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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버림받는 사람, 쓰임 받는 사람 (삼상 16: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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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림받는 사람, 쓰임 받는 사람 (삼상 16:14-23)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는 다윗이라는 한 사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다윗이 어떠한 사람이길래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었을까?' 하고 생각하다 보면 부러운 마음마저 듭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영웅적인 인물이어서가 아닙니다. 또는 그가 이스라엘의 성군이 되어 나라를 통일하는 큰 업적을 이루었기 때문만도 아닙니다. 다윗은 실수가 너무 많아요. 허물이 너무 많아요. 
  
저는 그저 몇 곳 보았는데, 전문가가 연구를 하고 책에 써놓기를 성경에만도 스무 곳 이상의 씻을 수 없는 실수와 죄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당신의 뜻을 온 땅에 펼쳐나가십니다. 그런데 이 다윗의 생애를 공부하면서 사울의 생애를 공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국가의 최초의 왕 사울이 무대 위에서 퇴장하기 시작하면서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다윗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시면서 부터 다윗의 등장은 시작이 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셨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이 기록하는 사울의 간단한 신상명세는 이렇습니다. 삼상9:1-2절에 보면 “베냐민 지파에 기스라 이름하는 유력한 사람이 있으니 그는 아비엘의 아들이요 스롤의 손자요 베고랏의 증손이요 아비아의 현손이라 베냐민 사람이더라 기스가 아들이 있으니 그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하더라” 여기 보면 그를 ‘준수한 소년이라’ 사울은 대단히 미남입니다. 그리고 ‘그 키가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 하더라’ 그러니까 체격도 얼마니 컸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는 대단히 키가 큰 거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성품이 삼산 9:21절에 나와 있습니다. “사울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오며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이 말은 사울이 왕으로 선택이 되었을 때, 자신의 고백입니다. “저는 왕이 될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이렇게 사울왕의 시작은 모든 이에게 희망, 그 자체였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외모도 걸출하죠! 그 뿐만 아니라 내면의 겸손함까지 겸비한 이 사울을 만난 사무엘이 흥분을 안하겠습니까? 이제 나이가 많은 선지자 사무엘은 이 사울의 겸손을 사랑했고 사울을 만나던 날 밤, 그에게 왕의 도리를 가르치고, 하나님의 지도자는 어떻게 해야 되는 지를 정성껏 전수를 했습니다. 사무엘의 마음은 이 사울이 훌륭한 하나님의 리더로 서 주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사무엘의 영적 충고를 받고 왕이 된 사울은 즉위 직후, 백성들을 이끌고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괴롭혀 온 외세의 침략을 단번에 물리치는 혁혁한 전과를 세웁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들이 그의 지도력 앞에 철저히 복종을 합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빠른 성공은 오히려 자만을 불러 일으켜 즉위 2년 만에 하나님의 진노 앞에 버림을 당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울은 실패한 인생의 전형입니다. 미천한 인간이 왕이 됐으면 크게 성공한 것 같은데, 결국은 실패하고 비참한 최후를 마쳤으니 얼마나 놀랍고 안타깝습니까? 아마 구약 성경에서 가장 비참한 인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삼상15:11 보면, 하나님께서 사울의 죄악으로 인해 심히 탄식하시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I am grieved)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 ” 하나님이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후회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판단 미스를 하셨다는 게 아니라, 사울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습이 너무 안타깝고 슬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결국 사울은 폐위되고 맙니다. 삼상15:23절에 보면 결국 사울은 폐위되고 맙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생각해보세요! 인생에 있어서 버림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인간은 누구나 버림받음의 두려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어릴 적에는 부모가 나를 버리지는 않을까? 결혼 후에는 배우자가 나를 버리지는 않을까? 직장 생활을 하면서 이 직장이 어느 날 나를 버리지는 않을까? 늙어서는 자식들이 나를 버리지는 않을까? 그리고 심지어 좋은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도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는 않으실까? 라는 불안한 생각이 우리의 의식의 저변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죄의식과 연관되어 의식의 표면으로 더욱 뚜렷하게 등장하게 됩니다. 죄를 범한 첫 사람 아담이 “내가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고 말할 때 바로 그런 상태를 경험한 것입니다. 이런 정도가 심해지면 정신 의학자들이 말하는 소위 ‘보더라인 성격장애’(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를 경험하게 됩니다. 자기가 버림받음을 상상하고 버림받지 않기 위한 과도한 반응을 보이는 성격 장애 현상을 뜻하는 일종의 신경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배우자가 좀 늦게 와도 시간을 변경해도 연락을 취하지 않아도 나를 배신한 것으로, 혹은 나를 방치내지는 거절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불안과 우울에 빠지고, 충동적이고 파괴적 행동을 시도하기도 하고, 더 심해지면 약물중독이나 자살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증상은 상당 부분 애매모호하고 정의되기 어렵기 때문에 ‘보더라인’ 즉 경계선상의 성격장애라고 불리우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이런 증상은 일반적으로 여성이 남성의 2배라는 통계가 있었습니다만 최근에 와서는 문화 환경의 변화로 남성들에게도 이런 증상이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제는 남자나 여자를 막론하고 우리 모두 버림받음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교만과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권세에 대적하던 사울에게서 하나님의 신이 떠났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났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울에게서 하나님의 은혜를 거두어 가신 것입니다. 사울에게 가장 나쁜 상황이 임한 것입니다. 

사울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할 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삼상 10장 10절을 보면“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임함으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하니” 그리고 11장 6절에도 보게 되면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 노가 크게 일어나서” 그는 한 때, 여호와의 신으로 충만하였던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습니다. 능력 있는 왕이었습니다. 

그의 본래의 성품은 소심하고 조심성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아는 사람들은 사울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예언하는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신으로 감동된 사울이 암몬 사람들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탄식을 듣고 의분이 일어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 암몬 사람들을 전멸시키던 강하고 능력 있는 당당한 지도자였습니다. 
  
이렇게 강하고 당당하던 사울에게서 하나님의 신이 떠나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하였습니다. 여기서 ‘번뇌케 한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바아트’는 “두렵게 하다” “공포를 느끼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18장 1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그렇게 강하고 능력 있던 사울이 한낮 자기가 부리는 부관을 보면서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종이호랑이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떠난 사건은 사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사울의 인생은 비극으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신이 떠난 후에 두려움과 고통에 신음하는 사울을 보다 못한 그의 신하들이 사울에게 한가지 제안을 합니다. 수금을 잘 타는 사람을 불러서 연주하게 함으로 사울 왕의 마음을 위로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소년을 통해서 다윗이 추천되어 사울 왕 앞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막 하나님의 신이 크게 감동한 다윗은 한 눈에 보기에 참으로 준수한 소년이었습니다. 여기 23절을 보십시다.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더라” 사울은 다윗의 수금을 통해 악신이 떠나고 유쾌하게 되는 엄청난 결과를 보게 됩니다. 이제 다윗은 양치는 목동에서 새로운 왕으로서 몰락하는 사울 앞에 서게 됩니다. 사울은 다윗을 보자마자 자신의 부관으로 삼고, 악령과 싸울 때마다 수금을 통해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다. 다윗을 왜 왕궁에 부르셨습니까? 사울 왕을 왜 만나게 하셨습니까? 

여기에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가 있습니다. 왕궁에서 사울 왕을 섬기면서 국정을 배우고, 전쟁을 배우고, 정치를 배우게 하려는 목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윗을 왕궁에 들여보내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신이 떠난 후에 변해버린 사울이 모습을 다윗으로 목격하게 하심으로 앞으로 살아가야 할 다윗에게 무언의 경고를 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막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새로운 희망에 부풀어 있는 다윗에게 “너도 내가 떠나면 저렇게 될 수 있다”라고 하나님은 조용히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다윗의 생애 속에서 증명되었습니다. 시편 51장을 보겠습니다. 시편 51장 머리에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라는 글이 쓰여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다윗이 이 시편을 지은 때가 언제라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다윗은 참으로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그도 큰 죄를 지었습니다. 

바로 자기의 충복인 우리야의 부인이었던 밧세바와 간통을 한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불륜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죄를 그냥 지나치실리가 없습니다. 즉시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다윗의 죄를 꾸짖습니다. 한 나라의 왕입니다. 모든 권세를 가진 최고 권력자입니다. 그런데, 그는 나단 선지자의 충고를 듣고 그 자리에 엎드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 12:13).”고 회개합니다. 
  
그 후에 다윗은 시편 51장을 지어 부르면서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면서 11절에 보면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기도가 나왔습니까? 사울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떠나고 하나님이 보내신 악신이 역사할 때마다 비참하게 무너져 내리는 사울을 보면서 다윗은 하나님의 신이 떠난 인생이 얼마나 비참하게 되는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왕이든, 그가 목사이든, 그가 장로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부자였는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붙잡아야 할 기도의 제목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서 하나님의 신이 떠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결코 성령이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인격자이시기에 근심하고 탄식을 합니다. 성령을 따라 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뜻을 깨닫게 되고 한 생을 은혜가운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제 것 우리가 산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절대로 자고하지 맙시다. 교만하지 맙시다. 하나님이 거두어 가시면 내 생명도 헛됩니다. 내가 누리는 영광도 헛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떠나시면 내가 지금 쥐고 있는 것, 자랑하고 있는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아침! 묻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우리가 누구입니까? 그 생명이 코의 호흡에 붙어있는 하루살이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 중에 죄인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는 원수의 자리에 있던 자들입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사 십자가에 돌아가게 하시고, 그 위에서 살으신 보혈의 피로 우리의 죄를 말끔히 씻어 주셨습니다. 

어찌 그 뿐입니까? 죄 사함의 은총뿐만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이름을 지으시고 언제든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주의 영원한 나라에 면류관의 주인공으로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는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값없이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 주시기까지 하신 그 분이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한량없는 은혜와 사랑을 입은 자가 바로 우리입니다. 

아무런 자격도 없는 인생들인데도 버리지 않고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이 저와 여러분에게 임한 것입니다. 다윗을 불러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신 그 은혜처럼,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는 사람들마다 하나님이 자녀라고 하는 엄청난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다윗을 부르신 하나님을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고 은혜주시고 구원하신 것은 우리들만의 축복으로 간직하고 기뻐할 일이 아니라 구원받고 능력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인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을 사울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두려움에 빠진 사울 왕, 이제 그에게는 희망도 없고, 삶의 자신감도 없습니다. 두려움과 공포에 짓눌려 절망과 한숨만 있을 뿐입니다. 바로 그를 위로할 하나님의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가져야 할 사명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뜻입니다. 
  
내가 쓰임받는 다는 것, 보다 행복하고 즐거운 것이 없습니다. 그 쓰임의 현장이 세상 앞에 드러나지 않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일찌라도 주님이 인정하시고 쓰시는 일이라면 이것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로렌스 형제가 있는데 그는 깔멩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사가 되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배움도 부족하고 다리를 저는 불구의 몸이었습니다. 여러 번 수도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번번히 좌절이 됩니다. 

마침내 48세에 겨우 수도원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는 그 속에 들어가 또 한번 실망을 하게 됩니다. 로렌스 형제는 여생을 아름답고 보람 있게 살고자 들어간 수도원에서 정작 자신에게 주방에서 밥하고 설거지하는 일만 시키는데 몹시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인생의 고상한 목적을 위해 수도원에 들어온 나에게 기껏 맡기는 일이 설거지란 말인가!? 그러나 곧 하찮은 일상 가운데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로렌스 형제는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설거지하는 가운데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내 삶 어느 구석에라도 함께 가시는 하나님!? 그러면서 하나님과 대화하기 시작했고, 대화 내용을 편지에 담아 수도원 원장과 주고받았는데, 바로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라는 책으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오리려 아픔을 겪는 동안 그는 놀랍도록 주님을 닮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를 만나는 사람은 누구나 다 변했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일상적인 삶에 대한 태도였습니다. 그가 식당에서 그릇을 닦고 있는 모습을 본 어떤 사람이 그의 일상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로렌스 형제가 그릇을 닦고 있는 모습을 보면 마치 사제가 성찬식을 준비하는 엄숙함과 경건함을 느낀다. 

그는 경건함으로 엄숙함으로 정성을 다하여 그릇을 하나하나 닦고 있었다. 그리고 주어진 모든 임무를 마치고 부엌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로렌스 형제의 모습을 보았을 때 우리는 거기서 신의 임재를 볼 수 있었다.? 설것이를 하는 것도 성찬식을 하는 자세로 했던 그는 마침내 자기를 여러 번 거절한 그 수도원의 원장으로 한 생을 보람 있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큰 일을 하든지, 작은 일을 하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를 향한, 대안적인 지혜와 정신과 가치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정신으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그 사명을 감당할 때, 그리고 그 일에 내가 쓰임을 받을 때 그야 말로 가장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청년들이 제주도 단기 선교를 떠납니다. 가장 바쁠 때 내 삶을 주를 위해 드린다는 것은 정말 귀한 결단이고 또 내 인생이 주 앞에 쓰여진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이 일에 동참하는 여러분들의 섬김을 통해 반드시 아름다운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의 위기는 가난이 아닙니다. 사업에 실패하는 것도 아닙니다. 건강을 잃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위기는 성령의 간섭과 지배를 받지 못하는 삶입니다. 그때 우리는 영적인 영적 빈곤에 빠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지 못할 때, 위기가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항상 머물러 계시고, 성령이 인도함을 받으며 살 때, 삶의 희망이 보이고 능력도 나타나고 간증거리도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항상 하나님의 신으로 충만하기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공급받으며 살 때,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요즘도 리더십을 위해 쓰여 진 책 가운데 꾸준히 읽히는 책 가운데 밥 포드의 「하프타임」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가운데 “성공추구에서 의미 찾기로 바꾸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공만을 찾아서 몸부림치는 인생의 신기루 같은 성공은 인생의 모든 가치를 파괴시키고 우리를 허무 속에서 떨게 합니다. 사람이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결산이 가까울수록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의미 있는 일에 내 삶을 바치며 살아 왔느냐 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느냐, 내 이름이 남느냐, 그런 것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가까워질수록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서, 의미와 보람과 기회를 발견하고 “하나님, 정말 하나님이 주신 일 대문에 내 인생은 보람 있었고, 신바람 나고, 놀라운 인생이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내 평생의 보람 있는 가치를 발견하여야 합니다. 

지금까지 저와 여러분은 어떤 인생을 살아오셨습니까? 한번 잠시 멈추어 중간 평가를 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시라도 사울처럼 ‘성공 같은 실패’의 인생은 아닌가요? 세상 기준으로도 실패했고 하나님 앞에서도 실패한 ‘실패 같은 실패’의 인생입니까? 혹시라도 그렇다면 이대로 인생을 마칠 수는 없습니다. 단 한번인 나의 인생이기에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초지일관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인생으로 살다가 천국에 들어가야 합니다. 모쪼록 남은 생애 꼭 성공하는 인생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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