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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의 것을 찾으라 (골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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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것을 찾으라 (골 3:1-4) 


1. 땅만 보고 사는 사람들

지난 주간,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듣고 보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청소년들과 청년들은 공부와 진로와 직장에 死活을 걸고 살아가고, 부모 세대들은 자녀들을 공부시키고 자녀들이 결혼하면 집 한 칸이라도 마련해주기 위하여 거기에 모든 관심을 집중하여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더 가지거나 그것을 불리는 데 그리고 없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가져보려고 그것에 매여서 살아가고, 연세 드신 분들은 건강에 지대한 관심을 두고 살아가고, 조금 여유가 있는 어른들은 자녀들에게 되도록 많은 것을 물려주고 싶어서 재테크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땅만 바라보면서 사는구나!” “세상만 바라보고 사는구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산다고 다 얻고 다 이루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들 땅만 세상만 보고 살다가 하나님께 드린 것 없이, 천국에 쌓은 것 없이 주님 앞에 서면 어쩌려고 저러나?” 

그러면서 떠오른 이야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미국의 어떤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한 소년이 길을 가다가 5달러짜리 지폐를 주웠습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든지, 그때부터 길을 갈 때면 또 다시 그런 일이 있을까 하여 땅만 쳐다보고 다녔고, 그것이 습관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산 결과 그가 일생 동안 길에서 주운 것은 단추 29,519개, 머리핀 54,172개, 동전 수천 개, 그리고 그 외에 자질구레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땅만 쳐다보면서 그런 것들을 줍느라고 보지 못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푸른 하늘과 그 하늘을 나는 새, 자연의 아름다움과 계절을 달리 하며 피는 꽃 등이었습니다. 결국 그의 일생은 넝마주이로 끝나고 말았지요. 이 사람의 이야기는 ‘무엇을 보고 사느냐’, ‘무엇에 관심을 두고 사느냐’에 따라 그 됨됨이가 결정되고 그의 삶이 결정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여러분은 어디를 보면서 살아오셨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보면서 살아오셨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하여 여러분이 바라보아야 할 곳이 어디이고 무엇인지를 알게 되시기 바랍니다.

2. 성도의 정체성과 삶

1) 골로새 교회

주후 62년경, 이미 예순을 넘긴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여러 경로를 거쳐 로마의 감옥으로 이송되어 로마에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골로새 교회가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골로새는 오늘날의 터키에 있는 작은 도시인데 이 도시는 原住民인 브루기아인, 바다 건너편 그리스에서 이주해 온 헬라 사람들, 그리고 로마 정부의 유대인 이주 정책에 따라 반강제적으로 집단 이주하여 온 유대인들이 섞여 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작은 도시에 원주민, 그리스인, 유대인이 섞여 사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인종적인 문제, 전통과 관습의 문제, 그리고 여타 다른 문제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골로새 교회가 안고 있던 문제는 종교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즉 哲學과 半神半人의 神話를 추구하는 그리스인들, 샤머니즘 즉 미신에 젖은 브루기아인, 그리고 유대인들로 구성된 골로새 교회는 자신들의 민족적인 종교 문제로 인하여 갈등과 대립을 피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골로새 교회에 대두된 문제는 철저히 유대교를 지켜야 한다는 유대주의, 바울이 “세상의 초등학문”(2:8~10)이라고 했던 그리스에서 유래된 영지주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사상, 천사 숭배, 그리고 금욕주의(2:21) 등입니다. 골로새 교회는 이러한 문제들로 인하여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골로새는 한 때 상당히 번성했던 都市였다가 점차 2류, 3류 도시로 頹落하고 있었습니다. 도시가 퇴락했다는 말은 경기가 침체되면서 시민들의 삶에 경제적인 타격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장사도 안 되고 먹고 살 일이 점점 어려워지면서 시민들이 골로새를 떠나고 있었으며 교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골로새 교회는 내부적으로 이단 사상들 때문에 흔들리고 있었으며, 도시의 경기가 침체되면서 교인들이 삶의 의욕을 잃고 좌절하고 있었습니다. 골로새 교회의 이러한 상황을 알게 된 바울은 비록 자신이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는 골로새 교회였지만 가만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펜을 들어 골로새서를 기록하여 보낸 것입니다. 바울은 먼저 1장 13절부터 2장 마지막까지에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세상의 그 어떤 異端 邪說보다 월등히 우월함을 설명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러한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르는 자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3장 1절부터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부분이지요.

2) 위의 것을 찾으라!

세상 그 어떤 신이나 종교나 철학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즉 성도는 “위의 것을 찾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➀ 첫째로 성도가 위의 것을 찾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성도가 누구인지와 연결됩니다. 성도는 누구, 어떤 사람입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성도는 “이는 너희가 죽었고(3)”,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사람(1)”입니다. 여기서 “너희가 죽었고”라는 말에 대해 어느 성경학자는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1) 죄에 대하여 죽음이고(롬 6:6,11). (2) 율법에 대하여 죽음이고(롬7:4), (3) 세상에 대하여 죽은 것이니, 그것은 곧, 땅엣 것을 애착하여 추구하고 의지하는 이 세상 생활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이다(갈 6:14). 

기독신자는 원칙적으로 땅엣 것에 대하여 시체적(屍體的) 관계를 가진다.”고 했습니다. 즉 “다시 살리심을 받은”성도라면 한 때 죽었던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죽은 자요, 죄 가운데 살므로 진노 아래 거하던 자요, 하나님이 아닌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수중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삶의 의미나 방향이나 목적, 생의 그 어떤 소망도 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새 생명을 얻은 것이죠.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 그리고 그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생명인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만약 성도가 성도답게 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면서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사람, 감사과 감격이 인색한 사람은 아직도 예수님 때문에 다시 살게 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 벅찬 감격과 일상적 삶에 대한 희열이 없는 사람은 여전히 세상에 속한 사람이요 육신의 것에 좌우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죽었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산 사람은 구하는 것, 생각하는 것이 다릅니다. 1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여기서 “찾는다”는 말은 ‘값진 진주(마 13:45)나 잃어버린 어떤 것(마 18:12 눅 19:10) 등을 얻다 혹은 찾거나 구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가 하면, ‘탐문하다’, ‘얻으려고 또는 찾으려고 애쓰다’, ‘얻고자 노력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다들 이렇게 말들을 합디다만, 저는 지금까지 소풍이나 체육대회에서 보물찾기 한 번 제대로 걸려본 적이 없습니다. 

어릴 때도 친구들은 학교 소풍이나 교회 소풍에서 몇 개 씩 찾는 것을 저는 하나도 못 찾았는지라, 그럴 때만 되면 傲氣 毒氣를 품고 찾고 또 찾았습니다만 하나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를 따라오던 친구가 제가 지나 온 자리에서 보물을 찾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여러분, 보물을 찾기 위하여 오기를 부리고 독기를 품는 것이 바로 이 “찾는다”는 말의 의미와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또 다른 표현은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2절,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여기서 “생각하다”는 말은 ‘생각하다’는 뜻 외에 ‘전념하다, ~에 마음을 두다’는 뜻입니다. ‘위의 것만 생각 하라’는 말입니다. ‘위의 것만 바라보라’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성도가 찾고 생각해야할 “위의 것”은 무엇입니까?

➁ 1절 하반절,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 즉 성도가 찾아야할 “위의 것”은 우선적으로 예수님과 관계됩니다.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주님을 생각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3장 1절 역시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권합니다. 

히브리서는 박해와 고난 속에서 기독교 신앙을 부정하고 떠나려 했던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권면과 확신, 그리고 위로를 주기 위해 기록된 말씀입니다. 히브리서가 기록될 당시의 성도들은 엄청난 위협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그러한 환경일지라도 흔들림 없이 예수님을 의지하고 따를 수 있도록 믿음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의 한 도시에 아름답고 우아한 표정을 한 그리스 소녀의 동상이 서 있었습니다. 하루는 가난한 시골 소녀가 그 동상 앞에 서서 한참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후 그 소녀는 집으로 돌아가 얼굴을 씻고 머리를 단정히 빗었습니다. 그 다음날 소녀는 다시 그 동상 앞에 그렇게 한참을 서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누더기 옷을 수선했습니다. 그러기를 반복하면서 그 소녀는 점점 우아한 모습으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동상에서 풍겨 나오는 아름다움에 영향을 받은 것이지요. 이처럼 영적인 사람은 항상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의 속사람과 겉사람이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해가게 되지요.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 인간적인 가치가 아닌 하늘의 가치와 영적인 가치를 추구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이와 관련한 비유들이 많습니다. 인생은 집을 짓는 것과 같은데(마7:24~27), 그 집은 이 땅이 아니라 천국에 짓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열심히 살고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잘 감당한 사람은 천국에 아름다운 집을 짓는 사람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이 비유는 세상에서 쌓고 지은 것들은 결국 없어진다는 말씀도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주님은 “네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마6:19~24)”고 하셨습니다. 또 불의한 청지기 비유(눅16:1~13)를 통하여 “인생의 다음을 준비하는 지혜”를 말씀하셨습니다. 즉 지혜로운 사람은 지금의 세상과 지금의 삶이 아닌 다음을 준비하는 자요, 영적인 가치, 신령한 일을 위하여 자신과 자신이 가진 것을 드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물론 지금이 중요합니다. 지금의 건강, 노후문제, 자녀들과 그들의 앞날, 그리고 먹고 입고 자는 문제 등 모두 모두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 이상을 바라보아야 하고, 그 이상을 생각해야 하고, 그 이상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➂ 세 번째로 오늘 본문은 “위의 것을 찾는 삶”은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땅의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 오늘 본문 이후를 보면,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골 3:5~9)”라고 말합니다. 

즉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삶”은 우선적으로 땅의 것, 곧 옛 사람과 옛 행위를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5절에 열거된 다섯 가지 죄악들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해 보면, 첫째는 성적인 죄악을 버리는 것이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음란의 충동과 욕심, 성문제(性問題)에 대한 일체의 불합리한 언행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무제한의 소유욕인 “탐심”입니다. 

이것은 “우상숭배”와 같은 것으로 간주되는 죄악입니다. 그리고 8, 9절에는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 … 거짓말 …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라”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이 분해하고 노여워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악의”란 ‘남을 해하려는 독한 마음’을 뜻하는데, 왜 남을 해하려고 독한 마음을 품습니까? 왜 비방합니까? 왜 그 입에 부끄러운 말을 담습니까? 결론은 아직 “옛 사람”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즉 땅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결국 어떤 사람들에게 골로새서 3장 5절로부터 9절의 죄가 드러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가 아직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산 자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러한 죄는 그가 땅에 속한 사람이라는 증거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땅의 것”이란 이 세상의 아름다움, 이 세상의 영광, 이 세상의 화려함, 이 세상의 유익, 이 세상의 쾌락과 명예 등을 의미합니다. “땅의 것을 생각하는 자”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지나치게 좋아하거나 즐거워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을 마음껏 누리면서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 원하는 대로 쓰고, 넓고 큰 집을 여러 채 가지고 있고, 화려한 고급 가구를 집안에 들여놓을 수 있으며, 명품을 입고 차고 걸고 다니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일까! 

나도 그런 것들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러분, 이와 같이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에 자신의 행복을 거는 사람은 땅의 것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있는 어떤 것을 그토록 높이 평가하고 있다면, 틀림없이 그 사람은 영적으로 병들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땅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구하는 것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➃ “위의 것을 찾는 삶”은 네 번째로 주님의 재림과 성도의 종말과 연관됩니다. 4절,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다시 오실 주님을 생각하고 소망하고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 /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머리 들고 멀리 멀리 바라보는 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 / 천년을 하루같이 기다린 주님/ 내 영혼 당하는 것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예수님/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옵소서.” 

이 노래는 손양원 목사님의 <주님 고대가>라는 노래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이 땅에서 목숨 걸고 믿음 지키고 교회를 지키는 삶을 살면서도,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는 삶을 사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사는 것이 성도의 바른 삶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일을 찾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생각하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예수님 재림하실 때 그와 함께 榮光 중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3. 하늘 사람의 삶

말씀을 맺겠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전쟁포로였던 사람들의 건강 검진을 담당했던 의사는 그들에게서 똑 같은 정신과적인 질환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증상으로 그 병명을 붙였습니다. 그것은 ‘철조망 병’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쟁이 끝나고 포로에서 풀려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철조망으로 둘러 싸여진 수용소 안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면서 살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의 증세는 다른 사람과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전혀 이 ‘철조망 병’과는 관계없이 아주 밝고 쾌활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의사가 당연히 이유를 물었겠지요? 그러자 그는 “저는 철조망을 바라보지 않고 그 너머 세계를 바라보았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면서,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철조망 너머의 세계에서 푸른 하늘 아래서 자유롭게 살아갈 날을 꿈꾸며 지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이 사람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비록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지만, 여러분은 위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이와 같이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쳐다보고 사느냐에 따라 그 인생이 결정됩니다. 

땅을 보고 사는 사람은 땅의 것으로 살 것이요, 하늘을 쳐다보고 사는 사람은 하늘의 것으로 살 것입니다. 미래를 쳐다보고 사는 사람은 미래에 올 꿈과 소망으로 기쁨을 누릴 것이요, 땅의 것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천박하고 저속하고 비열한 삶을 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위의 것을 찾아야 합니다. 하늘나라의 일들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이란 예수님과 그가 하신 일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또한 위의 것을 찾는 삶은 하늘나라의 신령함을 추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 말은 땅의 것, 육신의 것을 무시하고 죄악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하되 그 너머, 주님의 나라와 다시 오실 주님을 잊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죠. 또한 성도는 위의 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마치 他國에서 사는 同胞들이 고국을 향한 鄕愁에 젖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는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땅의 것에 매이지 않습니다. 땅의 것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위의 것, 하늘의 것에 더 우선을 두는 사람이지요.

帆船이 한창 대서양과 태평양을 누비던 시대에 선원이 되려고 배에 오른 젊은이들은 특이한 방식으로 훈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들이 맨 먼저 받는 훈련은 10에서 20미터 높이의 돛대 위에 올라가서 돛을 감든지 망을 보는 것이었는데, 그곳에 올라가면 누구나 정신이 아찔해집니다. 배가 흔들리면 바다가 온통 자기에게 쏟아지는 것 같고 현기증이 나서 떨어질 것만 같습니다. 배를 처음 탄 젊은이들이 거기에 올라가 비명을 지르면서 야단법석을 떨면 고참 선원들이 위를 향해 소리칩니다. “야! 바다를 보지 마. 하늘을 봐, 위를 봐!”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을, 여러분의 현실을 흔드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흔들리지 않으려고 여러분이 붙드는 것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이 부양하거나 책임져야할 것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지만 그 가운데서 오늘 여러분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늘을 봐! 위를 봐!”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거기가 여러분의 본향이고, 거기로부터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늘 천국을 사모하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주 안에서 다시 산 자답게 거룩하고 신령하게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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