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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궁극적 관계- 하나님과 나의 관계 (시 2: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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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적 관계- 하나님과 나의 관계 (시 2:7-12)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관계성 속에서 살아갑니다. 즉, 모든 사람은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살며, 여러 가지 환경이나 물건과의 관계 속에서 살며, 그리고 대신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대신 관계란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우리가 관계를 가질 때 그 관계가 올바르게 정립되어져야 오랫동안 잘 유지가 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오늘도 예배드리러 이 자리에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로 정립되어 있으며, 어떤 관계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무엇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여러분은 하나님을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본문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성도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시기하며 관계를 깨트리려고 역사하는 사단의 공격이 항상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정신을 차려 올바른 기준을 세워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선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와의 관계 즉,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가족적으로 나의 아버지가 되어 주십니다. 나는 그분의 자녀로 아들, 딸이 됩니다. 할렐루야! 이 사실을 분명하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7절 하 반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낳은 분은 어머님이 되십니다. 그러나 시편기자는 ‘아버지가 나를 낳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어버이날에 부르는 노랫말에도 보면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라고 했습니다. 왜 시편기자가 ‘아버지가 낳으셨다’고 표현하는가 하면 ‘아버지가 씨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도들을 자신의 자녀로 맞아들이시기로 예정하셨습니다. 이 부자 관계는 성도와 하나님과의 궁극적인 관계인 셈입니다. 

예수님도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인정하셨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비둘기 같은 성령이 임하시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14:36절에 보면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기도 하셨습니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끝까지 돌보시고 당신의 아들의 자리에 온전히 앉혀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들의 아버지도 됩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 주신 말씀 갈라디아3:26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참된 아버지, 영적 아버지는 여호와 하나님이 십니다. 이 사실을 믿고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시면 어떤 좋은 일이 있는지 아십니까? 우리와 항상 함께 해 주십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으로 계시는 여호와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시편 기자를 통해서 주신 시121:8절 말씀에도 보면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이 사실을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의 약속은 성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2. 우리를 풍요롭게 해 주십니다. 

부모는 항상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풍성케 해 주십니다. 빌립보서4:18-19절에,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풍성한 삶을 허락하시고 주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창세기27:28절에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기 때문에 우리 아버지 집이 풍성함으로 나도 풍성하게 살 수 있습니다. 

아울러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면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어디를 가든지 보호해 주십니다. 나의 삶이 혹 나의 부주의로 인하여 위기를 맞더라도 보호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저희들을 보호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보호자로 책임을 져 주십니다. 

시편32:7절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우리 아버지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성도들을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시56:11절에 시편기자는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가 되심으로 인해 가장 좋은 것이 있다면, 우리의 허물을 끝까지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계속 죄를 범하면 이것은 자녀라 할 수 없습니다. 한 두 번의 실수와 허물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용서하십니다. 왜냐하면 나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시편86:5절에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아버지는 용서해 주십니다. 그래서 ‘사죄하기를 즐거워 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용서해 주십니다. 다만 자신의 자못과 죄를 고백할 때입니다. 그러나 남의 아버지는 용서가 쉽지 않습니다. 

출애굽기34장 6-7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벌은 면제되지 않지만 죄는 용서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사무엘을 통해서 주신 말씀을 보십시다. 사무엘하7:14절 말씀에,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징계까지 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징계는 하시지만 용서하십니다. 죄를 범함으로 인해 벌은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사함 받습니다. 한 대 맞고 용서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선택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 앞에 나타나실 때 보다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로 나타나시는지 아세요.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십니다. 목자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다윗이 고백한 내용 속에 목자가 하는 일이 다 고백되어 있습니다. 시편23편1-4절 말씀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목자는 양을 보호합니다. 양은 방향감각이 둔한 짐승입니다. 마찬가지로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심은 양같이 인생의 방향감각 없이 아무렇게나 살 수밖에 없는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오늘 말씀8,9절에 보면 ‘양인 성도들을 괴롭히는 이방 나라를 철장으로 깨트리시고 질그릇같이 부수어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떤 대적 마귀라도 무너뜨려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사단의 세력들로부터 우리 성도들을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시편23:4절에 보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목자의 지팡이는 무기입니다. 양을 보호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도우십니다. 보호해 주십니다. 그래서 시편121편에 보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는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이렇게 도우시고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는데 어디로 피하겠습니까? 오직 피할 바위는 여호와 하나님밖에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목자는 항상 양에게 좋은 것을 먹이기 위해 찾아다닙니다. 마찬가지로 목자 되신 여호와 하나님은 양인 성도들에게 좋은 것을 먹여주십니다. 시냇물가로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셔서 먹이십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성도 여러분,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푸른 초장을 찾기 위해서,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산을 넘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큰 계곡을 건너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광야 같은 광활한 사막을 건너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보호하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당장에 목마르다고 해서 하나님이 인도하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는데 40년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너야 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광야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광야였습니다. 목축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나로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결국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목자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안식을 허락주십니다. 그래서 주일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매일같이 일하지 말고 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말씀을 받아먹을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세상에서의 안식은 주일성수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영원한 안식을 맛보게 됩니다. 그것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도록 하시기 위해 목자장이 되셔서 우리로 하여금 쉼을 갖게 하셨습니다. 휴식하도록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교회가 중요합니다. 교회는 쉼의 자리입니다. 예배드리는 것 보다 더 좋은 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보호자가 되시고 목자가 되시는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1: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12:8절에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된 안식은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나올 때는 모든 짐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아니 주님께 다 내려놓으세요. 그럴 때에 예배가 드려지는 예배가 됩니다. 그럴 때에 참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이때에 우리가 고백할 수 있는 것이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입니다. 다윗도 첫머리에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3. 끝으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가 되어 주십니다. 

시106:21절에 “애굽에서 큰 일을 행하신 그의 구원자 하나님을 그들이 잊었나니”

여기서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잊었다고 지적했습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근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가게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한 민족을 형성시켜 애굽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기 위해 온갖 이적, 즉 큰일을 행하셨습니다. 
우선은 10가지 재앙을 내리셔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출애굽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아울러 불어 닥친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애굽의 강인한 군대와 온갖 무기들을 다 홍해바다에 가라앉혀버렸습니다. 그리고 물이 없을 때 물이 나게 하셨고 먹을 것이 없을 때 만나를 아침마다 내려주셨습니다.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할 때에 메추라기를 내려주셔서 먹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큰일을 행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구원자 되심을 확인시켜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무리 강팍한 사람이라고 하나님의 큰일을 경험하거나 이적을 체험하면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가장 큰 구원을 이루어주신 것이 독생자 예수님이 아들로 세상에 오셔서 죄인 된 인류를 구원하여주신 것입니다. 이제 남은 구원이 하나 더 있다면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 거하는 영원한 삶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를 위해 오직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목자장 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해야 합니까?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아니 주님께 부름 받는 그 순간까지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트리려고 하는 세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단은 자꾸만 좋은 관계를 벌여놓고 갈라서게 만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혹시라도 성도 여러분들이 여름을 지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사 소원해지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정립되지 않은 채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 한 번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설정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목자로, 그리고 구원자로 모시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최초로 하나님과 인간을 분리시키기 위해서 사단이 어떤 방법을 사용하였습니까? 에덴동산에서 벗은 몸으로도 수치를 모르고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던 아담과 하와부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단의 대표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간교한 뱀이 하와를 찾아와서 유혹합니다. 사단인 뱀이 하와에게 묻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와가 사단인 뱀에게 말하기를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때 다시 사단인 뱀이 하와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이라고 미혹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하와가 그 열매를 보는 순간에 이런 마음의 상태로 발전했습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6절). 하와는 자기만 먹지 않고 그 열매를 남편 아담에게도 주었더니 아담도 아무런 의심도 없이 열매를 먹었습니다. 그때 이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만들어 입고서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단절입니다. 결국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단절하게 하기 위해 사단은 거짓종교를 믿게 하고 세상 풍속을 쫓게 합니다. 그래서 사단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죄를 자꾸만 짓게 만들려고 합니다. 

요한복음13:2절에 보면 사단은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했습니다. 결국 가롯 유다는 사단의 도구로 전락되어 자살을 하고 맙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과 가까이 있을수록 사단은 더욱 떼어놓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은혜가 많은 곳에 사단의 역사도 강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심지어 사단은 참 아들 되신 예수님도 하나님과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세 가지로 시험했습니다. 

떡으로 시험했습니다. 이적으로 시험을 했습니다. 마지막은 물질로 시험을 했습니다.

지금도 사단은 성도들에게 이렇게 접근해 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로 우선 먹을 양식 때문에 하나님을 저버리게 합니다.

사람들은 이적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큰 이적과 표적을 행하면서 유혹한다고 했습니다. 성전꼭대기에 올려놓고서 뛰어내리라고 했습니다. 발이 다치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음은 돈입니다. 갈수록 세상은 맘몬주의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돈이면 세상이 다 되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어놓고 물질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온 천하를 다 줄 것이니 자기에게 절하라고 합니다. 이것 조심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돈 앞에는 항우장사도 맥을 못 춘다.’고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단에 유혹되어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가 단절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관계가 허술해졌다면 다시 새롭게 관계를 회복하는 9월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을 아버지로, 목자로, 구원자로 섬기는 삶을 살아 인생이 보다 즐겁게, 그리고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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