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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히 13: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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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히 13:10-16)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 땅에서 이상향(理想鄕)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상대적 빈곤감에 만족할 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통치자들마다 개발이니 복지니 하는 미명 아래 대중들을 향해 핑크빛 미래를 장담하지만 정작 자기희생은 뒷전입니다.
"토마스 무어"의 유토피아(utopia-공상적인 이상사회, 이상향)와 "토마스 캄파넬라"의 태양의 도시(La citt & agrave; del sole, 1602)는 초기 이상향(理想鄕-이상적이며 완전한 사회)을 그리는 작품이었습니다.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은 율도국이라는 이상향을 찾아가는 것으로 마칩니다. 조선 중기 실학자 "박지원"은 법고창신(法古創新-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創造)한다는 뜻으로, 옛것에 토대(土臺)를 두되 그것을 변화(變化)시킬 줄 알고 새 것을 만들어 가되 근본(根本)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뜻)을 내세웠으나 그가 지은 허생전은 이상향을 꿈꾸고 있습니다. 

중국의 무릉도원(武陵桃源-세속을 떠난 별천지), 한국의 청학동(靑鶴洞-푸른 학이 사는 마을, 사람의 얼굴에 새의 부리를 달고 다닌다는 새인데 이 새가 울 때는 천하가 태평한다는 상상의 새)도 이상향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파랑새가 있는 곳 등등도 이 땅에 이상향(理想鄕)을 동경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상향을 보다 구체적으로 찾아보겠다는 "마르크스"(Marx Karl, 공산주의 이론가)와 "엥겔스"(Engels Friedrich, 독일 통계학자)와 "레닌"(Lenin, 공산주의 이론가)도 모두 캄파넬라의 "태양의 도시"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후 공산주의자들은 초기 기독교의 활동을 염두에 두고 기독교 정신과는 전혀 다른 분배법칙으로 인민에 의한 복지 이상향을 선전했습니다. 그러나 강제와 폭력으로 이상향을 꿈꾸던 자들은 결국은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킬링필드의 주역이었던 캄보디아 "폴 포트", 독일의 "히틀러", 이상사회를 꿈꾸던 "레닌" 등은 저들이 바라던 이상사회 건설의 기치 아래서 무참히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사회 건설의 염원은 영웅들마다 대중들 앞에 내놓는 단골메뉴를 넘어서 주식(主食)이 되고 있습니다. 
이라크의 "후세인", 리비아의 "카다피" 등 지금도 세계도처에 마수(魔手-음흉하고 흉악한 사람의 손길)의 잔악상을 경쟁하는 독재자들은 자기희생 대신에 대중들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이상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성경적 결론입니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이 땅은 이상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상향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건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상향을 이 땅에 건설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는 곳에 건설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절에 『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43절에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21절에 『 그 열 두 문은 열 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피로써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이 희생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왜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야 합니까? 

Ⅰ. 예수께서 성문 밖으로 나가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13장 12절에 『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영문 밖에서 고난 받으신 것은 우리를 거룩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 『 거룩 』을 뜻하는 하기아세( )는 하나님을 위해 구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밖으로 나가셨다는 것은 유대인들로 구성된 국가교회에 종말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성을 떠나셨을 때 그 성의 멸망을 암시하신 것입니다(눅 23:28-30). 

그리스도는 더 이상 유대인들의 교회 안에 계시지 않으셨습니다(행 7:48). 그들의 집은 이제 황폐하여 버리움을 당했습니다(마 23:38). 
본문 13장 11절에 영문 밖에서 희생제물을 불살라 버린 것과 본문에 성문 밖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병행선상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문 밖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것은 먼저 속죄일의 속죄제를 나타내는 것이고, 그 다음은 거룩한 영역으로부터 버림받는 수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당하신 것은 자기 백성을 거룩케 하기 위한 것입니다.
멸망에 이르지 아니하고 생명을 보존하려고 하면 그리스도를 따라 영문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영문 밖에서 자기 피로써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영문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요한일서 2장 2절에 『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고 했습니다. 
영문 밖으로 나가라고 하신 진정한 의도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물리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도덕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지역적으로 어떤 곳에서 물러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세상 안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 사람들과는 존재론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들과는 이 세상 가치관이나 역사관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따라서 삶의 목적이나 삶의 의의나 만물을 상대하는 방법이나 만물에 대한 감상적 표현도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영문 밖으로 나아가, 그에게 나아가자고 하지 아니하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고 했습니다. 그 차이는 문자적인 것보다 큰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 마음의 위대한 영광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영문 밖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간다는 말은 이전 삶의 자세에서 완전히 돌아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에 『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누가복음 9장 23절에 『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동참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3장 10절에 『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면 핍박은 예비된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고 했습니다. 
영문 밖으로 나아갈 때 반드시,

Ⅱ. 그 능욕을 지고 가야 합니다. 

본문 13장 13절에 『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 영문 』을 "거룩한 곳"으로, 『 영문 밖 』을 "부정한 곳"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영문 밖에서 고난당했다는 말은 거룩한 영역에서 제외되었다는 것과 그리스도 자신이 부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13장 46절에 『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 살찌니라 』고 했습니다. 
신명기 23장 11절에 『 해 질 때에 목욕하고 해 진 후에 진에 들어올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영문은 그 반대가 되었습니다. 전에 거룩했던 영문은 부정하여졌고, 전에 부정했던 영문 밖은 깨끗하여졌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영문에서 쫓겨나서 영문 밖에서 고난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 언약의 영문 안에 있지 말고 새 언약의 그리스도가 계신 영문 밖으로 나아가야합니다. 
그런데 영문 밖으로 나가는 자들은 그 능욕을 지고 가야합니다. 여기서 『 그 능욕 』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능욕"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하기 위해서는 그가 받은 능욕을 지고 가야합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와 동일한 고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7절에 『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운다고 했습니다(골 1:24). 

베드로전서 4장 13절에 『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1장 29절에 『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5절에 『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고 했습니다. 
결정적으로 고난에 대한 보상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에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롬 8:18).

사도 바울은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12절에 『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받은 그 능욕은 이방인들에게는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기 위해서는 그가 받은 고난과 수치에 동참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0장 37-38절에 『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고 했습니다. 
왜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야 합니까?

Ⅲ.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13장 14절에 『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라고 했습니다.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다"는 말은 이 땅에는 일시적인 도성만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생활하는 공간일지라도 여기는 영구한 도성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소망하는 장차 올 도성은 일시적으로 있다가 없어지는 도성이 아닙니다. 장차 전개되는 우리의 도성은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친히 경영하시는 터가 있는 도성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0절에 『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6절에 『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이 도성이 하늘의 도성입니다. 우리는 이 도성의 시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땅의 도성에 대해 절대적 사고나 영구적 사고를 가지지 아니합니다. 
그야말로 나에게 주어진 시간, 나에게 주어진 공간을 나그네적 사고로 상대하는 것입니다. 나를 포함해서 나의 자식, 나의 부모일지라도 말입니다.

영구한 도성이 없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찾는 장차 올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여기 도성이라는 말이 은유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땅에 있었던 가인이 쌓은 에녹성을 포함해서 모든 성은 다 무너졌습니다.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고 했습니다(고전 7:31).
『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라는 말은 우리가 여기서 영구한 도성을 갖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장차올 것은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는다는 말에서 "찾는다"는 말은 매우 강한 의미입니다. 

이 말은 마태복음 6장 32절에 『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고 한 말에서 사용된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느 한 곳에 목적을 두고 간절한 노력과 지칠 줄 모르는 열심으로 찾는 것을 뜻하는 어휘입니다. 
그 말이 "힘쓰라"로 번역되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1절에 『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얻기만 한다면 그 어떤 일도 힘들게 생각하거나 희생이라고 생각하거나 손해라고 생각지 아니합니다. 
빌립보서 3장 8절에 『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 일에 대하여 비교가 될 수 없을 만큼 큰 보상이 있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늘나라 영광나라"라는 CD를 3년 전 어느 날 이 집사가 유학가기 전 저에게 사 가지고 왔습니다. 제가 부탁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집사는 제가 좋아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사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차에서 그 노래를 수없이 들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좋아 했으면 저의 어머니 발인식때 우리교회 찬양대가 이 곡을 부를 정도였습니다. 

저는 그 CD를 미국에 있는 전집사에게 주고 왔습니다. 그 후로 CD를 구할 길이 없었습니다. 
지난 주일에 그 CD를 박 집사가 구해 왔습니다. 저는 박 집사에게 부탁한 일이 없습니다. 청년들이 저에게 CD를 사온 것은 일차적으로 제가 좋아할 줄 알고 사왔을 것입니다. 그 다음은 그 노래가 저의 정서에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온 것이 분명합니다. 또 지난 주일에도 이정민 집사가 6개나 사왔습니다.
이들 젊은이들은 저를 잘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나그네의 삶의 철학이 잘 훈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믿음을 통해서, 소망을 통해서, 사랑의 역사를 통해서, 순종을 통해서 영문 밖으로 예수께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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