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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막 4: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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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뿌리는 자의 비유 (막 4:1-20)
 

하루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에 나가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물 위에 배를 띄우고 그 배에 앉으셔서 해변에 모인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 날 주님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를 말씀하시는 중에 ‘씨 뿌리는 자의 비유’도 들려 주셨습니다.

“3)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뿌릴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5)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치 못하였고 8)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배와 육십배와 백배가 되었느니라 … 9) …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해변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는 호기심을 가지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알아보려고 나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가니 덩달아 나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병 고침을 받기 위해 나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바리새인들처럼 예수님의 언행에서 비방거리를 찾기 위해 나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주님을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모두에게 똑같이 여러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씨를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가서 씨앗이 잘 자라는 기름지고 흙이 깊은 땅 뿐 아니라 씨앗이 잘 자랄 수 없는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이 자라는 곳에도 씨를 뿌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똑같이 씨를 뿌려도 그 씨가 떨어진 밭의 상태에 따라서 결과가 다르듯이, 많은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듣더라도 듣는 사람에 따라서 은혜를 받기도 하고, 시험에 들기도 하고,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을 적에 사람들은 그 비유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무리가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님께서 홀로 계실 때에 제자들이 주님께 나아와 아까 말씀하신 비유가 무슨 뜻인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로써 우리는 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고, 주님과 상관없는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첫 번째 이유는 납득이 가지만, 두 번째 이유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비하신 주님께서 사람들이 진리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 비유를 사용하셨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렇더라도 그 책임이 주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대접을 받는 자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관심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은 복음의 진리를 들어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해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그들 자신의 책임입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심문하는 자리에 앉아서 예수님께 묻기를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하시니, 빌라도가 대답하기를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묻기를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고 하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묻기를 “진리가 무엇이냐?”고 했습니다. 이는, 빌라도가 진리에 대하여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실은 정반대입니다. 그는 진리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만, 도대체 진리가 무엇이기에 목숨을 건단 말인가 하고 비웃는 뜻에서 그렇게 말했을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같은 빌라도의 생각을 아셨으므로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진리가 이런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면 그는 고맙게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진리를 모독하려고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의 질문에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물었을 때는 기꺼이 설명해 주셨습니다.

“14)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15)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16)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17)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18)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19)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20)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씨 뿌리는 자”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가라지 비유’에 보면, “…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37)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이 비유에서도 씨 뿌리는 자는 예수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씨’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석한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34절에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하신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신 분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씨앗에 비유하신 것은 매우 심오한 의미가 있습니다. 씨는 곧 생명을 의미합니다. 씨앗이 비록 작지만 그 안에는 생명이 있어서 적당한 온도와 습도가 주어지면 싹이 나고 자랍니다. 그리하여 때가 되면 결실합니다. 작은 볍씨 한 알 안에 한 포기 벼로서 자라서 삼십배, 육십배, 백배로 결실할 벼의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이는 다른 곡식의 씨앗도 마찬가지입니다.

호박씨는 제법 큼직하지만, 겨자씨는 무우 씨보다도 훨씬 작습니다. 그렇지만 심긴 후에는 빠르게 자라서 4-5미터나 되는 큰 나무처럼 자라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이게 됩니다. 소나무의 씨앗도 매우 작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땅에 심기워서 싹이 나고 자라면 20-30미터까지도 자랍니다. 이처럼 작은 씨앗이지만 놀라운 생명의 작용을 이루어냅니다. 그러므로 씨앗은 적든지 크든지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래는 그 속에 생명이 없으므로 아무리 온도와 습도를 적절하게 맞추어 주어도 싹이 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씨앗과 같아서 그 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 속에서 생명의 작용을 일으켜서 영생의 결실을 맺습니다. 곧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고 새롭게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이르기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말은 생명이 없습니다. 사람의 말은 영적으로 죽은 자를 살려내지 못합니다. 사람의 말은 아무리 사람들을 감동시킬지라도 생명의 작용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은 비유하자면, 생명을 가진 씨앗과 무생물인 모래 알갱이와 같습니다. 따라서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서는 생명의 주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이는 밭에 씨를 뿌리지 않고서 곡식을 거둘 수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성숙하고 삶속에서 선하고 덕스러운 열매를 맺으려면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힘써야 합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단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반드시 믿음이 자라기 마련입니다. 한편, ‘씨 뿌리는 행위’는 전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전도의 열매를 거두려면 먼저 부지런히 씨를 뿌리듯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이든, 돌밭 같은 마음이든, 가시나무의 뿌리가 있는 마음이든, 옥토와 같은 마음이든, 상관하지 말고 말씀의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사람들의 마음 상태가 어떠한지를 겉으로 보아서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이 예수님을 믿을까?” 우려했는데, 의외로 진지하게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 사람은 꼭 믿을 거야” 하고 기대했는데 완강하게 거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리부터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생명의 씨앗인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전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성령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듣는 자들의 심령 속에 새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사람의 마음 상태가 중요함을 일깨워 주십니다. 똑같은 씨를 뿌렸어도 밭의 상태에 따라서 판이한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길가와 같은 데는 씨앗이 떨어져도 발아조차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새들이 와서 씨앗을 먹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좋은 밭에 뿌려진 씨앗은 반드시 싹이 나고 자라 열매를 맺습니다. 이 밭은 곧 우리 각 사람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비유에 보면, 네 종류의 마음이 있습니다. 길 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이 그것입니다. 그러면, 네 종류의 마음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첫째로, 길가와 같은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말씀이 길 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길가란 길 가장자리가 아닌 길 한복판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이 매일같이 밟고 다녀서 시멘트로 포장한 길과 같이 단단하게 되었으므로 씨앗이 떨어져도 흙속에 묻히지 못하므로 새들에게 먹히고 맙니다. 이 비유에서, 새는 사탄을 가리킵니다. 사탄이 하는 일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사탄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만들려고 갖은 수단 방법을 다합니다. 

그뿐 아니라, 사탄은 마음이 완고한 사람의 마음 밭에 뿌려진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채 갑니다. 땅에 뿌려진 씨앗이 싹이 나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한데, 새들이 와서 금세 먹어치우니 씨앗을 뿌리나 마나입니다. 이와 같이 완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어도 무관심하기 때문에 아무런 생명의 작용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마귀가 와서 추후라도 그 사람이 말씀에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빼앗아갑니다. 그리하여 그 사람은 주님을 믿어 구원 얻을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돌밭과 같은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6)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17)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간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라고 하셨습니다. 돌밭이란 암반 위에 흙이 얇게 덮여 있는 밭을 말합니다. 이런 밭은 흙이 깊지 않은데다 햇빛을 받아 암반이 쉬 따뜻하게 덥혀지기 때문에 씨를 뿌리면 금방 싹이 나옵니다. 그러나 흙이 깊지 못해서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못하므로 결국은 결실에 이르지 못하고 맙니다.

돌밭 같은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면 즉시 기쁨으로 받습니다. ‘나도 한번 믿어보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마음속에 회개하지 않은 완악함이 남아 있어서 믿음이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더구나 신앙으로 인해 환난과 핍박이 다가오면 겁을 먹고 넘어지고 맙니다. 쉽게 믿었다가 쉽게 주저앉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뿌리를 내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유명한 전도자가 말하기를 “한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것은 5%의 노력밖에 필요로 하지 않으나 신앙을 갖게 하여 교회 안에서 성장시켜 완전케 하는 데는 95%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오지만 그 가운데 상당수의 사람들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중도에서 탈락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교회에는 따라 나왔으나 아직 죄를 회개하지 않아서 구원 받는 믿음을 갖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처럼 시험과 핍박이 다가올 때 믿음으로 인내하면서 견디지 못하고 금방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맙니다.

햇빛은 농작물이 자라는데 반드시 필요하지만, 뿌리가 없는 식물에게는 치명적입니다. 햇빛이 그 식물을 말라 죽게 하니까요. 이와 같이 시험과 핍박이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린 신자에게는 큰 유익을 주지만, 신앙의 뿌리가 없는 사람에게는 큰 타격을 줍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노라면 때때로 시험과 핍박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합니다. 그리할 때 그 어떠한 시험과 핍박이 다가와도 너끈히 견뎌낼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가시떨기의 뿌리와 덩굴로 뒤덮인 땅과 같은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8)또 어떤이는 가시떨기에 뿌리우는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 19)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라고 하셨습니다. 겉보기에는 좋은 밭처럼 보여도 땅속에 가시나무의 뿌리가 남아있으면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밭에 뿌려진 씨가 싹이 나서 자람과 동시에 가시떨기도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이 때 곡식이 가시떨기보다 더 왕성하게 자라면 그래도 어느 정도 수확을 기대할 수 있지만, 가시떨기의 뿌리가 이미 그 땅에 깊이 박혀 있을 경우에는 곡식보다 더 빨리 왕성하게 자라기 때문에 결국, 식물은 가시떨기에게 기운이 막혀 결실할 수 없습니다. 가시떨기가 자라는 밭은 염려 근심,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 때문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어느 시대나 세상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탐욕은 주님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에 이르기를 “9)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보니,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돈을 사랑할 것이라고 했습니다(딤후 3:2). 오늘날 우리가 바로 이와 같이 사람들이 돈을 사랑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시험에 드는 원인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돈 곧 경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속에 재물에 대한 욕심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지해야 합니다. 그것은 자족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요,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활을 위해 염려하는 자들에게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모든 삶의 염려를 맡길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주장하시고 모든 필요를 채워주셔서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도와주십니다.

넷째로,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배와 육십배와 백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좋은 땅은 겸손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 사람의 마음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늘 자족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므로 세상 욕심이 틈타지 못합니다.

그뿐 아니라, 좋은 땅은 모든 염려 근심을 주님께 맡기고 환난과 핍박을 인내로 이기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씨앗이 뿌려질 때 단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결실을 합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재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2천년 교회사애서 가장 은혜가 충만한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마음 상태가 좋은 땅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행전 2장에 보니 “46)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의 마음은 어떤 종류의 밭과 같습니까? 예수님의 이 비유가 이해가 되신다면 그것은 성도님들께서 들을 귀를 소유한 사람들이라는 증거입니다. 주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들려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항상 은혜 받기에 합당한 마음 상태를 지켜나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농부가 밭에서 돌부리와 가시나무의 뿌리를 제거하고 잡초를 부지런히 뽑아주듯이, 우리도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는 온갖 불신앙적이고 부정적인 것들을 없애 버려야 합니다. 

농부는 잠시라도 방심하면 밭에 잡초와 가시덤불이 무성하게 되므로 추수하기까지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고 수시로 그 같은 것들을 제거하는데 힘씁니다. 히브리서 6장 7절로 8절에 “7)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 각 사람이 어떤 종류의 마음 밭의 소유자가 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각 사람에게 그 책임이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자손을 향하여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 10:12)고 했습니다. 혹 처음에는 길가와 같고 돌밭과 같고 가시떨기가 자라는 땅과 같더라도 회개를 통해서 마음을 갈아엎어서 좋은 땅으로 가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대한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세상 염려, 근심과 유혹, 환난, 핍박 따위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준비된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뿌려지고 성령의 단비가 내리면 곧 싹이 나서 자라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신앙생활의 연조가 오래된 것은 좋은 일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선한 열매를 많이 맺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열매가 있다면 바람직한 일이지만 만약에 아무런 선한 열매도 없다면 우리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열매 맺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즉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성도님들께서는 한분도 빠짐없이 좋은 밭이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대로 순종하여 삼십배, 육십배, 백배로 결실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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