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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시 5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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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시 56:1-13)

<고독한 도망자 다윗의 위기>

본문은 다윗의 시입니다. 표제를 보면 “다윗이 가드에서 블레셋인에게 잡힌 때에” 쓴 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21장을 보면 여기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울왕의 미움을 받은 다윗은 정처 없이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누구도 다윗을 따르는 사람이 없이 홀로 쫓길 때였습니다. 

다윗은 제사장 아히멜렉이 있는 놉으로 갔습니다. 제대로 먹지를 못해 허기진 다윗은 아히멜렉에게 먹을 것을 부탁합니다. 불행하게도 보통 빵은 없었고 진설병, 곧 제단에 올라가는 거룩한 빵만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기 위하여 제단에 바친 빵은 일반인이 먹을 수 없습니다. 오직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히멜렉은 굶주려 있는 다윗에게 그 빵을 줍니다. 아히멜렉은 율법의 자구에 매달리지 않고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여러 날 동안 굶주린 다윗은 허겁지겁 그 거룩한 떡을 게눈 감추듯이 먹어치웁니다. 

어느 정도 여유를 찾은 다윗은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혹시 창이나 칼이 있는지 묻습니다. 사울에게 너무 다급하게 쫓기다보니 무기를 챙길 여유도 없었던 것이지요. 성소에는 몇 년 전 다윗이 물리쳤던 골리앗의 칼이 있었습니다. 아히멜렉이 엘라 골짜기 전투의 전리품으로 가져온 그 칼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린 다윗을 통하여 거인 골리앗을 물리쳤던 그 놀라운 구원 사건을 두고두고 기념하기 위하여 성소에 보관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성소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기념물, 골리앗의 칼을 다윗이 달라고 하자 아히멜렉은 기꺼이 줍니다. 

놉에 있는 성소의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왔을 때 다윗은 배도 고팠고 수중에 무기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소를 떠날 때 배를 든든히 채우고 무기도 갖추게 되었습니다. 아히멜렉은 성소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위대한 제사장입니다. 어떤 사람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을 때 먼저 그를 돕는 곳이 성소임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율법을 잠시 어겼습니다. 무기 없이 무방비 상태에서 엄청난 위기를 만날 수밖에 없는 다윗에게 성소의 국보급 유물 골리앗의 칼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아히멜렉은 성소의 진정한 정신, 배고파 굶어죽을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숨을 보호하기 위하여 무기를 베푸는 곳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의 성소, 즉 교회도 율법을 문자적으로만 지키려는 폐쇄적인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사람들이 가장 필요한 빵과 칼을 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놀랍게도 빵과 칼은 성경에서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궁지에 몰려 먹을 양식도 없고 보호할 무기도 없는 이들이 오늘도 교회를 찾으면 하나님의 말씀인 빵과 칼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이 한숨을 돌린 다윗은 여기 놉의 성소도 안전하지 못함을 깨달았습니다. 조만간 사울의 추격이 여기까지 미쳐올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또 급히 피하게 되는데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갑니다. 

가드 왕 아기스는 사울 왕과 원수 사이이기 때문에 혹시 도움이 될까 해서 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하들이 금방 다윗을 알아봅니다. “이 사람은 다윗 왕인데 백성들이 다윗에 대하여 춤추며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사울은 수천 명을 죽이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삼상 21: 11). 신하들이 아기스 왕에게 보고하는 내용을 들은 다윗은 가슴이 뜨끔합니다. “아, 여기도 안전하지 못하구나. 이놈들이 나를 인질로 삼아 사울과 거래를 할 수 있겠구나.” 또 한 차례의 위기를 직감합니다. 완전히 독 안에 든 쥐가 되고 만 것을 알았지요. 

그 순간 다윗은 살아남기 위하여 기가 막힌 연극을 합니다. 미치광이 흉내를 낸 것이지요. 다윗은 왕과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문 문짝 위에 아무렇게나 낙서를 긁적거리고, 수염에 침을 질질 흘리기도 하면서 미친 척 했습니다(삼상 21: 13). 다윗과 같은 영웅군주가 광인(狂人)의 흉내를 내다니! 추락도 이만저만한 추락이 아닙니다. 결국 다윗의 연극이 먹혀들어갔습니다. 아기스 왕이 저 미치광이를 내쫓으라고 해서 다윗은 인질로 잡혀 죽을 뻔한 위기로부터 벗어납니다.   

<두려움이 생길 때 주님을 바라보라>

시편 56편은 바로 이러한 위기 한 가운데에서 다윗이 쓴 시입니다. 다윗은 자기를 해치려고 하는 원수들로부터 자기를 지켜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지금 다윗은 혼자입니다. 아무도 다윗을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사방은 다윗을 삼키려고 온 종일 치며 압제하는 원수들 밖에 없습니다(1-2). 그야말로 다윗은 극도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바로 그 때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4절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두려웠을 때 하나님을 의지했더니 두려움이 사라졌다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매일 염려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마다 가정마다 문제없는 이가 없습니다. 근심거리가 있습니다. 아픔이 있습니다, 상처가 있습니다. 슬픔이 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문제들 앞에 우리는 두려워 떱니다. 건강 때문에, 돈 문제 때문에, 사업의 불경기 때문에 두렵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를 올무에 빠뜨려는 원수들이 사방에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생은 고독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아무도 나를 도울 수 없습니다. 오직 나 홀로 그 문제와 맞부딪혀야 합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이요. 홀로 고립무원(孤立無援)에 빠졌습니다. 독 안에 든 쥐입니다.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섭니다.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면 죽습니다. 이 극도의 공포 한 가운데 다윗은 하나님께 의지합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의지했더니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9절을 봅니다.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께 의지하는데 있습니다. 다윗이 아기스 왕과 신하들 앞에서 미친 척 연극을 한 것도 하나님이 순간적으로 주신 기지였습니다. 다윗이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선물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도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날 때 하나님께 의지하십시오. 하나님이 도우실 줄로 믿습니다. 두려움이 엄습할 때마다 담력과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께 의지하십시오. 하나님이 도우실 줄로 믿습니다.  

<나의 눈물의 양을 재시는 주님>

그런데 시편 56편의 백미(白眉)는 8절입니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은 계수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아픔과 슬픔을 머리털 헤아리듯이 세시는 분입니다. 여기서도 다윗은 자기가 대적들을 피해서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아픔을 자세히 세시는 하나님이라고 노래합니다. 여기서 계수한다는 말은 잊지 않고 자세히 책에 기록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떤 고난을 겪든지 하나님은 잊지 않고 세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다음에 이어서 다윗은 참으로 주옥과 같은 절창(絶唱)을 뽑아냅니다.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세상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시적 표현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새번역은 이 부분을 “내가 흘린 눈물을 주님의 가죽부대에 담아 두십시오”라고 번역합니다. 병이든 가죽부대이든지 간에, 둘 다 무엇인가를 담는 도구입니다. 병에다가 물을 담습니다. 가죽부대 역시 목자들이 물을 담는데 썼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자기가 흘린 일체의 눈물을 하나도 빠짐없이 병이나 가죽부대에 물을 붓듯이 가득 담아 보관해서 잊지 말아달라는 애원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책에 기록하듯이 눈물을 두고두고 기억해달라는 간구이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흘린 눈물을 병이나 가죽부대에 담고 계십니다. 그냥 담으실 뿐 아니라 그 눈물의 양을 주님의 책에 기록하십니다. 여러분, 오늘까지 인생을 사는 동안 흘린 눈물의 양이 얼마나 됩니까? 병에, 아니 가죽부대에 눈물이 가득 찰 때 여러분의 기도가 응답될 것입니다. 

우리 몸에서 나오는 세 가지 액체는 다 귀합니다. 모두 땀과 피와 눈물. 생명만큼 소중한 액체이지요. 하지만 이 셋 중에서 우리의 마음과 직결된 것은 눈물 하나입니다. 마음의 감동 없이도 땀과 피는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눈물은 마음의 감동 없이는 흐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요 보화는 눈물입니다. 가슴 가장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눈물, 이 보다 더 찬란한 것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데 요즈음 우리에게는 눈물이 사라졌습니다. 가슴이 메말랐습니다. 아무리 슬픈 말을 듣고 보아도 마음에 감동이 오지 않습니다. 눈물이 말랐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삶이 황폐해졌다는 말입니다. 돌처럼 굳어졌다는 말입니다. 

이제 태어나서 오늘까지 여러분이 흘린 눈물의 양을 계산해보십시오. 다윗의 고백처럼 하나님께서 우리가 흘린 눈물을 병에 담아 재고 계신다는데 그 눈물의 양이 도대체 얼마나 됩니까? 혹시 여러분의 눈물 병은 말라 있지 않습니까?   

<어떤 눈물을 흘려야 할까?>

다윗은 회개의 눈물을 흘린 사람이었습니다. 시편 6편 6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빗줄기 같이 눈물을 흘린다는 표현이 있는데 다윗의 눈에도 회개의 눈물이 빗줄기 같이 솟구쳤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얼마나 눈물을 흘렸던지 요를 적시는 것은 물론이고 눈물바다로 인해 침상이 떠내려 갈 정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지은 죄 때문에 눈물을 흘린 적이 있습니까? 과거에 지었던 죄악들을 생각만 해도 왈칵 왈칵 눈물이 쏟아진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새벽녘 닭 울기 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는 그 후에 닭울음소리만 들어도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회개의 눈물을 병에다 담으십시오! 

자녀들을 위해 눈물을 흘린 이들이 있습니다. 하갈은 사랑하는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사라에게 집밖으로 쫓겨나 통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창 21: 16). 사막길을 헤매면서 사랑하는 아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방성대곡을 했던 것이지요. 놀랍게도 하나님은 하갈이 통곡으로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하갈과 이스마엘을 보호하십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한나 역시 하나님께 나아가 흐느껴 울면서 기도했습니다(삼상 1: 10).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의 기도 때문에 한나는 사무엘이라는 위대한 선지자를 아들로 얻었습니다. 

어떤 시인은 자식의 뒷모습만 보아도 부모는 자연스레 기도하는 신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자식을 위해서 흘린 눈물의 양이 얼마나 됩니까? 눈물의 자식은 망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자녀들을 위한 사랑의 눈물을 병에 담으십시오!

야곱이 형 에서와 화해한 뒤 흘린 극적인 화해의 눈물이 있습니다(창 33: 4). 먼저 에서가 자기를 속여 장자권을 탈취했던 동생 야곱을 용서했습니다. 에서가 먼저 야곱에게 달려가 두 팔을 벌려 야곱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을 때 두 사람은 함께 화해의 눈물을 쏟았던 것입니다.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요셉은 자기를 종으로 팔아넘긴 형들과 재회하면서 화해의 눈물을 흘립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형들을 마음 중심으로부터 용서하면서 저들과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창 45: 15). 

여러분, 용서의 눈물을 흘리신 적이 언제입니까? 가족 간에 친구 간에 이웃 간에 원수 맺은 일이 있습니까? 이제는 용서와 화해의 눈물을 병에 담을 차례입니다. 

자신의 질병 때문에 눈물을 흘린 사람이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중병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이제 곧 죽을 것이니 집안일을 정리하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듣고서는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왕하 20: 3). 히스기야는 얼굴을 벽쪽으로 돌리고 오로지 통곡으로 기도에만 전무했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15년이나 더 연장시켜주셨습니다. 

병에 걸릴 때 눈물로 기도해보십시오. 특히 불치병이라는 진단이 나왔을 때 통곡으로 기도해보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이 흘린 눈물을 병에 담으시고 다 계수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눈물이 병에 가득 찰 때 병이 낫고 사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울면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발라 준 여인이 있습니다(눅 7: 36-50). 아마도 몸을 파는 창기인 것 같은데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해서 흘린 사랑의 눈물입니다.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하고 존경했기 때문에 자신의 전 재산과 같은 향유 옥합을 깨뜨려 바쳐도 아깝지 않았던 여인이지요. 

여러분이 그동안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해서 흘린 눈물의 양이 얼마나 됩니까? 

예수님도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통한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도 우셨습니다. 

눈물은 참 아름답습니다. 거짓이 없습니다. 『어린 왕자』를 쓴 생 텍쥐페리는 슬픔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살아 있다는 증거이고, 특히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은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 숨어 있는 보석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흘리는 눈물을 병에다가, 가죽부대에다가 담으셔서 하나하나 계수하십니다. 그 눈물이 가득 차고 또 찰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능력이 여러분에게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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