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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시 119:6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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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시 119:65-72)

<고통과 고난은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고난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몸이 아프거나 괴로운 일을 싫어합니다. 쾌락을 좋아합니다. 편하고 좋은 것을 즐겨하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얼마든지 고통을 느끼지 않게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까요? 왜 언제나 편하고 기분 좋은 일만 느끼도록 만들지 않으셨을까요? 

만일 인간이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일 것입니다. 필립 얀시의 책을 읽어보면 인도에서 나병환자들을 대상으로 의료선교를 했던 브랜드 박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브랜드 박사가 발견한 나환자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자기의 몸이 썩어가도 도무지 고통을 느낄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어떤 나환자는 감자를 구워먹다가 뜨거운 숯불 위에 손을 대어도 고통을 못 느낍니다. 정원에서 일하던 또 다른 나환자는 삽으로 인해 손가락을 다쳐 그의 손에서 피가 흘러내려도 그것을 모릅니다. 촛불을 손으로 꺼도 통증을 못 느낍니다. 깨진 유리조각 위를 거닐어도 아픔이 없습니다. 

나환자들에게 문제는 나병 자체가 아니라 감각이 마비가 되어서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어떤 환자는 한 밤중에 잠을 자는 동안 쥐가 와서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물어가도 통증을 못 느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브랜드 박사는 자기가 돌보는 나환자들로 하여금 자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무조건 고양이 한 마리씩을 끼고 잠들게 했습니다. 

이와 같은 의학적인 관찰을 통해 브랜드 박사가 도달한 결론은 고통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나환자가 고침을 받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첫 걸음은 통증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병원에서 큰 수술을 받은 환자가 아무 통증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빨리 아픔을 느껴야 합니다. 어딘가 통증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그 부위가 낫기 시작한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저주입니다. 

미국의 NBA 프로 농구 대회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스타플레이어 밥 그로스(Bob Gross)는 발목에 심한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경기를 고집했습니다. 할 수 없이 주치의가 그의 발 세 곳에다가 강력한 진통제인 마카인 주사를 놔주었습니다. 그로스가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리바운드를 잡으려고 애쓰는 순간 관중들이 다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툭”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마어마한 진통제 주사를 맞았기 때문에 통증을 느낄 수 없는 상태였지만 곧바로 발목뼈가 부러진 것이지요. 의사가 통증을 못 느끼도록 한 나머지 아예 그의 발을 영원히 못 쓰도록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농구 인생마저 접게 만들었습니다. 통증을 느끼는 것은 예방 신호입니다. 거기에 살 수 있는 길이 있지요! 


<고통과 고난, 그 피할 수 없는 숙명>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 71절에서도 고난당하는 것이 유익이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고난은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축복임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당하는 것 자체는 참으로 힘들고 어렵습니다. 교통사고로 몸을 크게 다쳐서 찾아오는 고통, 참기가 쉽지 않습니다. 육체적 질고로 인해 당하는 고통 역시 견디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육체적 고통보다 더욱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정신적인 고통입니다. 마음의 상처가 훨씬 더 견디기 어렵습니다. 우리 몸에 난 상처는 때가 되면 저절로 아물게 됩니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 새겨진 상처는 좀처럼 낫지 않습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저절로 생각나고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 어느 정도이든지 간에 고통과 고난이 결코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요, 마이너스가 아니라 플러스임을 믿으면서 고난이 주는 유익에 대하여 함께 상고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먼저 우리의 고통과 고난은 보편적인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누구나 다 고통과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숙명적인 인간 조건이지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인생을 고해(苦海), 즉 고난의 바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가난한 이들은 자기들만 고난을 당하는 것 같이 생각하지만 부자들에게도 그들이 알지 못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실패한 사람들 역시 그들만이 고난당한다고 믿지만 성공한 이들에게도 비슷한 고난이 있기 마련입니다. 병든 이들 역시 고난은 자기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건강한 이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아픔과 슬픔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극심한 고난을 당할 때 그 고난의 크기가 다른 사람의 것보다 훨씬 더 크다고 느끼는데, 실상 인류가 당하는 고난의 크기는 거의 다 비슷비슷합니다. 이처럼 중요한 것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도 고난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고난에는 크게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로, 자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입니다. 예컨대 음주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내서 교도소에 간다고 했을 때 이 경우의 고난은 순전히 자기의 잘못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이로 인해 당하는 고난은 자기가 책임을 져야하며 하나님이나 사람이나 누구도 비난할 수 없습니다. 그저 잘못한 것에 합당한 고통을 달게 받아야 할 뿐입니다. 

둘째로, 자신의 잘못과 상관없이 당하는 애매한 고난이 있습니다. 정당한 이유 없이 부당하게 당하는 고난이지요. 아무 잘못 없이 다른 사람이 저지른 사고의 희생자가 나올 수 있습니다. 총기 사고나 교통사고 등등, 좋은 사람들에게도 나쁜 사고들이 종종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욥이 당했던 고난이 바로 이 두 번째 경우입니다. 

셋째로, 자발적으로 기꺼이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웃의 구원과 행복을 위해서 기꺼이 자진해서 당하는 고난이지요. 19세기 벨기에의 가톨릭 선교사 조셉 다미엔(Joseph Damien)은 나병 환자들만 집단으로 수용되어 있는 하와이의 몰로카이(Molokai) 섬에 가서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다미엔 신부는 나환자들과 똑같은 처지가 되기 위하여 자진해서 나병에 걸렸습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나 테레사 수녀 같은 이들이 당했던 고난이 모두 이 두 번째 경우입니다. 무엇보다 한 점이 흠이 없으신 예수께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속하시고자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고난이야말로 이와 같은 자발적이고 희생적인 고난의 대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세 가지 종류의 고난 중에서 가장 바람직한 것은 세 번째의 이웃을 위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당하는 고난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이유와 어떤 동기로 고난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모든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우리의 삶에 어떻게 유익이 됩니까?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첫째로, 고난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만드는 출발점이 되기에 유익합니다. 

사람은 고난당하기 전까지 자기가 최고인줄 압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학력과 경험과 재주와 재산을 의지하지요. 하지만 그러다가 인간은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고난을 만나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을 의지하기 시작합니다. 고난을 받는 동안 우리가 끝까지 자신의 의를 고집하면 고난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먼저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자복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자복하고 회개하면 아무리 끝날 것 같지 않던 고난의 터널도 반드시 끝이 나고 광명한 세계가 밝아옵니다. 

어느 주일 아침 한 남자가 침대 안에서 뒤척거리며 일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아내에게 볼멘소리로 불평합니다. “여보, 나 오늘 교회 가기 싫어요. 정말로 피곤해요. 교인들이 나를 좋아하지도 않아요. 게다가 설교는 언제나 지루하고 재미가 없단 말이오!” 아내가 남편을 침대에서 밀어내면서 소리칩니다. “당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교회에 가야만 해요! 왜냐하면 첫째, 우리의 기분이 어떻든지 간에 우리의 처지와 상관없이 주일예배는 무조건 드려야 해요. 둘째, 교인들이 당신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간에 그것은 우리가 예배당에 가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어요. 셋째, 당신이 목사이기 때문이에요.” 

누가 만들어 낸 조크인지 모르지만 목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요. 하지만 목사가 당하는 고난도 오히려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만드는 방편이 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을 비롯한 중동 지방에 가면 양들 중간 중간에 반드시 한두 마리의 염소가 들어가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유를 들어보니 흥미롭습니다. 양들은 게으른 짐승들이기 때문에 일단 풀을 뜯어먹고 배가 부르면 무조건 눕기를 좋아한다는 것이지요. 양들이 배불리 누워 있으면 운동 부족으로 살이 찌고 병에 걸립니다. 그런데 염소는 체질상 누워 있는 양만 보면 가만있질 못하고 뿔로 무조건 찔러댄다는 것입니다. 결국 양들은 염소 때문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움직이기 때문에 건강해진다는 이치입니다. 

교회 안에도 다 양만 있는 것이 아니고 때로 염소도 있겠지요.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염소도 다 유익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로 나아가 더욱 더 하나님께 매달리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이제부터 나는 염소가 되어야 하겠다는 분은 없기를 바랍니다. 그래도 염소보다는 양이 좋지요!) 


둘째로, 고난을 통해서 바른 길로 갈 수 있기 때문에 유익합니다. 

본문 67절은 말씀합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교만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딴 곳에 가 있다 보니 그 말씀대로 살지 않았고 그릇 된 길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제 내가 잘못 해서 당하는 고난이든 내 잘못과 상관없는 고난이든 간에 고난을 받다보니 깨닫습니다. “아, 내가 교만했구나.” “아, 내가 잘못 살았구나.” “아, 내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내 멋대로 살아왔구나.” “아, 내가 내 욕심만 이루려고 가족들과 이웃에게 너무 큰 고통을 주었구나.”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바른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에이브람 링컨이 시골길을 걷고 있는데 한 농부가 말을 몰아 쟁기로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농부에게 인사를 하려고 다가갔는데 말 엉덩이에 파리들이 잔뜩 엉겨붙어있었습니다. 링컨은 파리떼가 말을 귀찮게 하는 게 분명했기 때문에 파리를 쫓아버리려고 손을 흔들려고 했습니다. 그 때 농부가 말했습니다. “신사 양반, 그만 두세요! 그 파리들 때문에 이 늙은 말이 그나마 움직이고 있는 거랍니다.” 늙은 말이 게을러서 꿈쩍도 하려고 하지 않는데 파리가 여기저기 자기 몸을 괴롭히니까 할 수 없이 꼬리도 흔들고 하면서 온몸을 움직이게 된다는 말이지요. 

여러분, 학창 시절에 우리를 힘들게 했던 영어 선생님, 수학 선생님, 그 때에는 철이 없어서 저런 선생님은 빨리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 우리를 지독하게 공부하도록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나중에 보니 정말 말 그대로 은사(恩師)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우리 영어 선생님 중에 고대 불문과를 나오신 심언선 선생님이 계셨는데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릅니다. 럭비 선수 출신이었기에 체격도 좋으셨고 영어 단어나 숙어를 무조건 외울 것을 강요했습니다. 그 때는 그 선생님이 싫었는데 돌아보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제가 그런대로 영어를 잘 할 수 있게 된 것은 순전히 그런 선생님들 덕분입니다. 이와 반대로 마음이 너무 좋아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하셨던 선생님들은 우리에게 큰 도전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이 여러분을 바른 길로 이끕니다. 여러분을 금이나 은처럼 빛나는 보석이 되도록 연단시켜 줍니다. 유행가 가사 중에 “아픈 만큼 성숙하고”라는 말도 있듯이 고난이 우리의 인격을 철들게 하고 성숙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셋째로, 고난은 변장된 축복이기에 유익합니다. 

고난당하는 가운데 우리가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리면 우리의 고난이 변해서 축복이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눈물이 변하여 웃음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 시도 잊지 말아야 할 진리는 고난은 축복이 잠시 동안 변장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 온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본문 71절은 말씀합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옳습니다. 고난을 당하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말씀과 법도와 명령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리하여 땅의 축복보다 훨씬 더 귀한 하늘의 축복을 알게 됩니다. 그러기에 고난은 하나님이 주실 진정한 축복이 잠시 변장을 하고 나타난 것이라고 믿으십시오!

그렇습니다. 로마서 8: 17-18절은 말씀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느니라.” 

히브리서 12: 11절의 말씀입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을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베드로전서 5: 10절도 말씀합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모두 다 고난이 유익한 것임을 약속하는 말씀들입니다. 여러분, 이 약속의 말씀들을 믿으십시오! 


<고통과 고난 = 하나님의 메가폰>

미국의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의 숲에서 큰불이 일어났습니다. 과학자들이 이 산불로 인하여 얼마나 큰 손실을 입었는가를 조사하기 위해서 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한 과학자가 조사를 하다가 어떤 새 한 마리가 나무 밑에 화석이 되어 있어서 막대기로 그 새를 치웠습니다. 화석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있던 새를 치우자 그 밑에서 작은 새끼 새 세 마리가 죽은 엄마 새의 날개를 헤치고 걸어 나왔습니다. 산불이 일어나자 위기를 직감한 어미 새가 급히 자기 새끼들을 나무 둥치 밑에 데리고 가서 자기 날개를 덮어서 새끼들을 보호했던 것이지요. 이 새는 자기 혼자 충분히 안전한 곳으로 날아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새끼들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은 죽어가면서도 자기의 새끼들을 살려냈던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사랑도 이와 같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난당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다 아십니다. 어떤 극심한 고통 가운데에서도 끝까지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난의 재가 변하여 영광의 화관이 되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C. S. 루이스는 고난이 “하나님의 메가폰”, 즉 확성기라고 했습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잘 들려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난을 당할 때면 하나님의 음성이 크게 들려옵니다. 그래서 가브리엘 마르셀은 “내게 필요한 것은 가난과 병고(病苦)”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더욱 더 가까이 나가기 위해 때로 고난은 필수적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어떤 고난을 당하시든지 간에 그 고난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크게 부르시는 확성기인 것을 믿으십시오! 그 고난이 여러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출발점이 됩니다! 여러분을 바른 길로 이끕니다! 고난이 변하여 축복이 됩니다! 그러므로 여하한 고난도 유익한 것임을 믿으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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