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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최고의 은사, 사랑 (고전 1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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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은사 (고전 13:1-13)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은사와 교회 안에 세워진 여러 가지 직분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고전 12:7절에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신 말씀처럼, 성도들의 신앙에 유익과 교회의 유익을 주시기 위해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교만해지거나 은사를 함부로 남용하여 질서를 깨뜨리는 일을 삼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사가 다양하게 나타났던 고린도교회는 성도들 사이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 12:4절에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다”고 하여 은사는 다양하지만 주신 이는 하나님 한 분이시며, 한 성령을 통해 역사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결론적으로 고전 12:31절에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강조한 더욱 큰 은사는 무엇이며, 제일 좋은 길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오늘 본문 13장에 나오는 사랑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말씀 중에서 마지막 결론으로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 중에서 사랑이 제일이라는 말은 다만 그 순서에서 제일이라는 말이 아니라, 다른 것보다 더 크고 중요하다는 뜻이 담긴 말입니다. 즉 믿음도 크고, 소망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가장 크고 중요한 것은 사랑이란 뜻입니다. 한마디로 사랑이 없는 은사는 아무런 유익도 없고 가치도 없음을 강조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입을 열 때마다 그토록 믿음을 강조하던 사도바울이 왜 사랑이 제일이라고 했을까요?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사랑의 중요성을 깨닫고 사랑이 충만한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1. 모든 은사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3절 말씀에 보시면 사도 바울은 당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중요한 은사라고 보고 있던 ‘방언, 예언, 믿음, 구제’를 대표적으로 열거하면서 예를 들고 있습니다. 

먼저 1절에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이란 방언을 위시하여 그 외에 교회 안에서 교인들의 입을 통하여 나오게 되는 모든 종류의 말을 총망라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방언의 은사를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관계로 방언을 받은 자와 못 받은 자 간에 갈등이 생김으로 적지 않은 시험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단도직입적으로 아무리 방언의 은사, 심지어 천사의 말을 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요,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 말은 사랑 없는 기도와 말은 오히려 교회를 시끄럽게 하고 어지럽히게 된다는 경고입니다. 

교회는 자기가 받은 은사나 직분을 따라 여러 종류의 말이 있을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말들이 만약 사랑이 없으면 오직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로 그저 남의 귀를 괴롭게 하고 교회를 시끄럽게 하는 잡음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절에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라는 말은 그야말로 신앙의 지적문제에 있어서 완전 통달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예언하는 은사가 있어서 다른 사람이 모르는 비밀이나 지식을 알 정도의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러나 사랑이 없다면 영적으로 보는 대로, 아는 대로 남의 허물이나 비밀을 다 떠들고 다니므로 상대방이 상처를 받고 실족한다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그러나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을 수 있습니다. 

또한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을 두 종류로 설명을 하는데,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믿음은 ‘능력을 행하는 믿음’으로 은사로서의 믿음이 있습니다. 여기서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란 특별 은사로서의 믿음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이런 특별한 능력을 행할 수 있는 믿음의 은사 역시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사용하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단어는 ‘중요하지 않는 존재’라는 정도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그 존재 자체가 ‘무의미한, 있으나 마나 한 사람, 아니 오히려 없어야 할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이 자기가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때에 어떤 사람들은 와서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라고 합니다. 그 때에 주님은 분명히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열심히 충성하고, 능력 있는 모습을 나타냈을지라도 진정한 사랑의 자세로 하지 않았다면 주님은 인정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3절에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놀랍게도 이런 완벽하게 보이는 헌신적인 구제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가진 모든 것으로 열심히 구제하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또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희생적인 자세야 말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혹 여러분들 중에는 “아니, 구제나 희생이 사랑이 없이도 할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의 명예나 부를 과시하기 위해서, 혹은 자기의 의를 과시하기 위해서 구제나 희생을 할 수 있습니다. 

참된 구제와 희생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남을 돕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저 남에게 착한 일을 좀 해 주면 그것이 자기에게 공로로 돌아와서 쌓이게 된다고 생각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구제와 희생은 주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사랑, 형제 사랑이 없는 교회생활이란 것은 피차 듣기 싫은 시끄러운 잡음만 남발하고, 교회에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되며, 결국 자기 자신에게 아무 유익한 것이 없는 헛수고가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그 어떤 은사든지, 섬기는 그 어떤 형태의 봉사든지, 충성하는 그 어떤 종류의 직분에도 결코 이 사랑이 빠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사랑으로 감당하셔서 교회와 모든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는 신앙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사도바울이 왜 사랑이 제일이라고 한 이유는 사랑은 개인의 신앙과 성화과정에 필수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4-7절에 보시면 성숙한 성도들이 가져야 할 신앙의 인격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성숙한 신앙인만이 가질 수 있는 완벽한 인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인격이 우리 주님의 인격이요, 성품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격의 완성을 이루는 길은 오직 사랑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라는 말씀은 남에게 대하여 감정적으로 대하지 아니하고 친절한 자세를 지키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사랑임을 가리킵니다. 

‘투기, 자랑, 교만하지 아니하며’라는 말은 자기 인격 속에서 경쟁심이나 명예욕을 제거하는 일도 사랑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라는 말씀대로, 대인관계에서 예의를 지키며 공익을 존중할 줄 아는 자세 역시 사랑에서 오는 것입니다.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라고 했듯이, 사람이 흥분하게 될 때 증오나 미움이 쉽게 일어나며 그것이 동기가 되어 남을 해치려는 악한 생각으로 발전되기 마련인데, 물론 사랑만이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해 줄 수 있습니다. 

사랑은 또한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사랑이란 단어가 아주 잘 오용되는 경우 중의 하나가 바로 불의를 덮어 주고 이해해 주는 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이 문제에 있어서 결코 혼동하면 아니 됩니다. 불의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그러므로 그처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악을 두둔하고 소위 사랑이란 말로 슬쩍 무마시키려는 것은 공의의 하나님을 무시하는 신성모독적인 행위입니다. 

사랑은 불의를 미워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신앙으로 이끌어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여러 가지 은사로 참으로 큰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여건과 조건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기보다는 부끄럽고 무질서한 모습을 보이고야 말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사도 바울이 말한 이와 같은 성숙한 인격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좋은 은사와 직분과 사명을 받았더라도 인격이 바로 되지 못하면 유익이 되지 못하고 해가 되며, 축복이 되지 못하고 화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면서도 그 인격이나 품행이 불신자보다도 못합니까? 근본적으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으로서의 바른 신앙 확립의 근거와 모든 덕행의 배경 역시 오로지 사랑일 뿐입니다. 오직 진짜 사랑이 있어야만 성도다운 성품이 형성되고, 성화의 진보를 뚜렷이 보여 주게 되며, 그 성화가 완성될 그 날까지 어떤 일이 있어도 성도로서의 믿음과 소망을 끝까지 지키게 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3. 사도바울이 왜 사랑이 제일이라고 한 이유는 사랑의 영원성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8절 말씀에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라는 말씀은 사랑은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 한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예언도 방언도 지식도 폐하리라’는 말은 언젠가는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활동과 기독교인의 복음전파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는 때를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언이나, 방언이나, 지식 등은 은사는 모두 한시적으로만 필요한 은사들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면,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순간, 우리의 믿음도 종결되고, 소망하던 바도 성취 되었으니 이제 영원히 남아 이어질 것은 사랑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성도들과 교회가 목숨처럼 중히 여기고 있는 믿음과 소망이 그리고 심지어 성경도 필요 없어지는 때란 도대체 언제 이겠습니까? 9-10절에서 자세히 설명해 줍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현재는 ‘부분적으로 알고 예언하는’시대입니다. 우리가 성경과 일반계시를 통하여 깨닫게 되는 진리는 사실은 부분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아무도 하나님에 대하여 완전히 알 수 없으며, 마지막 재림과 심판과 내세에 대한 지식 역시 아무도 완전히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의 전체란 것은 신구약 66권에 완전히 다 기록할 수 없는, 아니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한 책을 두기에 부족한’(요 21:25) 방대한 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성경을 100% 완벽하게 해석하고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기 때문이며, 또한 아직 성화가 완성되지 않은 죄인으로서는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성도들이 아는 영적 지식이란 부분적 지식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지식수준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온전한 것이 올 때에’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완성되는 때에 가서는 모든 성도들은 바로 장성한 사람의 지식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각 개인 성도의 성화가 완성되는, 즉 영적으로 완전히 장성한 수준에 도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천국에 가면 거기에서는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먼저 믿음이 필요 없게 됩니다. 예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마주보고 있는데 무슨 믿음이 필요하겠습니까? 믿음은 이 세상에서 아직 부분적으로 알 때에 필요할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천국에 가면 거기에서는 소망도 더 이상 필요 없게 됩니다. 이미 천국에 가서 실제로 살고 있는 사람에게 무슨 천국의 소망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소망은 아직 천국이 희미하게 보이는 이 세상에서만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오직 사랑만은 우리가 천국에 가서도 여전히 남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은 이 세상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천국에서도 여전히 조금도 변함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의 사랑이 천국에 들어갔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 사랑은 더욱 충만해지고 완전한 사랑으로 완성될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소망은 이 세상에서만 항상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오직 사랑만은 금세와 더불어 내세의 천국에서도 영원히 존재하게 되는 성도의 유일한 필수품입니다. 바로 그래서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인 것입니다. 이 사랑을 끝까지 간직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고전 13:13절의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이 최고의 은사입니다. 사랑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으로 하나님을 섬기시고, 사랑으로 신앙의 성공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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