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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안다 (마 12:3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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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를 보아 나무를 안다 (마 12:33-37)


[“나무가 좋으면 그 열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그 열매도 나쁘다.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악한데, 어떻게 선한 것을 말할 수 있겠느냐?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선한 사람은 선한 것을 쌓아 두었다가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것을 쌓아두었다가 악한 것을 낸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은 심판 날에 자기가 말한 온갖 쓸데없는 말을 해명해야 할 것이다. 너는 네가 한 말로, 무죄 선고를 받기도 하고, 유죄 선고를 받기도 할 것이다.”]

• 가을 서정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세상은 소란해도 하나님의 시간은 어김없이 진행됩니다. 42년 철권통치를 했던 리비아의 카다피가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민중의 힘은 참 무섭습니다. 평상시에는 속기도 잘하고, 욕심을 부리기도 하고, 억지를 쓰기도 하지만, 그들이 한 마음이 되면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곤 합니다. 열흘 붉은 꽃이 없고(花無十日紅) 십 년 세도 없다(權不十年)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정말 잘 사는 것은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어 자기 삶의 속도를 조정할 줄 아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요즘 집에서 교회를 오가며 남의 집 담장 안에 있는 감나무를 유심히 살핍니다. 희고 작은 감꽃이 지고 난 후 조그마하게 맺힌 감 열매를 본 게 엊그제 같은 데, 벌써 감은 주황색으로 변해가고, 햇살이 좋은 곳에 있는 것들은 벌써 주홍색으로 물이 들었습니다. 감나무 잎도 차츰 누런 물이 들기 시작하고, 더러는 떨어지기도 합니다. 잎이 지면서 드러나는 푸른 하늘과 주홍색의 대비는 한국의 가을을 더욱 아름답게 만듭니다. 

가을이면 노란색과 붉은색이 세상을 가득 채웁니다. 어쩌면 그게 완성의 색깔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무 가득 열린 과일을 보노라면 절로 마음이 풍요로워집니다. 시인 오세영 님은 둥글둥글한 열매에 온통 마음을 빼앗긴 것 같습니다. 그는 시인다운 상상력으로 묻습니다. “세상의 열매들은 모두/둥글어야 하는가./가시나무도 향기로운 그의 탱자만은 둥글다.” 땅을 파고드는 뿌리도, 하늘로 뻗어가는 가지도 뾰족하지만, 스스로 익어 떨어질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참 신기합니다. 탐스런 열매를 자꾸 보면 모난 우리 마음도 둥글어질 것 같습니다.

이렇게 열매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성경에 ‘열매’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은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함 같다고 말합니다. 잠언은 도처에서 선한 사람은 열매 맺는 말을 하여 좋은 것을 넉넉하게 얻는다고 말합니다(잠12:14. 13:2). 에스겔은 성전에서 솟아난 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종류의 과일 나무가 자라고, 그 열매가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겔47:12). 세례자 요한은 자기 앞에 나오는 사람들을 향해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으라”고 일갈합니다. 

인생의 보람은 어떤 열매를 맺느냐에 달려 있다 하겠습니다. 지금 어떤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그 열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이웃들에게도 유익이 된다면 우리는 복된 인생을 살고 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좋은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은 참 간단합니다. 나무가 좋으면 열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열매도 나쁩니다. 이 간단한 말씀을 우리 삶의 구체적인 맥락 아래 놓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 맥락을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런 결론을 내리시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어느 날 사람들이 귀신이 들려서 눈이 멀고 말을 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께 데려 왔습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시자 그는 말을 하고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목격한 사람들은 놀라움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이 사람이 다윗의 자손이 아닌가?” 하고 수군거렸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 속에는 ‘메시야’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그런 상황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 사람이 귀신의 두목 바알세불의 힘을 빌지 않고서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할 것이다” 하며 딴죽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악한 마음을 아시고,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갈라진 것이고, 그렇다면 그 나라가 설 수 없을 것이 아니라고 단언하십니다. 당신이 귀신을 쫓아낸 것은 하나님의 영을 힘입은 것이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놀라운 말입니다. 귀신은 사람의 생명을 어떤 형태로든 짓눌러 온전한 생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세력입니다. 

귀신은 우리의 지식이나 감정이나 의지에 깃들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도록 만듭니다. 귀신에 들리면 마땅히 해야 할 말은 하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게 되고, 마땅히 들어야 할 것은 듣지 못하게 하고 듣지 않아야 할 것은 듣게 합니다. 귀신들림이라는 게 신화적 세계에서나 통용되는 말처럼 생각하는 이들도 있지만, 성서가 말하는 귀신들림을 광의로 해석하자면 현대인들은 어쩌면 태반이 귀신에 들려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바리새파 사람들은 귀신에 짓눌렸던 사람이 온전한 사람으로 회복되는 사건을 보았으면서도 왜 엉뚱한 결론을 내린 것일까요? 예수라는 존재를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자기들의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들이 죄인이라고 규정한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고, 자신들이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는 율법 조문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더욱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자기들의 기득권을 빼앗기라도 한 것처럼 예수를 미워합니다. 

교회 전통이 가르친 일곱 가지 죄의 뿌리 가운데 하나인 ‘인색함’은 물질적인 차원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을 긍정하고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마음도 인색함입니다.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일수록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데 인색합니다. 마지못해 그를 인정한다 해도 언제나 유보조건을 달곤 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길 줄 압니다. 그는 기꺼이 자기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남에게 배우려 합니다. 하지만 미성숙한 사람은 남을 비방함으로 자기를 높이려 합니다. 그의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얕은 마음을 다른 사람들은 다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만 모를 뿐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해 우리가 세상에서 짓는 어떤 죄도 다 용서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영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고 엄중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로막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 무엇을 쌓고 있는가

나무가 좋으면 그 열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그 열매도 나쁘다는 말씀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입니다. 당연한 인과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리새파 사람들이 나쁜 나무라는 사실을 예수님은 통절하게 지적하고 계십니다.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안다 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맺은 열매는 위선이요, 자기 의요, 하나님의 자유로운 활동을 가로막으려는 적대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수술 칼을 들이대듯 그들을 향해 외치십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무서운 욕입니다. 욕쟁이 할머니도 이렇게까지는 하실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듣는 당사자들도 놀랐겠지만 둘러선 군중들은 더욱 놀랐을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을 볼 때마다 왠지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는데, 그들의 위선과 불신앙을 거침없이 폭로하는 예수를 보며 그들은 당황했을 겁니다. 갑자기 딛고 서있던 터전이 흔들리는 것 같은 충격이었을 겁니다. 예수에게 ‘적당히’는 없습니다. 두루뭉실하게 이야기해서 듣는 이도 말하는 이도 크게 불편하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예’와 ‘아니오’가 분명합니다. 진리의 제단 앞에 자기를 바친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저를 비롯한 이 땅의 설교자들이 명심해야 할 대목입니다. 

사람은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입니다. 우리가 사람들과 만나 무심코 내뱉는 말 속에 우리 인격과 진심이 담겨있게 마련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혹은 들려주기 위해 잘 가려 뽑은 말은 진실을 가리는 가면일 때가 많습니다. 평소에 자기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으면서 교양인으로 처신하던 사람이 무심코 내뱉는 말에 놀랄 때가 있습니다. 인종차별적인 언어, 성차별적인 언어, 지역차별적인 언어 때문입니다. 

“선한 사람은 선한 것을 쌓아 두었다가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것을 쌓아두었다가 악한 것을 낸다.”(35)

당연한 듯 보이지만 이런 통찰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정말 인간의 속을 훤히 꿰뚫고 계신 분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마음에 무엇을 쌓으며 살고 있습니까? 쌓은 것이 말이 되어 나타납니다. 불평과 불만 그리고 비평의 언어만 쏟아내는 이들도 있습니다. 때로는 비평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상대에 대한 비난이나 인격 모독이 되면 안 됩니다. 그런가 하면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은 데도 기쁨과 감사의 말을 하며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똑같은 물을 마셔도 뱀은 그것으로 독을 만들고 양은 젖을 만듭니다.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만 구원함을 얻는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우리가 하는 어떤 행위도 구원을 보증해 줄 수는 없습니다. 행위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도 옳습니다. 우리의 삶이야말로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척도입니다. 매사에 성실하고 공경하는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입니다. 말끝마다 ‘할렐루야’를 달고 살면서도 다른 이들을 무시하는 이들 속에는 하나님을 위한 자리가 없습니다. 잠시 동안은 말로 행동으로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에는 본색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상차림을 보면 주인의 살림 솜씨를 알 수 있지만 설거지하는 모습을 보면 그의 사람됨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안에 있는 게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자꾸 자기를 닦고 또 닦아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 말에 대한 책임

예수님의 말씀은 이제 아주 무서운 경고로 이어집니다. 어쩌면 이것은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며 살도록 선고받은 모든 이들의 운명인지도 모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은 심판 날에 자기가 말한 온갖 쓸데없는 말을 해명해야 할 것이다. 너는 네가 한 말로, 무죄 선고를 받기도 하고, 유죄 선고를 받기도 할 것이다.”(36-37)

여기서 말하는 ‘쓸데없는 말’은 진실하지 못한 말, 빈 말을 뜻합니다. 우리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습니다. 소크라테스도 자기가 다른 아테네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자기가 무지하다는 사실을 안다는 사실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거울을 통해서 보듯 희미하게 볼 따름입니다. 부분 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늘 겸허히 자기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자기 확신에 찬 사람은 씩씩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오류의 가능성도 큽니다. 그렇다고 하여 매사에 회의적인 자세로 살라는 말은 아닙니다. 옳다고 판단되는 일을 확신을 가지고 하되, 내가 그릇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늘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 확신이 배타로 이어지면 안 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자기들과 다른 방식으로 믿고 사유하는 예수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악하다’고 하십니다. 한자로 惡은 ‘버금 亞’자와 ‘마음 心’이 결합된 단어입니다. ‘亞’자는 본래 등뼈가 구부러진 것을 그린 것으로 처음부터 보기 싫은 것, 흉한 것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여기에 ‘마음 心’을 덧붙인 것은 가장 보기 싫은 것은 마음에서 나온다는 뜻일 겁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꼿꼿하게 일어설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그 마음이 구부러져 다른 것들을 향할 때 우리는 악한 자가 되기 쉽습니다. 악한 마음에서 악한 말이 나옵니다. 남을 부정하고, 미워하고, 헐뜯는 말 말입니다. 말은 본래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다리인데, 오늘 세상에서 유통되고 있는 말은 오히려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불화의 골이 깊어지도록 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말을 부리며 사는 이들로 인해 세상은 지금 어지럽습니다. 정치인들의 말, 종교인들의 말이 특히 그러합니다. 세워주고 감싸주고 북돋고 축복하는 말보다, 할퀴고 물고 헐뜯고 모욕하고 조롱하는 말들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이번 선거전을 보면서 마음이 씁쓸해지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말이 타락하면 사람들 사이의 신뢰가 사라집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 말에 대해 물으실 것입니다. 말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사회도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물론 말이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마음이 먼저 새로워져야 합니다. 어쩌면 이 둘은 상호작용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돌아보십시오. 우리는 지금 어떤 열매를 맺으며 살고 있습니까? 둥글고 원만하여 사람들에게 두루 기쁨을 주는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생명의 기운을 북돋고, 평화의 분위기를 만드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불화를 만드는 사람입니까? 돌이켜 우리 마음을 주님께 비끌어 매십시오. 고쳐주시고 싸매주시는 주님의 품에 안기십시오. 서로의 부족함과 허물을 사랑으로 감싸 안는 품 넓은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동참하십시오. 상한 이들을 돌보고, 귀신을 내쫓고, 소외된 이들의 벗이 되는 일을 망설이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 주님의 은총으로 마음이 두루 원만해져 세상을 사랑으로 감싸 안는 사랑의 사도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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