 계속 거주할 수 있는 나라를 찾아가야 한다. 솨칸은 의미가 다양하다. "자신이 복종시키다, 굴복하다, 공손히 아뢰다, 정하다, 결정하다, 안정하다, 자리잡다, 만족하다, 살기 위해서 결정하다"등이다. 

여기서 변형된 말이, 거주, 거처의 쉐켄(  )이다. 또 성령의 임재가 계속 나타난다는 말이 쉐케나(    )다. 인간의 궁극적 관심이요, 지향하는 목적지는, 바로 하나님과 늘 함께 하는 천국이다. 그 모형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여,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셨고, 그 곳에 거주하도록 만드셨다. 

요셉은 하나님이 애굽 땅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될 것을 확신했다. 이 약속은 (창15:13-1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이 언약을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이삭은 야곱에게, 야곱은 요셉에게 전했다. 이 약속을 믿었기에 자신의 해골을 가나안 땅으로 가져 갈 것을 부탁했다. 

성령충만한 요셉은, 애굽의 영광에 집착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약속의 상급인, 가나안을 사모했다. 가나안의 소망을 사모했다. (롬8:24-25)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그로부터 약4백여 년이 지났다. (출13:18下-19)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 

요셉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나안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다가, 소망 가운데 죽었다. 요셉은 성령충만을 외치고 말한 사람이 아니라, 성령충만한 생애를 살았던 사람이다.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고후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세상 사람들과 성도들은 사는 모습이 다르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은, 미래를 위해 투자한다. 절대로 현실로 끝나서는 안 된다. 

가만히 있으면 점점 더 좋아진다고, 기대하지 말라. 교회는 점점 힘들어지고, 자녀교육도 점점 더 힘들어진다. 아동부, 학생회, 청년회가 자꾸 줄어들고 있다. 미래를 위하여 투자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에 만족하지 말고, 미래를 바라봐야 한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그의 해골을 매고 나오게 했다. 사람이 세상에 와서 살지만, 잠깐 동안 살다가 가야 한다. 요셉은 미래를 준비하고 갔다. 애굽에서 나그네로 살면서,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가나안을 바라보고 살다가 갔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천국을 바라보며 산다. 우리도 천국을 바라보며 살자. 

(히12:2-3)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우리 예수님도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그 앞에 있는 기쁨, 천국에서 구원받은 영혼들이 감사하고, 영광돌리는 모습을 보고 참으셨다. 삶이 힘들고 어렵다면, 예수님이 이같이 죄인들과 반역한 자들을, 참으심을 기억하라. 

성령충만한 삶은, 성령과 함께 용서하고 섬기고, 소망 가운데 끝나는 인생이다. 성령충만의 체험에 매달리지 말고, 성령충만한 삶을 살기 바란다. 요셉은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었다. 용서하는 하나님, 관용하고 섬기는 하나님을 닮았다. 천국을 바라보시고 참았다. 요셉은 예수님의 모형과 같다. 

요셉의 인물됨은, 하나님의 작품이요, 하나님의 솜씨다. 요셉은 갈수록 아름답게, 성숙해져 갔다. 성령에 충만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요셉의 시작은 미약했지만, 그의 마지막은 심히 창대하였다. 그의 위대함은 성공이나 성취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의 성품에 있었다. 

그의 고상한 인격, 그의 사려 깊은 행동, 그의 뿌리깊은 신앙에, 그의 위대함이 있었다. 요셉은 끝마무리를 잘한 지도자였고, 끝까지 달려간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우리의 삶이 요셉 같은, 성령충만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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