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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문 그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엡 1: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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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 그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엡 1:15-19) 

:15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요즘 여러분은 얼마나 자주 기도하십니까? 여러분이 드리는 기도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이루어지기 원하는 소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기도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 달라는 것입니다. 필요와 부족함으로 가지고 있는 우리들은 하나님께 자신의 소원을 아뢸 수밖에 없습니다. 입을 크게 열고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여러분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기도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기도는 자신의 뜻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무조건 자신의 뜻을 이루어 달라고 떼를 쓰는 것은 영적으로 어린아이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영적으로 성숙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기 위하여 기도하는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은 에베소교회를 위한 사도 바울의 기도입니다. 에베소서는 두 번의 기도(1:17-19, 3:14-19)가 나옵니다. 그 첫 번째 내용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에베소교회를 위한 바울의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사도 바울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런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기도하여야 할 내용뿐만 아니라 우리가 되어져야 할 모습을 발견합니다. 

바울은 기도하기에 앞서 자신이 사람들에게서 들은 에베소교회의 소식을 언급합니다. 이것은 이미 에베소교회가 갖고 있는 자랑스러운 모습입니다. 에베소교회는 이미 어떤 소문이 났습니까?
  

I. 이미  

에베소교회 성도의 소식은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서 로마에 있는 바울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소문은 발이 없어도 천리를 갑니다.

15절 말씀입니다.
:15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바울은 두 가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울이 들은 소식의 첫 번째 내용은 ‘주 예수 안에서’ 그들의 믿음에 대한 소식입니다. 그들이 가졌던 믿음은 ‘주 예수 안에서’의 믿음입니다. 이것은 그들 중에 있는 ‘주 예수를 믿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이들이 인격적으로 개개인이 주 예수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1. 믿음이 소문난 교회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믿음이 소문이 났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당연한 이야기를 점점 찾기가 어렵고 듣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교회가 예배당을 크게 잘 지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어느 교회의 목사님이 설교를 잘한다는 이야기도 듣습니다. 어느 교회는 어떤 프로그램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았다는 자랑을 듣기도 합니다. 예배당의 규모나 목사님의 스타일 또는 교회의 프로그램 그 자체를 무조건 비판하는 것을 삼가야 합니다. 교회마다 사명이 다르고 그릇과 쓰임새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동일하게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생각 없이 관용구처럼 사용하는 말 속에 엄청난 의미가 있는 말들이 많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주 예수’라는 말입니다.

‘주 예수’라는 말은 ‘주님이신 예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주여! 주여!’하는 것은 예수님을 향하여 ‘주인님! 주인님!’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라는 말은 ‘나는 예수님의 종’이라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주인이고 우리가 종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종들인 우리는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주인 섬기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을 향하여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눅 6:46)고 책망하셨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도 오늘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말로는 예수님을 주인님, 주인님 하면서도 정작 주인이신 예수님이 하라고 하시는 말씀은 행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모래 위에 짓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항상 똑같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예수님을 주인님으로 믿고 그 말씀을 따르는 종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고 있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에베소교회가 어떠하였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요한계시록은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 2:3)고 하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는지는 하나님께서도 인정해 주셨습니다.

우리교회의 믿음은 매우 단순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예수님을 주인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다른 그 어떤 사람이나 물건이 주인이 아닙니다. 명예나 이익이나 권력이 주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십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종들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로만 주여, 주여 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주인으로 인생의 종결자로 믿으십시오. 우리교회는 건물이나 사람이나 행사로 소문나는 교회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따르는 사람이라고 소문나기를 원합니다. 전적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것으로 소문난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바울이 들은 에베소 교회의 소식 중의 하나는 ‘주 예수 안에서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무엇이었습니까?

다시 15절 말씀입니다.
:15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바울은 에베소 교회가 모든 성도들을 사랑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여기에서 ‘사랑[ajgavph/아가페]’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 할 때 사용하는 ‘아가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성도들이 서로 아낌없이 돌보아 주는 사랑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2. 사랑이 풍성한 교회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것은 ‘모든 성도를 향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낮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부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믿음이 확실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불확실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인이 있었는가 하면 헬라인이 있었습니다. 유대교에서 개종한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로마의 황제를 숭배하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서로 차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교회였습니다. 

노예가 해방되기 전 미국 남부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흑인 노예 한 사람이 예배당에 들어가려는 참이었습니다. 백인 한 사람이 달려오더니 가로막으며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흑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리, 저는 지금 예배당을 청소하러 온 것입니다.”

백인은 이 흑인을 위아래로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청소하려면 들어가도 좋아. 하지만 기도는 절대로 안 돼!”

예배당에 들어가 청소는 할 수 있지만 기도는 안 된다는 것은 얼마나 웃기는 말입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에서 백인과 흑인을 갈랐습니다. 이것은 백인의 하나님과 흑인의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가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칫 이렇게 가르고 저렇게 가르며 사람을 차별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나만을 위한 사랑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우리 편만을 위한 사랑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사랑하기 좋은 사람들만을 위한 사랑일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일부를 위한 사랑을 더 많이 하면 할수록 교회는 허물어집니다. 일부만을 위한 사랑을 더 높이 쌓으면 쌓을수록 공동체는 무너집니다. 우리가 지향하여야 할 모습은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입니다. 모든 성도를 넘어서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을 지향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사랑할 수 있는데 어떤 사람은 사랑하기가 무척이나 힘듭니다. 잠시 잠깐은 사랑할 수 있는데 계속하여 사랑하기는 정말 힘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사모합니다. 믿음이 주님의 선물인 것처럼 사랑도 주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물만 바라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은 어린 아이의 모습입니다. 더욱이 주님이 명령한 것을 해보지도 않고 계속해서 능력만 달라고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종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 묵묵히 순종할 때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인은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할 때 하나님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교회는 예수님께 대하여 믿음과 사람에 대하여 사랑이 조화를 이루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이 믿음과 사랑은 둘로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사랑할 수 없고 사랑이 없으면 믿음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믿음이 있기에 주인이 명령하신대로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에베소 교회의 믿음과 사랑에 대한 소식을 들은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위하여 어떻게 하였습니까?

16절 말씀입니다.
: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바울은 기도할 때마다 언제나 에베소교회를 기억하였습니다. 그리고 기억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에게 기도할 때 마다 생각나고 생각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더욱이 ‘그치지 아니하다’는 말은 부정에 부정으로 강한 긍정을 말합니다. 그만 두는 것을 그만 두지 않았다는 것은 계속하였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위하여 감사 기도하기를 결코 쉬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3. 감사로 기억되는 교회였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감사하는 사람이 될 것이냐 불평하는 사람이 될 것이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어떤 문제라도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중에도 원불교교인이 있다지요? 여기에 누가 원불교교인입니까? 원망하고, 불평하고 거기에다 교만하기까지 한 교인을 ‘원불교교인’이라고 한답니다. 진짜 원불교 다니는 분이 있다면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교인 중에 원망하고 불평하고 교만한 사람을 꾸짖는 말입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감사하고 기뻐하고 겸손하여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은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다른 사람에게 감사한 사람으로 기억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만난 사람들 중에는 고마움으로 기억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섭섭함으로 기억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면 그런 분은 만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는 분이 있습니다. ‘하나님, 그 분을 만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고 기도하게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하필이면 그런 사람을 만나게 하셨는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시기를 원하십니까? 좋은 사람으로 하나님께 만남을 감사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결코 만남을 후회하게 하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서로에게 감사함으로 기억되는 사람들이 되기 위하여 주인이신 예수님을 믿고 그 말씀을 따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믿음이 소문난 교회, 사랑이 풍성한 교회, 감사로 기억되는 교회. 이만하면 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더욱 나아가야 할 길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II. 더욱  

에베소교회를 위한 바울의 첫 번째 기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바울은 무엇이라고 에베소교회를 위하여 기도합니까?

17절 말씀입니다.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위하여 먼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내려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지혜와 계시의 영은 누구이십니까? 우리는 그 분을 성령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을 깨닫게 하시고 인생에 대한 통찰력을 주시는 영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이신 성령이십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1. 더욱 성령께서 함께 하셔야 합니다.

이미 우리는 앞에서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 믿을 때 약속의 성령으로 도장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믿을 때 성령께서 믿는 사람들과 이미 함께 계십니다. 그런데 다시 성령께서 함께 하셔야 한다는 것은 좀 혼란스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 믿을 때 성령이 함께 계시는 것을 ‘성령의 내주’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더욱 함께 계시는 것을 ‘성령의 충만’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계신 성령으로는 부족하여 더 많은 성령이 우리 속에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신 성령님은 온전하십니다. 그러나 그 성령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심이 더 많아지고 더 넓어져야 합니다.

미국에 먼저 가서 살면서 미국으로 오시는 분들을 대상으로 목회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소위 이민목회자이십니다. 

그 분들의 중요한 사역 중에 하나는 미국으로 이민 오시는 분들을 공항에서부터 돌보는 일이라고 합니다. 요즘은 덜하다지만 한국에서 어떤 분이 미국에 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공항으로 마중 나가는 일부터 한답니다. 당장 갈 곳이 없는 사람은 사택에서 몇 주일씩 함께 지나기도 한답니다. 집을 얻는 일부터 시작하여, 미국 생활에 꼭 필요한 운전면허증을 얻게 하는 일 등등을 도와줍니다. 일자리를 안내하고 미국 생활에 정착하도록 도우며 동고동락한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한국에서 교회를 다니지 않던 사람도 대부분 예배당에 잘 출석한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미국에 처음 와서 목사님의 도움으로 자리를 잡아가면서 열심히 교회에 출석을 하였답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자 자리도 잡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예배당에서 볼 수 없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심방을 가셨답니다.

“요즘 교회에서 뵐 수 없는데 일이 바쁘신 모양이지요?”

“예, 이제 좀 자리도 잡히고 미국생활도 좀 익숙해졌습니다.”

“아무리 바쁘셔도 주일에 교회는 나오셔야지요?”

그러자 그 분이 아주 이상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아직도 교회 나가야 합니까?”

지금까지 어려워서 교회에 나가 도움을 받았고 도움을 받는 만큼 헌금도 드렸는데, 더 이상 교회의 도움이 필요 없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교회에 다녀야 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이미 예수님을 열심히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놓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구원 그 이후의 삶을 위해 더욱 성령의 충만을 사모하셔야 합니다. 믿게 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세상을 꿰뚫어 보게 하시는 눈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구원받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원받은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필요를 위하여 믿는 것에서 나아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하여 믿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사모하십시오.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임하시는 성령을 경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얻는 가장 큰 유익은 무엇입니까? 

17절 말씀입니다.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성령께서 하시는 가장 놀라운 일은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믿음이 소문이 났습니다.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 역시 소문이 났습니다. 그런데 또 이제 와서 하나님을 알게 하신다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미 하나님을 알고 믿었는데 다시 하나님을 알게 하신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앎[ejpivgnwsi"/에피그노시스]은 ‘정확하고 올바른 지식’입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하나님을 더욱 잘 알게 해 주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더욱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2. 더욱 하나님을 알게 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아는 것도 몇 번 만나고 나서 그 사람을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나면서 더 많은 것을 알고 깊게 사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대해서도 더욱 풍성하게 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몇 가지 단편으로 만 아는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더욱 깊이 풍성하게 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뿐만 아니라 질투까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뿐만 아니라 미워하시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온전하게 알아가게 하십니다.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을 더욱 풍성하게 경험하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미 하나님을 믿고 사랑을 실천하시는 여러분, 베드로를 통하여 주신 말씀,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a)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이미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감사로 기억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하나님을 더욱 놀랍고 풍성하게 알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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