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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막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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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막 1:2-8)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6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7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광야에서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고 있습니다. 광야는 사막입니다. 사람이 없는 곳입니다. 메시야가 오신다는 소식을 전하려면 예루살렘에서, 그것도 성전 한 복판에서 외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자기의 소리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야합니다. 광화문이나 시청 앞으로 가야하고 강남역 앞에서 외쳐야 합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외쳤던 곳은 인적도 없고 새 한 마리 날아다니지 않는 광야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5절입니다.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이것이 말씀의 힘입니다. 사람들은 진리의 소리를 듣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있는 곳이라면 사람들은 사막 한 가운데라도 찾아갑니다.

강원도 태백에 가면 예수원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교통도 여러 번 차를 갈아타야 하는 산골이고, 장소도 협소하고 음식도 변변찮습니다. 매우 불편한 곳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있습니다. 방학 중에는 인터넷으로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갈 수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 도시 사회에서 영적으로 지친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있습니다. 변변한 프로그램도 없고, 이곳을 설립했던 대천덕 신부님은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이 분의 영성과 흔적이 남아 있고 그것이 여전히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찾는 사람들의 마음에 안식과 힘을 공급받습니다. 저도 몇 년 전에 다녀왔었는데 그 때를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에 어떤 평화나 기쁨이 있는 것을 봅니다.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있는 곳이라면 사람들은 그 곳을 찾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허름하고 불편한 곳이라 할지라도 정말 맛있는 음식점에는 사람들이 물어서라도 찾아옵니다. 그러니 우리 교회에 부흥이 없는 것에 대해서 탄식하지 말고, 우리 안에 하나님 말씀이 없는 것에 대해서 더 탄식해야 할 것입니다. 꿈이 있고 비전이 있고 말씀이 있으면 지남철처럼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말씀을 외치는 이유가 있습니다. 도시는 욕망과 거짓과 교만이 가득한 곳입니다. 물질과 권력으로 오염되어 사람들의 영혼이 혼탁해 있고, 경쟁과 이기심으로 평화와 안식이 없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켰을 때 먼저 데리고 간 곳이 광야였습니다. 그 이유는 아무것도 바라보거나 의지할 수 없는 곳에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훈련시켰던 학교였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2-3)

모세오경 중 민수기라는 성경이 있습니다. 민수기는 영어로 ‘Numbers’인데 백성들을 인구 조사했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제목을 정했습니다. 그러나 이 제목 외에 히브리 성경의 원래 제목이 따로 있습니다. 히브리 성경은 첫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로 책 제목을 잡습니다. 민수기의 원래 책 제목은 ‘밤 미드바르’ 곧 ‘광야에서’입니다. 저는 이 책 제목이 더 좋습니다.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을 보내며 겪었던 일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도 많이 하고 원망도 많이 하였습니다. 오죽 했으면 하나님이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까지 했겠습니까?

그렇지만 광야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백성이 처음 만나 정을 쌓았던 사랑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마치 신혼 생활을 보냈던 곳과 같습니다. 이는 호세아서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타락하여 우상을 섬기고 여호와 하나님을 외면하자 하나님은 호세아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광야)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호2:14-16) 

이는 마치 시골에서 행복하게 살던 부부가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와서 겪었던 어떤 에피소드와 같습니다. 서울에서 그만 아내가 잘생긴 사내에게 바람이 나고 말았습니다. 남편이 아무리 달래도 듣지 않습니다. 지친 남편이 아내의 손을 붙잡고 “우리 다시 시골로 돌아가자” 이것이 호세아서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불편하기도 하고 불평도 많았지만 그래도 광야에서 지내던 시절이 행복하고 순수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광야는 이런 사연이 있는 곳입니다. 지금 세례 요한은 광야로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광야라는 장소로 오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 삶에서 우리 영혼을 얽어매고 우리를 지치게 만들었던 그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나아오라는 요청입니다. 마치 우리 한국교회와 우리 민족을 향한 외침과 같습니다. 우리는 물질적으로는 부요해졌지만 영적으로는 가난해졌습니다. 삶에서 불안과 불만이 더 많아졌고 감사와 기쁨과 평화를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마음이 사라졌고, 기도의 기쁨과 열정이 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부자청년에게 주셨던 말씀이 곧 우리를 향한 말씀이라 할 것입니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막10:21) 그런데 그 청년은 어떠했습니까?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22)

지금 그 자리가 내 영혼을 타락하게 만들고 있다면 과감히 버리고 광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자리를 부둥켜안고 우리 영혼이 파괴되어 가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습니다. 사실 재물을 다 내어놓고 따르라고 한다면 현대인들 중에 그럴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우리를 얽어매는 것들을 벗어버리고 광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가끔이라도 우리는 광야로 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우리 영혼이 평화를 얻습니다.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세례 요한은 삶은 매우 검소했습니다. 6절입니다.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세례 요한의 모습은 마치 구약의 엘리야를 연상케 합니다. 엘리야나 세례 요한이나 광야에 살면서 부드럽거나 호화로운 옷을 입을 수는 없습니다. 약대털은 사막의 추위를 막을 수 있는 옷이며, 엘리야와 메뚜기와 석청은 건강음식이 아니라 사막에서 먹을 수 있는 최소한의 양식입니다. 포도주나 고기나 곡식을 먹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세례 요한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만 중요했지 먹는 것이나 입을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들의 삶의 모델도 세례 요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잘 먹고 좋은 곳에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처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마6:24) 섬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물질이 많아지면 그 풍요로움에 취하고 물질의 권세에 휘둘리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교회 건물은 날로 호화로워지고, 내가 굴리는 차는 럭셔리해지고, 기도원은 최신식이 되어가지만 우리 영성은 더 고갈되고 우리 마음은 더 탐욕스러워지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이 아닙니까?

오래 전 어떤 기독교 대담 프로그램에서 있었던 대화입니다. 당시는 목회자가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 문제가 되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그 대담에서 서울대 정진홍 교수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감리교회의 장로입니다. 제가 평신도로서, '목사님이 이렇게 혹은 저렇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해야 할 위치에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제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목사님들은, 남들이 좋아하는 편안하고 안락한 길에서는 한 발짝 늦게 가시고, 남들이 싫어하고 마다하는 힘들고 어려운 길엔 한 발짝 앞서 가시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모시고 있는 목사님이 그러신다면, 저는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바쳐, 그 분을 도울 것입니다." 지금은 옛 이야기처럼 되었지만 여전히 목회자들이 들어야 될 말씀입니다. 오늘날 세례 요한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세례 요한처럼 살려고 노력해야 우리 안에 말씀의 영성이 살아날 것입니다.

일반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에는 물질이 지배력이 예전보다 더 커졌습니다. 옛날에는 배만 주리지 않으면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좋은 집, 좋은 차, 몇 가지 명품, 최고 사양의 전자 제품, 문화 환경과 수준이 받쳐주지 않으면 매우 불행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좀 더 검소하게 살려는 노력은 물질의 권세에서 한 걸음 벗어나는 행동이될 것입니다. 물질의 권세에서 벗어난 만큼 우리 영혼이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좀 불편하게 살고, 좀 안 쓰고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예수원이라는 곳은 정말 안 쓰며 검소하게 사는 곳입니다. 겨울에 갔던 예수원은 좁고 춥고 부족한 곳이었습니다. 처음 갔을 때 우리에게 배정된 방은 바로 지붕 밑 다락방이었습니다. 중간에 대들보가 지나는 한편으로는 낭만적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좀 걱정스러운 비좁은 공간이었습니다. 한 겨울 추위에 난방을 아끼는지 예수원 곳곳은 추웠습니다. 방 안에서도 이불을 둘러쓰고 있어야 했고 도서관이나 기도실에서는 연방 손과 무릎을 비벼야 했습니다. 

전등 불빛은 너무 희미해 창가의 햇빛에 의지해 책을 읽어야 했습니다. 식사는 정말 절간보다 더 심했습니다. 시원한 강원도 김치에 그때그때 나오는 나물 무침 하나, 그리고 멀건 국물 그뿐이었습니다. 밥은 잡곡밥이지만 항상 모자라게 배급이 되었습니다. 모두 같은 자리에 앉아서 동일한 시간에 식사를 시작하고 마쳐야 합니다. 딱 20분이면 모두가 식사에서 정리까지 끝낼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처음엔 맛이 없다고 불평이더니 나중에는 배가 고파 두 그릇을 비우기도 하였습니다. 

짧지만 이런 예수원 생활을 경험하면서 절감했던 것은 우리 생활이 너무 낭비가 많고 에너지 소모량이 많다는 점이었습니다. 아마 인간이란 존재는 지구상에서 가장 비효율적이며 가장 소모적인 동물일 것입니다. 검소한 생활은 물질의 횡포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세례 요한이 하나님 말씀을 담대히 외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무엇보다 물질로부터 자유 했기 때문입니다. 스님이나 신부님들이 깊은 종교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많은 것을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목회자들은 하나님 믿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족 부양이라는 과제를 가지고 생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처럼 살기는 쉽지 않지만 목회자들은 늘 세례 요한을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나보다 능력 많은 신 이

세례 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자들 중 가장 큰 자라는 인정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의 큰 자됨은 무엇보다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의 어느 위치인지를 잘 알았다는 점에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임을 잘 알았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행차에서 영광을 받을 자가 아니요, 그 앞에서 외치는 소리꾼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2절에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 말씀하듯 세례 요한은 ‘소리’ 같은 존재입니다. 소리는 자기 얼굴이 없습니다. 다만 뒤에 오는 주인공을 빛나게 하고 사라지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세례 요한은 대단한 선지자였습니다. 그 메시지를 듣고 온 유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구약의 말라기 선지자 이후 성경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선지자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는 팔레스틴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퍼져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아볼로와 에베소의 제자들이 요한의 세례를 알고 있는 것(행18:25, 19:1-4)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사촌 형님뻘이 됩니다. 예수님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고, 학자들은 예수님이 초기에 세례 요한의 운동에 동참했을 가능성을 언급합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의 권위나 영광을 주장할 충분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 겸손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능력 더 많다.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끈으로 엮은 가죽신을 주로 신었고 이스라엘 땅은 건조해서 먼지가 많았습니다. 그 더러운 신발을 벗기는 일은 종들의 몫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유명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앞에서는 종의 하는 일조차도 감당할 수 없다는 겸손함을 보입니다. 

세례 요한이 위대했던 것은 이처럼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알아보고 그것을 인정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가진 기득권이나 명예 때문에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질투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 사람을 세워주기보다는 오히려 이용하고 짓밟으려 합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오히려 예수님을 향하여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고 말합니다.

세례 요한은 또한 자기 위치를 잘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종종 실패하는 것들 중 하나가 자기 위치나 자기 분수를 모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능력도 되지 않으면서 높은 자리만 오르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분수를 넘어 과대 권력을 행사하며 자기 영광을 취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그렇습니다. 총리나 시장이나 국회의원이나 기업의 오너가 적격인데 자꾸 더 높은 자리를 원하는 것을 봅니다. 이단들의 교주 또한 그렇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작은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자기들이 예수님의 자리에 오릅니다. 이단들뿐만 아니라 기성교회도 위험합니다. 기성교회 당회장이나 목회자의 자리는 세상의 어떤 권력에 부럽지 않은 곳이 되었습니다. 목회자들은 광야의 소리 같은 존재들입니다. 자신이 영광을 받아서는 안 되고 목회자는 예수님을 소개하고 지시하는 소리에 불과할 뿐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잘 알았습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는데 그것은 정결이나 회개의 상징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안내자에 불과하고 성령을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설교자의 임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설교자는 길을 준비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안내하는 자입니다. 설교자는 수도관과 같습니다. 성령께서 그 관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부어집니다. 그런데 수도관이 녹 쓸어 있거나 막혀 있으면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못합니다. 목회자는 그래서 항상 도덕적으로 정결하고, 경건의 훈련을 해야 하며, 말씀과 지식에 깨어 있어야 하며,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마음껏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능력은 인간에게 있지 않습니다. 역사하시는 것은 성령입니다. 그래서 설교는 가끔 죽을 쑬  때도 있고 스스로 성공적이라 판단할 때도 있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물론 유려하면 더 성령께서 쉽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어눌하거나 논리에 맞지 않아도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유려하고 지식이 넘쳐도 거기에 성령이 계시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인간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제 생각, 제 어투를 보지 마시고 제 입술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처럼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우리 뒤에 계신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설교의 위대한 기적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복음이 선포될 때 칭의가 일어난다” 즉 설교가 행해지는 곳에 칭의가 일어난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가톨릭의 성찬이나 미사를 통해서 의롭게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는 교리에 반해서 설교로 그 중심이 옮겨간 것입니다. 개혁 교회는 설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정식을 채택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선포는 바로 하나님 말씀 자체이다” 설교가 행해지는 곳에 하나님 말씀이 있다는 뜻입니다. 요한 칼빈은 “설교는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결시켜주는 주님의 선물이며, 죽어야 할 인간의 목소리가 영생을 얻도록 교통할 수 있는 도구가 되게 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입술을 통해 전해지는 설교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입술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그 입술을 타고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위대함입니다. 그러니 제 입술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설교자들 또한 그래서 말씀을 선포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바로 이 부정한 입술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거룩한 기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례 요한을 보지 말고 세례 요한 뒤편에 있는 예수님, 세례 요한의 입술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성령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반면에 세례 요한과 같은 선포자들은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요, 우리 뒤에 계신 예수님만이 성령으로 세례 주시는 분임을 분명히 붙잡아야 합니다. 또한 이 때문에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런 두려움이 없이 마치 자기가 성령 세례를 주는 존재인 것마냥 자기 생각이나 자기 감정이나 섣부른 자기의 정치적 견해를 함부로 쏟아낸다면 그는 성령님을 참칭한 죄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주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입니다. 물은 단순히 우리 몸만 씻지만 성령은 우리 마음을 씻고 우리 존재를 불태워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십니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 인간의 말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입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을 바라보지 말고 그 뒤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 안에서 진정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내 삶을 이끌어가는 하나님 말씀 앞에 서게 되고, 그 힘의 강력함과 그분이 주는 위로의 따스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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