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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둘람 굴과 다윗 (삼상 22:1-2, 시 14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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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둘람 굴과 다윗 (삼상 22:1-2, 시 142:1-7)


얼마 전에 폐암으로 씨름하다 하나님 품에 안긴 옥한흠 목사님이 있습니다. 제자훈련이라는 우리나라 토양에 영적 소망을 불러일으킨 분이 아닙니까? 교회를 개척하면서 처음으로 쓴 책 한권이 있는데 그 제목이 “고통에는 뜻이 있다”라는 책입니다. 이 책을 대할 때마다 남다른 감회가 오는 좋은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 분이 서문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나는 사실 고통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내가 겪으며 맛본 고통이란 실은 고통이 아닐 수도 있다. 사람들이 빠져 있는 고통의 심연은 죄악의 심연만큼 어둡고 깊어서 그 밑바닥을 들여다 본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불가능하다. 욥의 고통을 맛보지 못한 자가 어찌 그를 두고 한마디인들 할 수 있겠는가? 예례미야가 마셨던 쑥과 담즙이 어떤 것인지 모르면서 그의 고통을 논할 수 있겠는가?” 참 솔직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책의 내용을 보면 ‘고난’은 ‘변장하고 찾아오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보세요. 그의 생애 역시 파란만장한 생애였습니다. 골리앗을 물리치고 난후 승승장구해야 할 인생인데, 왕의 시기와 미움 속에서 그 그늘 속에서 젊은 청춘을 다 보내야 했습니다. 통링 왕국을 이루기까지 20년이 넘는 세월, 황금 같은 시절을 쫓기는 자로 광야에서 소망 없는 자처럼 보내야 했습니다. 시102:6-7절에 보시면 ?나는 광야의 당아 새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며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에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광야의 당아 새, 황량한 곳의 부엉이, 밤새도록 외롭게 앉아 떨고 있는 지붕 위에 참새가 어떤 것인지 우리는 생물학적으로는 잘 모르지만 그 감정은 느낄 수가 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고독하고 처절하였는가를 보여주는 시입니다. 그는 어린 소년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리라‘는 약속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람입니다.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싸움터에서 그가 세운 전공으로 모든 이스라엘 앞에서 추앙을 받던 영웅이었습니다. 너무 특출해 버리니까 왕으로부터 질투를 받아서 이제는 쫓기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연단하기 위해서 주신 한 때의 괴로움이었는데 그 한 때라는 것이 2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던 것입니다. 

이 기간 그는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쳤습니다. 얼마나 생존에 몸부림을 쳤으면 자기가 죽인 골리앗의 나라 블레셋으로 가서 아기스 왕을 찾아 갔겠습니까? 블레셋의 전진기지가 있는 곳이 가드였습니다. 그런데 아기스 왕의 신하들조차도 다윗을 첫눈에 알아보았습니다. 블레셋의 명장 골리앗을 쓰러뜨린 후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라는 추앙을 받던 영웅이 아니냐라고 합니다. 다윗은 자기의 신분을 숨길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혹시 자기를 죽이려고 하거나 이스라엘에 해가 될까, 하여 미친 척합니다. 한번 다윗의 입장에 서서 그가 경험하는 아픔을 상상해 보십시오. 왕이 되겠다고 약속을 받고 백성의 영웅으로 추앙 받던 자가 지금은 적진 가운데서 목숨을 구하기 위해 미친 척하고 있습니다. 미친개처럼 문짝을 긁고 침을 질질 흘리면서 실실 웃습니다. 너무나도 너저분한 모습이어서 아기스 왕은 전혀 의심도 하지 않고, ‘내 주위에 미친 사람이 부족해서 저런 미친 사람을 데려 왔느냐’면서 당장 보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다윗은 그들 앞에서 너무나도 혐오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은 미친 체하여 목숨을 건져내고 간 아둘람 굴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은 굴하면 어떤 생각이 나십니까? 여러분이 생각하는 굴은 어떤 굴입니까? 효도관광 다닐 때의 그 멋진 굴입니까?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의 만장굴이 생각납니다. 또한 중국 장가계에 있는 굴은 세상에 이런 큰 굴이 있나 싶을 정도로 엄청난 위용을 뽐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생애에 찾아온 굴은 참으로도 암울하고 외로운 곳으로 자기 인생에서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가는 그런 경험을 맛보는 절망이 서려 있는 곳입니다. 다윗의 이런 내면의 고통 받는 세계, 특별히 굴속에서 당하는 아픈 마음을 시편 142편에 시로 적어 놓았습니다. 그 부제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다윗이 굴에 있을 때 지은 마스길 곧 기도’ 

다윗은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내가 내 원통함을 그 앞에 토하며 내 우환을 그 앞에 진술하는 도다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나의 행하는 길에 저희가 나는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시 142:1-3). 

여기 그의 인생에 어두움을 상징하듯이 캄캄하고 어두운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다윗의 모습을 보십시오. 외로움과 고통의 상징인 동굴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말로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자의 아픔을 맛보았습니다. 아내 미갈을 잃어 버렸습니다. 또 모든 사람이 부러워했던 직업도 잃어 버렸습니다. 자기를 좇았던 충성된 사람들과 친구들, 특히 가장 친한 친구 요나단도 잃어버렸습니다. 심지어는 골리앗 장군을 무찌르기 위해 나아갔던 그 용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존심까지도 다 버리고 미친 흉내까지 내야 하는 그런 비참한 모습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긍심마저도 다 잃어버린 상태에서 굴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4절에는 자기의 아픔을 얘기합니다. “내 우편을 살펴보소서. 나를 아는 자도 없고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아보는 자도 없나이다.” 이것이 다윗이 느끼고 있던 고독이었습니다. 어디를 돌아보아도 나를 도와 줄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그렇게 친하던 친구도 고통을 당하게 되니까 옆에 와서 도와 줄 힘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살아볼려고, 너무 두려워서 불레셋까지 들어간 그의 모습이 얼마나 처량합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도저히 일어설 것 같지 않은 이 절망의 현장에서 다윗이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기도였습니다. 나는 이 시간 여러분 역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어떤 환경, 어떤 자리에서도 기도의 생명줄을 붙잡고 일어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는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교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내가 누구를 만나는가에 따라서 내 삶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과의 교제는 내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갖게 합니다. 

1절에 보십시요,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5절에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오 생존 세계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아무도 나에게 분깃이 되어 주지 않고 힘이 되어 주지 않지만, 어디를 둘러보아도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지만, 여호와 하나님만이 나의 분깃이요, 나의 의지할 도움의 손길임을 고백하며 깊은 절망의 동굴에서 애간장을 끊듯 기도합니다. 

지난 날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다 승승장구한 것이 아닙니다. 실패의 골짜기 속에서 두려워하고 신음하고 절망했던 사람들입니다. 그 간사했던 야곱이 어떻게 위대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가 있었겠습니까? 얍복강 나루터의 기도의 교제에 있었습니다. 기도는 반드시 응답이 있습니다. 상상치도 못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오늘 함께 본 삼상 22:1-2절에 보십시오.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듣고는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여기 다윗이 어디로 도망을 했다는 말입니까? “아둘람 굴”입니다. 아둘람 굴은 유다광야의 바위산에 있었습니다. 워낙 지세가 험해 사울의 군사들이 쉽게 추적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바위 동굴이라 도망자의 은신처로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이제 다윗의 신세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형국이었습니다. 칠흑같은 좌절감이 엄습해 왔습니다. 시간은 사울편이고, 자신은 철저하게 배제된 느낌에 사로잡히면서 몹시 고통스러웠습니다. 또 지금은 이렇게라도 굴속에 피해 있지만 언제 사울의 군사들이 닥쳐 생명이 위태롭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누가 온 것입니까? 그의 온 가족이 그의 소식을 듣고 그 굴속으로 찾아왔습니다. 남몰래 조심조심 찾아갔겠지요. 다윗이 처음 기름 부음을 받을 때에는 아버지도 형제들도 밖에서 양을 치고 있던 그의 존재를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 속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그의 아비와 가족들을 굴속으로 데려오시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외로운 다윗의 기도를 들으셔서 그와 함께 할 수 있는 자, 그것도 속마음을 내 놓으면서 위로 받을 수 있는 형제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역사하십니다. 아무리 외롭고 힘든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 도움의 손길을 구하고 “하나님만이 나의 분깃이다”라고 고백하며 부르짖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이러한 협력자를 보내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외로움 가운데서 가족을 만난 다윗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상상해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입니다. 2절에 보면 다윗에게로 온 자들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2절에 보면 “환난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사람은 모였는데 참 답답하지 않습니까? 뭐, 좀 멋진 사람들이 와도 힘든 판국에 자기에게로 몰려온 사람들은 오히려 다윗을 위로해 주기보다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아닙니까? 여기 환란당한 모든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인생살이에 평안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 땅에 희망을 두고 싶어도 둘 수 없는 사람입니다. 성경의 원어로 미루어 짐작해 보면 사울의 학정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빚진 자란 나라의 경제 시스템이 잘못 되어 구조적으로 빚질 수밖에 없고 또 그 빚 때문에 가족이 해체되어 도망 다니는 등 보금자리를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또 마음이 원통한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 단어는 한나가 자식이 없어서 원통해 할 때 사용되던 단어와 똑같습니다. 즉 호소할 때도 없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어디 가서 표현할 때도 없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상처받은 사람입니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어떤 일이나 사건이 자신의 상처를 건들게 되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성질을 부리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무엇이 정의며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며 무엇이 가야할 길인지에 대한 지각이 전혀 없습니다. 상처만 건들면 모든 판단력을 상실하여 자기 상처를 주인 삼아 살아갑니다. 이들은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 버림받고 오갈 데 없는 이들을 보십시오. 이들에게 무슨 희망을 노래하고 무슨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지 마십시오. 이 400명의 사람들이 사울의 왕권을 무너뜨리고 다윗 왕조를 창출해낸 주동세력이 되었습니다. 다윗을 위하여 생명을 걸고 싸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단지 정권 창출의 세력 만으로서가 아니라 메시야가 오실 다윗 왕조의 나라를 건강한 정치와 경제, 사회가 되도록 이끌었던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많은 엘리트들이 압살롬에게 합류할 때에도 끝까지 다윗 왕조를 지키고 다시 회복시키는 주체가 되었습니다. 오합지졸의 400명이 어떻게 정권을 창출하고 다스리고, 위기가 올 때마다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들이 되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아둘람 굴에 모인 이들이 다윗과 더불어 무엇을 하였을까요? 그들은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따르는 순종의 영적 훈련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곳 절망과 한숨의 자리에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새로운 역사의 비전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이 당시의 상황이 시편 57편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시편 57:7-8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할렐루야! 이것이 아둘람의 비밀입니다. 다윗은 아둘람에서 꿈을 키웠습니다. 

어둡고 고독한 굴속에서 그는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절망너머에 꿈틀거리는 희망의 아지랑이를 보았습니다. 그러자 절망가운데 모인 사람들이 걱정과 한숨과 근심거리가 아니라 새로운 역사를 열어갈 주역들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환난을 당하고, 빚을 지고 쫓겨다니며,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한 오합지졸들에게서 하나님 나라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절망의 눈빛과 희망의 눈빛은 다릅니다. 절망의 눈빛은 대담한 목표를 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불가능하게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희망의 눈빛은 대담한 목표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헌신 속에 자신을 던지게 됩니다. 비전은 비전을 이룰 수 있는 환경이 완벽하게 준비되어야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낙심 중에, 절망 중에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런던에 한 모퉁이에서 구두를 닦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빚 때문에 감옥에 갇혀있기 때문에 집안 살림을 꾸려가기 위해 구두를 닦아야만 했습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구두를 닦으면서도 소년은 얼굴에 밝은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늘 노래를 부르는데 밝은 노래만 불렀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물었습니다. “구두 닦는 일이 뭐가 그리 좋니” 그때마다 소년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즐겁지요. 저는 지금 구두를 닦고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닦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년이 바로 ‘올리버 트위스트’를 쓴 세계적인 작가 찰스 디킨슨입니다. 아무리 먹구름이 짙어도 그 먹구름 뒤에는 빛나는 태양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의 환경과 여건이 어렵고 힘들어도 그 모른 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어린 찰스 디킨슨이 손님의 반짝 거리는 구두 코 위에서 희망의 별빛을 보았던 것처럼 어렵고 힘든 환경 속에서도 여러분의 희망이신 주님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지금의 어려움을 얼마든지 이겨나갈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은 그 누구라도 불구하고 저 전능하신 여호와의 손길이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한순간도 지탱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다 그렇습니다. 다 괜찮은 모습으로 앉아 있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다 상처가 있어요, 질 그릇 같은 연약함이 있습니다. 그런 소망 없는 내가 누군데 도대체 내가 누군데 그 엄청난 희생의 댓가를 마다하지 않고 나 하나를 구원하기 위해, 나 하나를 당신의 자녀 심기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까지 하시며 우리를 자녀 삼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택한 나를 결코 버리지도, 포기하지도 않으십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깨달을 수 있다면, 지금의 고통, 지금의 상처 좀 견딜만하지 않습니까? 

코리텐 붐이라는 유명한 크리스천 여류 작가가 있습니다. 그녀는 폴란드 사람인데 자서전과 같은 책 <피난처>(the Hiding Place)는 아주 유명합니다. 그녀는 나치 군이 폴란드를 점령하면서 모든 유태인들을 잡아 죽이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네 집에 피난처를 만들어 유태인들을 숨겨 줍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들켜서 나치 군의 포로수용소에 들어갔다가 겨우 살아 나와서 그 이후 자기의 경험을 책으로 담아낸 것입니다. 

그녀의 자서전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고난은 마치 중국식 카페트 같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식 카페트를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데 뒤집어 보면 정말 엉망입니다. 아무런 조화도 없고 정말 지저분합니다. 이렇게 중국식 카페트의 뒷모양처럼 엉망으로 고난을 당하고 두들겨 맞는 것 같지만 그 고난을 뒤집어 보면 아름다운 모습으로 수놓아진 무늬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우연한 고난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당하는 고난도 아닙니다. 고난 속에서 우리의 아름다운 모습을 이끌어 가시고 형성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있는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고난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돛을 제대로 올리고 출항하는 배는 바람을 타고 안전하게 빨리 항해 할 수가 있지만, 돛의 방향을 잘못 잡으면, 바람이 배를 엉뚱한 방향으로 몰아 가 버립니다. 고난을 당할 때 믿음으로 그것을 잘 이용하면 더 전진하고 더 큰 축복을 받을 수 있지만, 고난을 대하는 자세가 잘못되면 고난이 우리를 원치 않는 방향으로 몰고 갑니다. 고난은 그 자체가 크고 작음에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믿음의 태도냐, 아니면 불신앙의 태도냐에 따라서 그 결과가 판이하게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고난 중에 계십니까? 지금 나의 삶이 굴속에 있는 다윗과 그의 무리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소망을 잃고 문제를 안고 계십니까? 삶이 힘들며 절망 가운데 계십니까? 하지만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 앞에 나와서 무릎 꿇고 기도하십시오. 들어 주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생명을 주신 하나님입니다. 그분을 의지하세요. 그분의 손을 붙잡으세요. 굴속에서 기도했던 다윗처럼 소리를 내어서 여호와께 부르짖으십시오. 나의 아픔과 나의 외로움을 다 주님 앞에 내려놓고 대신 그 마음속에 주님을 채우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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