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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요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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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요 11: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아프리카 개척자 중에 영국의 두 탐험가가 있었다합니다. 로드와 리빙스턴이라 합니다. 로드는 아프리카에 황금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을 노예로 사로잡아 갔다합니다. 또 엄청난 황금을 본국으로 가져갔다합니다. 국민들은 세상을 위해 일하는 로드를 영웅으로 우러러보았다합니다. 

반면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에 복음 전쟁을 일으켜서 수많은 사람을 사단의 노예에서 해방시켰다합니다. 그리고 황금을 본국으로 가져가는 대신 아프리카 영혼의 문제를 가져갔다합니다. 또 본국이 아프리카를 침략하는 것을 반대했으니 국민들은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리빙스턴을 눈에 가시로 여겼다합니다. 많은 세월이 지나간 지금 로드는 죽었고, 그의 무덤은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합니다. 리빙스턴 역시 죽었지만 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혀 있고, 오늘도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합니다. 

베다니 마을의 나사로와 그 형제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었고, 예수님이 즐겨 찾으신 집이었으나 그의 가정을 묘사하면서 “병든 자”로 소개합니다.
나사로의 병 때문에 예수님께 기별을 했으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병이라고 말씀하신 후 바로 방문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나사로의 죽음 소식을 들은 이후에야 일어서는데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하시면서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14절), 그러므로 이것은 예수님의 능력과 긍휼 앞에서 죽음의 문제가 극복될 수 있음이 암시적으로 보여집니다.

그런데 17절에 와서“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는 표현에서 절망적인 상황으로 묘사됩니다. 팔레스틴에서는 흔히 사람이 죽으면 시신의 부패 때문에 당일 장사 지냈던 평민들의 장례의식에서 보면 ‘나흘’은 완전히 끝난 시간이었다합니다.

신앙과 불신앙, 가능과 불가능이 계속해서 대조되는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23절)고 말씀하시고,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25-26). 이것은 무덤 앞에서 다시 한 번 강조되면서 (40절) 돌을 옮겨 놓을 것을 명하십니다.

25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실 때 부활과 생명이라는 단어에는 각각 관사가 사용됨으로 예수님만이 유일하신 부활이며 생명이심을 강조하는 어법을 사용하고 있음이 특징적이다 지적을하기도 합니다. 주님은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을, 불신앙의 자리에서 믿음을 불러일으키십니다.

나사로의 가정이 이어지는 고난의 고개턱에서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어렵게 살아왔습니다. 이제 성장하여 삼남매가 아름다운 인생을 꿈꾸면서 오순도순 살아가는데, 겨우 살 만하게 되자 가장이었던 오라비가 병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고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초청해 놓고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렇게 마지막 순간을 긴 기다림과 두려움 속에서 보내다가 나사로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도무지 그 죽음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넋을 잃고 앉아 있었습니다. 기가 막히고 암담하기만 했고, 심술 사나운 돌풍이 계속해서 장난을 걸어오듯 갈수록 상황은 어렵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병들어 죽을 지경에 놓였고, 예수님의 기도라도 받고 싶어서 급한 전갈을 보냈지만 웬일인지 예수님은 나사로가 다른 곳에서 시간을 다 보내시고 오시지 않다가 죽은 다음에야 찾아오셨습니다. 기왕 살려 주시려면 죽기 전에 그리하시는 것이 낫고, 기왕 도와 주시려면 망하기 전에 그리하시는 것이 좋은 것인데 주님은 그리 하지 않으셨습니다.

가난하지만, 어려웠지만 삼남매가 서로 의지하면서 이날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셔서 늘 즐겨 찾으시던 가정이었습니다. 그들 또한 예수님을 참 사랑했던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려움이 왔습니다.  
  
몸이 병들었습니다. 죽음까지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의 눈을 열고 보면 거기에는 깊은 주님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시간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훨씬 나중에 나사로의 가정에 찾아오신 장면을 이렇게묘사하고 있습니다.

“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17) 

병에 걸린 젊은 나사로는 예수님이 그 집에 당도하였을 때는 이미 세상을 떠난 이후였습니다. 장례를 치룬 지 나흘이 지났습니다. 중동에서는 사람이 죽고 나면 무더운 날씨 때문에 당일에 장례를 치른다합니다. 무더운 날씨 때문에 부패가 빠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나흘이라.”는 표현은 죽은 시신의 부패 정도가 아주 심했을 시간, 모든 것이 끝난 시간임을 암시합니다. 여기에서 “죽었다.”“ 이미 4일이 지났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39절)와 같은 표현들도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모두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이 끝난 것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아쉬움에 그렇게 외치기도 합니다. “주님이 여기 계셨다면…….”그러나 이 또한 이미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안타까움에 젖은 소리일 뿐입니다. 이렇게 죽음이 결정된 시간, 예수님이 찾아오시어 이 안타까운 사실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위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분명히 이 소식을 들으셨고, 부탁까지 받으셨을 텐데 장례를 치르는 날도 오지 않으셨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심방은 커녕 전화 한 통화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지극 정성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모셨는데 장례가 났는데도 한번 와보시지도 않으신 것입니다. 섭섭했습니다. 그리고 장례를 다 마치고 났는데 그때서야 찾아오셨습니다.
그 섭섭한 마음 때문인지 마르다는 겨우 일어나 영접하지만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고 합니다.
마르다는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지 않아서 우리 오라비가 죽었다는 소리입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느끼는 인생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리라.”(23)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죽은 후에도, 무덤에 장사된 이후에도, 4일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어도, 무덤 문이 굳게 돌로 막아져 있어도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안 된다고 말하는데 예수님은 살아나리라고 하십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고 예수님이 그리하지 않으시면 결코 먼저 포기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신앙인입니다.
  
마르다, 마리아 자매는 공통적으로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21, 32절). 주님은 못하실 것이 없다고 믿었던 상당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주님께서는 요구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죽음으로 인한 낙망의 현장, 무덤 앞에서 그들에게 요구하셨던 것이 있었습니다.

25절 26절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무엇을 요구하신 것입니까? 믿음이었습니다.
무덤 앞에서도 이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십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40절)
  
이런 말씀 하실 필요 없이 주님이 일단 살려 놓으시면 보고 믿을텐데 주님은 믿음을 먼저 요구하고 계십니다. 기적이 있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직 끝내지 않은 일에 미리 끝내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겠느냐?”는 요청이었습니다.
지금은 교회 이름을 바꾸었지만 오래 전 연예인 교회가 시작되던 때 주일 오후에 연예인들이 목사님과 함께 성경공부를 했다고 합니. 그날 성경공부 내용은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말씀이었답니다. 목사님께서 열정을 다하여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해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때 뒤에서 한 젊은 연예인이 손을 번쩍 들더니 이렇게 말하였다합니다. “목사님, 농담하지 마세요. 어떻게 처녀가 아기를 낳아요? 그런 얘기는 그만하시고 예수님께서 좋은 말씀 많이 하셨잖아요. 그런 말씀이나 가르쳐 주시지요.” 

그러자 목사님께서는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신 것을 믿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더 자세히 설명했지만 그 연예인은 그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계속 반문을 하자 분위기가 갑자기 이상해졌다합니다. 그때 구봉서 장로님이 벌떡 일어나 상기된 얼굴로 그 후배 연예인을 향하여 이렇게 소리를 쳤다고 합니다. “야, 임마! 마리아의 신랑 요셉도 그 사실을 다 믿었는데 네가 뭔데 안 믿어?”
성경에는 이성적으로,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참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 지혜로 이해되기보다는 경험되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동정녀 탄생과 같은 교리도 그냥 이성적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지 모르지만 믿음생활을 하다보면 더한 일도 못하실 것이 없으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죽은 자가 어떻게 살아날 수 있느냐고 의문을 제기하지만 믿으면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주님은 죽은 자가 어떻게 살아날 수 있느냐를 논쟁하시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속에서 구원을 일으키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수족이 묶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풀어 해방시키기 위해서 오셨음을 이 사건을 통해 보여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것은 나사로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그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누구에게나 이 사건이 일어날 것입니다. 아직 그 일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11절에서 주님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말씀하시면서 베다니를 찾아가십니다. 제자들이 오해하자, “나사로가 죽었느니라.”(14)고 말씀하십니다.

주님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나흘이라는 시간이 지난 다음에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그들의 믿음을 일깨우십니다. 그런 연후에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가십니다. 무덤 앞에서 말씀하십니다.
“돌을 옮겨놓으라.”사망의 권세에 가두어 버리는 돌, 생명력 넘치는 삶으로부터 차단해 버리는 돌, 모든 가능성을 막아 버리는 돌을 옮겨 놓으라. 오늘 우리 삶에도 이런 돌들이 놓여 있을 수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나 감격이 없고, 말씀을 들으나 깨달음이 없고, 영광의 자리에 나와 있으나 아무런 느낌이 없이 그냥 앉아 있게 하는 우리를 가로막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역사, 주님의 영광, 주님의 능력이 드러나기 위해서 먼저 옮겨 놓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덤 앞에서 주님은 아주 큰 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나사로야, 일어나라! 나사로야, 나오라!”“주님이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더라.”(44)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말씀하시니 죽은 자가 일어나 걷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 앞에서 죽은 자가 일어나 걷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랐으며 감격스러웠을까요? 마리아, 마르다 자매의 얼굴 표정을 읽을 수 있겠는가요? 다시 살림 받은 나사로의 표정은 어떠했을까요? 저들의 감격의 소리, 외침의 소리, 탄성의 소리, 찬양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요?“

그들의 인생은 완전히 끝났다고 절망한 인생에서 이제 되었다는 인생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진정한 신앙생활이 시작됩니다. 여기에서 진정한 예배가 시작됩니다. 여기에서 진정한 찬양이 시작됩니다. 여기에서 진정한 섬김이 시작됩니다. 모든 것이 끝난 자리, 슬픔과 아픔으로 마칠 수밖에 없는 삶의 자리에 주님이 들어오시니 문제가 해결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노래는 달라집니다. 그들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그들의 예배는 달라 집니다. 그들이 하는 일도 전혀 달라집니다.

거기에 주님이 계셨기에, 주님이 계신 곳에 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진정한 삶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죽은 자가 살아나고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니 활동도 합니다.

“나사로가 살았다!”“오라버니가 살았다!”“아니 죽은 자도 살아나다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 

얼마나 감격이 되었을까요? 
주님은 사단의 영에 사로잡혀 동인 것과 같은 삶을 살고 있던 우리들, 진노의 자녀들로서 동인 것과 같이 살아오던 우리를 풀어놓아 다니는 인생으로 바꾸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놀라운 사역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나사로는 죽을 육신을 살림 받았으나 우리는 영육이 함께 살림을 받았습니다.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통해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으니 주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주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살립니다. 복음은 죽은 영혼을 살립니다. 복음은 병든 영혼도, 상처난 삶도 고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요? 무덤 이후의 삶을 나사로는 어떻게 살았을까요? 하루하루 감격 속에서 살지 않았을까요? 죽었던 생명을 살려 주신 그 은혜에 감격하며 살지 않았을까요? 
놀라운 복음의 능력으로 새 생명 받고 오늘도 회복하시며,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경험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이후, 복음을 체험한 이후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요?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롬 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그러나 사실 이 고백은 사도 바울만의 고백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고백입니다. 화인 맞은 양심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인간은 모두 이 고백을 자기의 고백으로 인정할 것입니다. 문제는 그러면 죄에서 누가 해방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미 죄에 팔려 죄의 권세 아래 들어갔기 때문에 스스로 자유할 능력이 없습니다. 따라서 누군가 죄의 권세밖에 있는 죄의 권세보다 더 능력 있는 권세자가 해방시켜 주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분을 예수 그리스도라 고백합니다.

(롬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죽은 자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산 자는 움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움직임이 없는 성도는 죽은 성도입니다. 생명이 있는 성도는 반드시 활동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복음을 전파합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에게 공통되게 위임된 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막 16: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구원 얻은 사실이 너무 감격스러워 이웃에게 이 귀한 사실을 알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전하는 일에 대하여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고 하면서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 9:16)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성도의 마음이요 자세입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 얻은 우리는 모두 나사로와 같은 존재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두 번 태어난 존재요 새 생명을 부여받은 존재입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자신의 육체적 욕망의 만족을 얻기 위해 살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생명의 소속은 이제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유명한 가수이자 배우였던 에텔 워터스(Ethel Waters, 1896~1977)가 자신의 삶에 대하여 다음 같이 고백하였다합니다. “내가 유명한 가수이자 배우로서 인기절정에 달하였을 때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명예도 인기도 돈도 누렸습니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 받는 사랑은 내 마음 속 깊게 도사린 고독을 풀어주지 못하였습니다. 그 시절의 나의 마음은 언제나 겨울이었습니다. 지금의 나는 인생의 후반기에 들어선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예전에 남들이 부러워하였던 것들 중에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 속은 생기가 차고 넘침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감사드릴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나이 40이 지나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스도께 내 전부를 내어 맡기자 그분은 나를 부수어 다시 빚으셨습니다. 그 후로 나는 고독이라는 병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지금의 나는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웃습니다. 지금 내 마음은 푸른 젊음 그 자체입니다.”

나사로를 살리시고 풀어 놓아 다니게 하시고 에텔 워터스에게 풀어 다니게 하사 새로운 기쁨을 주시고 웃음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에게 모든 동인 것을 풀어 다니게 하시는 은총으로 함께 하시는 줄 믿습니다. 이 사실을 바로 믿고 사명 감당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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