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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이루는 삶 (롬 1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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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이루는 삶 (롬 12:3-21)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의롭다고 여기시기로 하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설명한 후에 그들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권하며 그것이 그들이 드릴 영적 예배라고 했습니다(롬12:1).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했습니다(롬12:2). 이어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많은 구체적인 권면들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어지는 권면들은 신자들이 갖게 되는 공동체적이고 관계적인 삶과 연관된 권면들입니다. 무릇 그리스도인의 신앙 속에서 같은 신앙인이며 한 공동체의 구성원인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같은 하나님나라의 삶을 지향하는 신앙공동체가 이 땅에서의 삶에서부터 하늘나라의 삶에 가능한 한 가까운 삶을 구현하고자 할 때 우리 각자에게 요구되는 삶의 방식과 덕목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사도 바울은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주는 권면들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각자 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몸을 이루는 각 지체의 기능이 다 다르듯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들인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각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도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부터 6절 상반절까지가 그것을 말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한 것입니다. 각 지체의 은사가 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면 그 모두를 서로가 존중하고 사랑하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삶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조화롭고 평화롭게 한 몸을 이룰 수 있는 그 놀라운 비결이 어디에 있는지를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는 데 있어서 사도 바울이 제시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는 각자가 자기 분수를 알고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자가 받은 은사가 다 다르기 때문에 각자가 해야 할 일이 다를 수 있고 일에 따라 누가 더 잘 할 수 있는지도 다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든지 내가 해야 하고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은 공동체의 삶에 무익할 뿐 아니라 해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 3절에서 바울이 한 말이 그 말입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분수와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바로 알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분량대로”라고 한 것은 “믿는 이들 각자에게 하나님께서 나누어 주신 은사의 다양함을 따라”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사는 “이런 은사”이고 “이만큼의 은사”인데 갖지도 않은 은사를 발휘하려 하거나 능력에 넘치게 과욕을 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 6-8절에서는 공동체의 삶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따라 각자의 몫을 다하라고 권면합니다. 예언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은 마땅한 자세로 예언을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예언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관하여 받은 계시를 전한다는 의미의 예언이 아니고,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양육하고 권면하며 위로하는 사역을 가리키는 것입니다(고전14:3 참고). 그런 은사를 가지고도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섬기는 은사를 받은 사람은 열심히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섬긴다는 것은 공동체를 바로 세우는 데 쓰이는 모든 봉사활동을 가리킵니다. 그런 일을 할 은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런 봉사활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은 공동체 안에서 가르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로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은 위로하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좋은 조언과 격려와 위안을 줄 수 있는 사람이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8절에서 주어진 권면 가운데 두 번째 것부터는 받은 바 은사를 따라 행하되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권면까지 함께 주어지고 있습니다. 즉 구제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은 구제하는 일을 하되 성실함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실함이란 단순함 또는 순수함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숨은 다른 의도를 가지고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고 싶은 선한 마음으로 구제하라는 것입니다. 다스리는 은사를 받은 사람은 다스리는 일을 하되 부지런함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스린다는 것은 공동체에서 각종 부서나 활동의 책임자로서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부지런하다는 것은 열심 있음을 의미합니다. 책임자나 지도자가 열심을 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긍휼을 베푸는 은사를 받은 사람은 긍휼 베푸는 일을 하되 즐거움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긍휼을 베푼다는 것은 가난하거나 병들었거나 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들을 개인적으로 도와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일을 할 때 억지로, 마지못해, 싫고 귀찮은 표정 지으며 하지 말고 기분 좋게 웃는 얼굴로 하라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주어진 권면은 사실상 공동체나 그 구성원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9절부터는 사랑에 관하여 말합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한 것은 거짓됨이 없이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마음에도 없이 사랑하는 척 연극하듯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거짓 없는 사랑을 말하자마자 악을 미워하며 선에 속하라고 말한 것은 의미 있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선이 함께 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랑이 악과 함께하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 악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선이 함께 할 때 참된 사랑을 증명합니다. 사람을 괴롭히며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우리는 참된 사랑을 실천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부르심에 바르게 응답하려면 악을 미워하고 선의 편에 확고하게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그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라.” 합니다(본문 10절 상반절). 이것은 믿음의 공동체의 구성원들 사이의 사랑은 친형제자매들 사이에 사랑하듯이 하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 합니다(본문 10절 하반절). 여기서 존경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더 훌륭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이의 장점과 공로를 인정하고 높여줄 줄 아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귀한 일입니다. 다음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본문 11절) 합니다. 이 권면도 사랑의 권면의 하나로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일이 아니라 남의 일이라 생각할 때는 그 일에 대한 열심이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라면 그리스도인에게서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의 일일수록 더더욱 열심을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쓸 당시에는 예수 믿는다는 것이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위험한 처지에 놓일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자신의 신변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이들을 사랑으로 섬긴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소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소망을 가진 사람은 어려움 속에서도 즐겁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환난 중에서도 참으며 계속해서 사랑으로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을 봅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합니다. 기도에 힘쓰는 것은 단순히 사도 바울이 권면하는 여러 가지 실천내용의 하나가 아닙니다. 그가 권면하는 모든 일을 더 잘 하게 하는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사랑의 의지에 불을 붙이며 사랑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해주는 것이 기도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려는 열심에 기름을 공급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사랑을 실천하며 소망 중에 갖는 즐거움을 증대시키는 것이 기도입니다. 환난 중에서도 사랑의 실천을 계속하게 하는 인내의 힘을 더해주는 것도 기도입니다. 환난 중에는 남 돌아볼 겨를이 없어지기 쉽지만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달라야 함을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13절입니다: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같은 신앙공동체 안에서의 지체들 간의 사랑을 말한 사도 바울은 본문 14절부터는 더 나아가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해야 할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며 그 사랑을 권면합니다. 먼저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합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안을 사도 바울이 제시한 것입니다. 저주하지 않는 것은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쌍히 여기고 저주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 축복입니다. 

축복은 복을 비는 것입니다. 즉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도록 하나님께 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하신 일이고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가며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해서 한 일입니다. 보통 사람들로서는 하기 힘든 일입니다. 오직 성령께서 함께하시고 힘을 주셔야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의 권면은 계속됩니다. 본문 15절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이것은 사랑하는 이를 향해서 나올 수 있는 자연적인 반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울면 같이 울고 싶고 그가 즐거워하면 함께 즐거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라”는 권면이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권면보다 먼저 주어진 것은 그것이 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는 사람의 처지는 일단 다른 사람들의 처지보다 안 좋은 상태라고 볼 때 그 우는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질투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와 함께 쉽게 울어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즐거워하는 이들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 즐거워하는 사람에 대해 질투나 시기심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흔쾌히 함께 즐거워해주기가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기”는 “우는 자들과 함께 울기”보다 더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사도 바울은 먼저 권면한 것입니다. 

이어지는 권면은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본문 16절). “서로 마음을 같이한다”는 것은 아무도 서로 간에 인종이나 출생이나 계급이나 재산에 따라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한 차별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모두가 한 몸을 이룸으로써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한 몸의 지체인 이들 사이에서는 다른 지체보다 높아지고 군림하며 지배하려 하기보다는 다른 지체들을 잘 섬기려고 하는 것이 한 몸인 공동체를 위해 유익한 일입니다. 

이러한 겸손은 공동체 밖의 사람들을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요구되는 덕목입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항상 자기 생각이 옳고 자기에게 어떤 권리가 있다고 여기며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기 쉽습니다. 그런 교만은 남에게 상처를 주거나 불쾌감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남에게 상처 주거나 불쾌감을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겸손은 아무에게도 그 어떤 상처도 주지 않습니다. 겸손은 사랑의 확실한 표지입니다. 

사도 바울의 사랑에 대한 권면은 본문 17절부터 그 정점을 향해 나아갑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본문 17-18절) 사도 바울의 이 권면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실천하기가 매우 힘든 이상적인 사랑의 권면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함께하시면 가능한 일입니다. 성령께 간구하면 주실 은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권면을 받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기를 “남에게 하는 권면이니 쉽게 하는 것 아닌가? 우리에 대한 사랑의 관심이 적어서 하는 말 아니가?” 할까봐 “내 사랑하는 자들아”(본문 19절) 하며 그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과 친밀함을 강조한 것 같습니다. 사랑의 실천에 관한 사도 바울의 마지막 권면은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신 32:35)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잠 25:21 이하).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하는 권면입니다. 원수의 머리에 숯불이 쌓이게 하는 것은 그에게 무서운 심판의 불이 내리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고 깊은 자책감을 가지며 돌아설 수 있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비록 하나님께 맡긴다 하드라도 하나님께서 나의 원수에게 큰 벌을 내리시기를 비는 것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과 조화될 수 없습니다. 앞선 14절에서 분명히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원수같이 행하는 자들이 회개하게 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베푸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고 돌아서지 않는다 하드라도 그 일은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가능에 가까워 보이는 사랑을 실천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받은 사랑과 용서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이 죽음을 이긴 것 같이 그 안에서 사랑이 증오를 이기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한 공동체의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한 몸 되게 하는 것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사랑의 실천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입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권면입니다. 그 권면대로 실천하는 것이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입니다(롬12:1). 그것이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일입니다. 그것이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서 일어나야 하는 변화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입니다. 그 뜻을 따라 살기를 힘쓰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와 평화가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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