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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한예수교장로회 땅끝교회 (행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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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회 땅끝교회 (행 1:8)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라고 부릅니다. 삼천리라는 말은 어디서 기인했을까요? <최남선, 崔南善> 선생은 《조선상식문답》에서 극북의 온성에서 서울까지 이천 리, 그리고 서울에서 해남까지 천 리, 이를 합쳐서 <삼천리강산>이라고 부른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온성이라고 언급된 곳은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면 풍서동 유원진>을 말하는데 <북위 43도 39초>입니다. 우리나라 영토 중에서는 가장 북쪽입니다. 또 남쪽 끝은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갈두리> 마을인데, <북위 34도 17분 38초>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마을을 우리말로 땅끝 마을이라고 부르고, 한자어로는 토말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교회에도 해남이 고향인 분들이 계시지요? 해남은 멋진 곳입니다. 한번 가보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송지면 갈두리 마을만 땅끝인 것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도 땅 끝에 서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있는 이 지역은 우리나라 동남쪽의 땅끝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교회는 땅 끝에 서 있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를 <땅끝교회>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여러 차례 교회 이름을 바꾸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좀 더 새로워지고, 좀 더 성숙하고, 좀 더 큰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지역을 넘어서는 이름을 가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았습니다. 지난 해 <베다니교회>로 바꿀까 하는 의견들을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만, 설명하기 힘들고 너무 어렵다고 해서 관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리모델링된 예배당에 교회 이름을 붙여야 할 때가 오면서 당회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름이란 처음엔 어색해도 의미를 담아 자꾸 부르다 보면 정이 붙게 마련이니, 이번 기회에 새로운 이름을 정해 사용하기로 하였습니다. 기도하던 중에 주신 이름이 <땅끝교회>였습니다. 저는 땅끝교회란 이름이 무척 마음에 듭니다. 저는 땅끝교회란 이름에서 매우 깊은 영적 의미들을 발견했습니다. 제가 이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처럼 부디 교우님들도 땅끝교회란 이름을 좋아하셨으면 합니다. 

첫째는 이 이름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새로운 현존을 가르쳐 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너무도 유명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제자들과 나누실 때 예수님은 감람산 언덕에 앉아 계셨습니다. 감람산에서는 시온산이 바로 건너다보입니다. 그 곳에는 웅장한 성전이 우뚝 서 있습니다. 그 곳은 유대 종교의 중심지입니다. 권력이 집중된 곳입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사모했습니다. 절기만 되면 모여 들었습니다. 모두가 예루살렘 성전을 사모했습니다. 성전을 흠모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1절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제자들은 성전의 웅장함에 압도되어 예수님께 <주님, 저 성전 좀 보십시오. 얼마나 대단합니까?>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도 의외였습니다.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이게 예수님의 대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눈앞에 웅장하게 서 있는 성전이 이제 불과 몇십 년 안에 로마군대에 의해 완전히 파괴될 것을 내다보고 계셨습니다. 성전에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더 이상 죽은 성전에 모여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감람산에 앉으신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의 눈길은 땅끝을 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땅끝까지 이르러>라고 하셨습니다. <얘들아, 더 이상 저 성전에 얽매이지 말아라. 저 성전은 죽은 성전이다. 저 성전에 와서 소를 잡고 양을 잡아 바쳐야 된다는 생각은 버려라. 저 성전에만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다. 이제 너희는 구원받은 내 자녀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디 있든지 너희 있는 곳에 하나님도 함께 계신다. 너희 두 세 사람만 모여도 거기 나도 함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너희들은 저 돌로 만든 성전으로 모여들 생각을 하지 말아라. 그 대신 사방으로, 땅끝으로 퍼져 나가라.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어 전진하라. 그리고 거기 하나님이 안 계시면 어쩌나 염려할 필요가 없다. 너희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도 거기 계신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때 이후 신약시대의 교회는 더 이상 특정 장소에 갇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배당에서 예배할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예배하고, 직장에서도 예배할 수 있습니다. 운전석이 예배자리가 되고, 걸어가는 동안에도 하나님과 함께 합니다.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느 땅끝으로 나가든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성전 건물에 갇혀 있는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온 우주 안에 충만하시고, 당신의 자녀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함께 계십니다. 교우 여러분의 모든 삶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둘째로 땅끝이란 개념은 우리를 무한한 가능성의 평원으로 초대합니다. 

예수님은 땅끝을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을 땅끝으로 보내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대를 넘어 사마리아로, 사마리아를 넘어 땅끝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머물길 원치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이 현실에 안주하길 원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계속 나아가길 원하셨습니다. 

이 비전을 가슴에 품은 대표적 인물은 바울 사도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5장 28절에서 이렇게 웅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로마서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이미 장래 계획이 잡혀 있었습니다. 그 계획이란 로마를 거쳐 서바나까지 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서바나는 당시의 땅끝인 오늘의 스페인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의미에서 <땅끝의 남자>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기독교 세계관은 매우 독특한 것입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미래로 전진하는 모습을 가집니다. 기독교 세계관은 불교나 힌두교, 고대 헬라 사상에서 드러나는 윤회 사상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윤회는 돌고 도는 물레방아 같은 역사관입니다. 아무리 돌아도 늘 같은 모습입니다. 새로움이 없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헬라 사람들은 삼 천 년 만에 역사가 반복된다고 하면서 삼천 년 후에 소크라테스가 또 태어나고, 그가 또 지독한 여자 크산티페와 결혼하고, 또 독배를 마시고 죽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생각대로 하면 소크라테스는 영영 희망이 없습니다. 그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매인 처참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오늘에서 내일로 전진합니다. 목적지를 향해 나아갑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 모습이 우리의 마지막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더 발전할 것입니다. 더 성숙할 것입니다. 더 충만해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궁극적 목적지에 도달할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궁극적인 역사의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오늘 여기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나그네가 여행지에서 계속 머물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나그네가 가족들이 기다리는 가정으로 돌아가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거룩한 나그네, 순례자들입니다. 

순례자의 이미지는 움직이는 것입니다. 순례자는 가만히 있는 정물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팔 다리를 움직여 앞으로 전진합니다. 순례자는 죽은 시체가 아닙니다. 살아서 움직입니다. 이게 바로 건강한 성도의 모습, 부흥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가만히 머물러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삶은 계속 발전해야 합니다. 영혼은 계속 부흥해야 합니다. 활동은 계속 확장되어야 합니다. 

계속 성장해 나가야 한다고 해서 교만해지자는 말은 아닙니다. 이건 그런 문제와 별개입니다. 겸손한 사람도 계속 성장해야 합니다. 학생이 겸손하다고 해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을 포기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겸손하다고 해서 공부를 포기해도 좋은 것은 아닙니다. 겸손한 학생도 더 많이 알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상급학교에 진학합니다. 

이미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오늘의 모습으로 있어도 좋은 것은 아닙니다. 계속 전진하고 부흥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욕망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저는 우리 교우님들이 인생과 신앙과 삶의 모든 영역에 발전이 있길 기원합니다. 삶이 부흥되시길 축복합니다. 날마다 뻗어나가고 성장하길 기원합니다. 

셋째로 이 이름은 우리를 미래로 초대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땅끝을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그들이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곳이었습니다. 땅끝은 <지금까지는 한 번도 가 본적이 없지만, 앞으로 가 볼 곳>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설레는 미래입니다. 

성도는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축복이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수 백 년 동안 그들이 살고 있는 애굽에서 땅을 주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땅, 가나안을 주셨습니다. 

축복 자체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을 얻는 것입니다. 과거에 늘 반복되었던 것, 지금도 늘 반복되고 있는 것만을 계속한다면, 그것은 새로운 축복이 아닙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살이만 계속 반복했다면 그것은 결코 복이 아닙니다. 이젠 노예 신분을 벗어나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가나안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축복은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을 요구합니다. 익숙한 과거와 현재의 옷을 벗고, 과감히 새 옷을 입어야 합니다. 여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이  고등학교 3년을 입던 교복을 벗고 늘씬한 숙녀처럼 꾸미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새 봄 대학가에서 이런 여대생들을 바라보는 것은 상쾌한 즐거움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미래로 부르십니다. 그 미래는 축복의 미래입니다. 땅끝으로 나아가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축복을 바라보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런 은총이 있길 기원합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이런 땅끝의 축복은 어디에 적용되어야 할까요? 

첫째로, 우리 믿음에 적용되길 원합니다. 

저는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길 원합니다. 더 깊은 은혜를 맛보길 원합니다. 예배 시간에 감격의 눈물을 흘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일 낮 예배만 나오던 분이 오후예배, 수요예배에 나오게 되길 원합니다. 너무 기뻐 어린아이 같이 웃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이 너무 달아서 꿀송이 보다 더 달다는 것을 체험하길 원합니다. 교우 여러분들이 방언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던 신령한 체험을 하게 되길 원합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믿음이 예루살렘에 있다면 유다로 나아가게 해야 합니다. 유다에 있다면 사마리아를 넘어 땅끝으로 성장하게 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은 작은 도시입니다. 성벽에 에워싸여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벽 바깥세상을 두려워합니다. 여러분, 성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성 밖에 나가는 것을 귀찮아하지 마십시오. 성 밖엔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 해야 합니다. 영적 호기심을 가지십시오. 성안의 은혜에만 만족하지 말고, 성 밖의 새로운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지금 성 밖에 나가시길 바랍니다. 

혹시 믿음이 유다에 머물러 있다면 유다를 떠나 사마리아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유대인들이 사마리아를 천대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을 더럽다고 여겨 교제의 손을 내밀지 않았고, 사마리아 지역을 늘 우회하여 다녔습니다. <절대 사마리아 사람과는 함께 하지 않겠다>는 자기 기준을 세우고 살았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이들이 이런 기준을 가지고 삽니다. <나는 주일 오전 예배만 드리겠다, 나는 교회로부터 한 발자국 떨어져 지내겠다. 절대 깊이 관여하지 않겠다, 나는 저 사람과는 절대로 함께 일하지 않겠다....> 여러분, 이런 기준을 깨뜨리십시오.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에게도 손을 내미셨습니다. 수가 성 우물가의 여인을 구원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설정된 기준을 깨뜨리고 과감히 사마리아 마을로 들어가 새로운 도전을 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이 사마리아에 멈추어 있다면, 이제는 땅 끝에 도전해 보십시오.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해 보십시요. 남을 돕는 일, 전도하는 일, 그것을 위해 물질과 시간을 바치는 일, 예수님을 위해 욕을 먹는 일에 도전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믿음이 자라길 원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 18절은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고 하셨습니다. 성장은 명령입니다. 땅끝까지 성장하는 믿음을 가지시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땅끝 축복은 사역과 사명에 적용되어야 하겠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사랑입니다. 교회는 사랑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 공장이 되어 그 생산품을 세상에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선 <복음의 전도와 선교>를 통해 드러나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는 땅끝까지 선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복음 전도를 위해 땅끝으로 가야 하겠습니다. 요청이 있다면 뿌리치지 말고, 복음의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또 땅끝은 저 아프리카나 남극과 북극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아직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모든 곳이 땅끝입니다. 금번 7월 24일 해피 데이 페스티벌도 땅끝으로 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복음을 위해 더욱 더 뜨거운 열정으로 나아가길 원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섬김>을 통해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하고 있는 이십 여 가지의 지역을 섬기는 사역들이 삼십 가지, 사십 가지 사역으로 더 확대되고 그 하나하나가 내실을 기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주신 것들을 쌓아 나누는 창고교회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이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길 원합니다. 모든 교우님들이 함께 힘써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은 <어떻게 땅끝교회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 방법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성령님을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고 하셨습니다. <오직>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오직 성령님 중심으로만 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첫째, 우리는 특정한 사람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는 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해야 합니다. 그 어떤 개인의 영광도 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목사의 영광도, 그 어떤 개인의 영광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로 우리는 사람의 방법으로 하지 않길 원합니다. 어떤 열매가 있을 때, <어떻게 이렇게 훌륭하게 했습니까?>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우리에게 이런 전략과 열심히 있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기 보다는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 나도 잘 모릅니다. 성령님께서 하신 게 틀림없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되길 원합니다. 우리가 가진 최고의 대책, 우리의 전략은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일이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되길 원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믿음으로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믿고 우쭐하지도 말고, 부족 때문에 좌절하지도 말고, 오직 우리의 부족을 채우실 성령 하나님을 믿고 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늘 기도의 무릎을 꿇어야 하겠습니다. 엎드려야 하겠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새벽교회가 되길 원하고, 무릎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이게 땅끝교회의 살아가는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땅끝교회의 방식은 세상 끝날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땅끝이란 개념은 공간적 개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땅끝은 시간적으로는 세상 역사가 끝나는 마지막 지점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끝나는 순간까지 성령님을 의지하고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도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의 생애가 끝나는 바로 그 순간도 우리에게 땅끝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목숨이 있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그렇게 할 수 있길 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땅끝교회의 목사가 되겠습니다. 여러분을 땅끝교회의 성도로 초대합니다. 금번 전교인수련회에서 땅끝교회 이름 선포식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8월 주보부터 이름을 바꾸겠습니다. 우리 모두 땅끝교회 이름을 가지고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길 원합니다. 땅끝교회 교우 여러분들에게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실 주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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