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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 가운데 함께 하시고, 고난을 대신하시고, 그리고 장차 … (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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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가운데 함께 하시고, 고난을 대신하시고, 그리고 장차 …  (단 3:8-30)
 


1. 고난

성경에서 고난을 뜻하는 단어는 히브리어, 즉 구약성경에 열두 개, 헬라어 즉 신약성경에 스물 한 개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히브리어로는 ‘아나’가, 헬라어로는 ‘파스코’가 대표적인 단어입니다. 히브리어 ‘아나’의 기본적인 의미는 ‘기가 죽은,’ ‘곤경에 처한’이며, 동사로 사용될 때는 ‘굴복 당하다,’ ‘괴로움을 당하다,’ ‘좌절시키다’입니다. 

특히 이 단어는 아랍어 ‘ana’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는데요. 아랍어 ‘아나’는 ‘굴종하는 상태,’ ‘노예의 상태’라는 뜻이고, 고대 남부 아랍어에서는 같은 어원(‘nw’)으로 ‘비천한 상태에 처한,’ ‘내버려진’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히브리어 ‘아나’의 의미는 외부로부터 가해져오는 고난, 즉 전쟁이나, 질병이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게 되는 괴로움과 고통인데, 그 강조점은 고통당하는 사람이 그 고통의 노예가 되는 상태에 있습니다. 

신약의 ‘파스코’는 신약에서 42회 정도 사용되었는데, 주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그를 따르는 백성의 고난에 연관되어 사용되었으며, 특히 이 말은 ‘죽임당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눅 22:15; 24:26, 행 1:3; 17:3). 즉, 고난을 뜻하는 신약성경의 대표적인 단어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의미하면서 성도의 고난 역시 그에 비견되는 것이라는 뜻으로 쓰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 원어로 볼 때 고난이란 무엇입니까? 

주로 우리의 밖에서 와서 우리를 너무나 괴롭고 힘들게 하여, 우리를 그 고난의 노예처럼 만들어 그 고난에 이리저리 질질 끌려 다니게 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고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고난의 語源的인 의미보다는 우리의 삶에 고난이 있다는 것이 더 문제이지 않습니까? 외부에서 가해져오는 고난이든, 자신의 실수와 잘못과 죄로 인한 것이든, 자연재해나 원치 않는 사고로 인한 것이든, 갖가지 고난이 우리 삶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살펴보면 ‘고난이란 이런 것이다’하고 정의를 내리기도 하지만, 그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이미 오신 예수님, 그리고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해서 묵상하는 대강절 두 번째 주일인 오늘, 성도의 삶에서 피할 수 없는 고난과 예수님과의 관련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2. 고난의 현장에 계시는 주님

오늘 본문은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다니엘과 그 세 친구에 관한 말씀입니다. 유대 귀족 가문의 소년으로 포로로 끌려와 王立學校에서 수학하던 다니엘이 어느 누구도 풀지 못했던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한 후, 왕의 특별한 총애를 입었습니다. 다니엘 2장 48절에 “왕이 이에 다니엘을 높여 귀한 선물을 많이 주며 그를 세워 바벨론 온 지방을 다스리게 하며 또 바벨론 모든 지혜자의 어른을 삼았으며.”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다니엘은 넓디넓은 바벨론 제국의 각 도 道知事들을 총괄하는 일종의 總理와 같은 자리에 전격적으로 기용되었고, 그와 겸하여 당대 최고의 지혜자요 학자 집단의 首長이 되었습니다. 

아직 어리다고 할 수밖에 없는 소년이 이러한 높고 중차대한 일을 맡았다는 것은 그야말로 革新的입니다. 그리고 느부갓네살의 혁신적인 인재 등용은 다니엘 만 아니라 다니엘과 신앙과 삶을 함께 했던 세 친구, 즉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본명대로 한다면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에게까지 미쳤습니다. 그들 역시 왕의 마음에 들어 지방 도지사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직위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에게는 큰 위기가 닥쳤습니다. 그때는 느부갓네살이 왕위에 오른 지 18년째 되던 해였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두라’라는 넓은 평원에 거대한 신상을 하나 세웠습니다. 그 신상은 높이가 대략 30m 가까이, 너비가 약 3m 정도 되는 거대한 사람 형상의 금 신상이었습니다. 평양 만수대에 있는 김일성 동상이 20m 된다고 하니까, 그보다 훨씬 더 큰 신상이었을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이런 신상을 세운 이유가 있었습니다. 천하를 제패하고 거대한 통일 제국을 이룬 느부갓네살은 ‘어떻게 하면 이 위대한 업적과 통일국가를 지속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했고, 그 생각 끝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려고 주신 꿈(2:31~45)에서 힌트를 얻어 거대한 금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느부갓네살은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바벨론 제국에서 왕권을 보다 확실하게 다지고 싶었습니다. 특히 제국의 모든 군인과 공무원들과 지방 장관들, 그리고 언제 독립운동을 일으킬지 모르는 피정복민들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거대한 신상을 만들게 한 것이죠. 그러나 이러한 그의 행동은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기가 막힌 일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를 낮추어 겸손케 하려고 주신 꿈을 도리어 자신을 자랑하고 자신의 나라를 영원히 이어가기 위하여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러 저러한 목적을 가지고 그는 거대한 신상을 제작하여 그 앞에 절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어느 누구도 본 적도, 아니 상상조차 한 적이 없는 거대한 왕 형상의 신상 앞에 서는 것만으로 그들은 왕의 위엄과 권세와 그가 이룬 제국의 영광 앞에서 기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왕은 금 신상에 절하기를 거부하는 자, 즉 딴 맘을 먹거나 왕에게 굴복하고 충성하기를 거절하는 자는 맹렬히 타는 풀무 불에 던져버리겠다고 위협까지 했습니다. 감히 어느 누가 왕의 권위와 절대 권력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거대한 신상이 만들어지고 그 낙성식 자리에 전국에서 한 자리 한다는 모든 사람들과 중앙 및 지방 관리들이 다 모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신상에게 절하는 것을 시작으로 언제 끝날지 모를 신상숭배는 시작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 나라를 확실히 장악해서 그 나라를 영원히 유지하겠다는 발상은 좋았는지 모르지만, ‘지나치면 모자라는 것만 못하다’는 말처럼 느부갓네살의 이 행위는 ‘참담한 실패’를 예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실패는 그의 행동이 자신에게 제국과 더불어 그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을 거역하고 도전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낙성식이 열리는 날,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언어로 말하는 자들아, 왕이 너희 무리에게 명하시나니 너희는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엎드리어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라.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라(4~6).”라는 명이 크게 외쳐졌습니다. 왕이 소환한 낙성식 자리에서 감히 어느 누가 이 명령을 거역하겠습니까? 예식에 참여한 사람들은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모두 땅에 엎드려 신상에게 절했습니다(7). 

그런데 그때, 몇 바벨론 사람들이 왕에게 나아와서 왕의 명을 어긴 사람들이 있다고 고발했습니다. 그들이 指目한 사람들은 최근 급부상하여 지방 장관을 맡고 있던 유대인 출신의 젊은 도지사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였습니다. 이들을 고발한 바벨론인들은 그들을 시기 질투하여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그들이 신상에게 절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 즉시 현장에서 고발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자신들이 느부갓네살 왕을 신처럼 존경해서 그 명령을 위반한 자들을 고발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그들은 낙성식 자리에서 신상에게 절하지 않은 세 사람을 고발했고, 왕은 대단히 화를 내어 그들을 ‘끌어오라’고 했습니다. 낙성식 첫 참배 때 신상에게 절하지 않은 것이 사실임을 확인한 왕은 세 사람에게 재차 기회를 줌과 동시에 협박도 했습니다. ‘기다리고 있다가 다시 악기 소리가 울리거든 신상에게 절하록 하라.’ “만약 다시 기회를 주는데도 신상에게 절하지 않으면 그 즉시 너희를 풀무 불에 던져버릴 것이다.” 

그러나 세 사람은 느부갓네살의 이 타협안을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16~18).” “타협은 없습니다! 왕께서 저희를 불속에 던져 넣으면 저희가 믿는 하나님께서 저희를 건져내실 것이고, 설사 그렇게 아니 하신다 하더라도 저희는 그 신상에게 절하지도 그 신상을 섬기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들의 태도는 바울이 갈라디아 1장에서 말한 것과 같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10).” 살아계신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우상에게 절하는 것은 사람을 좋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부인하는 행동이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행동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자신들은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왕의 호의를 거절할 수밖에 없다고 왕에게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풀무 불을 … 평소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고 명했습니다. 그렇게 불을 더 높이자 그 불의 열기가 얼마나 맹렬했든지, 세 사람을 붙잡아 불 곁으로 끌고 갔던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타죽을 정도였습니다(22). 그렇게 해서 세 사람은 맹렬한 풀무 불속으로 던져졌습니다.

그런데 그때, 세 사람의 火刑을 執行하고 있던 느부갓네살 왕이 무엇을 보았는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말했습니다(24).  자신의 명에 따라 불 속으로 던져진 사람은 분명 세 사람이었는데 불 속에 있는 사람은 네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은 도대체 누구이며 어쩌다가 그 불 속으로 들어간 것일까요? 세 사람이 불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다가 자신들을 붙든 군인 한 사람을 끌고 들어간 것일까요? 그럴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 

그런데 그 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분명히 결박하여 불 속으로 던졌는데 불 속에서 그들은 결박되지 않은 몸이었고, 심지어 그 불 속을 다니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25). 25절에서 “다니다”는 말은 ‘오고 간다’는 뜻입니다. 풀무불은 여러 사람이 다녀도 될 만큼 거대한 장작 더미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속에 던져진 사람들이 마치 散步라도 하듯이 이리저리 오고감으로서 밖에서 보는 사람들의 눈에 확 띄었다는 말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얼마나 뜨거운지 그들을 불로 이끌던 군인들이 불에 타서 즉사했는데, 어떻게 불 속에서 산보를 합니까?  놀라운 일은 이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은 세 사람과 함께 있던 그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25절,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느부갓네살의 느낌으로는 그 네 번째 인물은 신들의 아들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신으로 보였다는 말이죠. 성경은 이 신비로운 네 번째 인물에 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누가 보아도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개입임이 틀림없습니다. 타죽으라고 세 사람을 결박해서 불속에 던져 넣었는데 불속에 들어간 사람들은 타죽지 않고 아주 평온한 모습으로 있고, 거기다가 하나님 같아 보이는 인물이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이 최고인 줄 알았습니다. 자기의 명령이면 뭐든지 다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기 앞에 펼쳐진 광경은 자기의 능력보다 훨씬 크고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이 믿어지지 않는 광경을 목격한 느부갓네살은 즉시 불 곁으로 달려가 소리 질렀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26.)” 왕의 명령이 떨어지자 세 사람은 즉시 불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모습을 살펴보니 불에 그을린 자국도, 불탄 냄새도 전혀 없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을 본 느부갓네살은 고백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가 모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경솔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을 거름터를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28~29).” 물론 느부갓네살이 이 일 후에 여호와를 진심으로 믿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만,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여호와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함부로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 받는 성도, 특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는 성도의 고난을 하나님께서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느부갓네살의 표현대로 한다면 “신들의 아들과 같은 이”가 풀무불 가운데서 세 사람과 함께 했습니다. “신들의 아들과 같은 이”는 누구겠습니까? 그는 구약에서도 역사하신 성자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도의 고난의 현장에 함께 계시고, 그 고난 가운데서 성도를 지키시는 일이었습니다. 고난의 현장에 함께 하시는 예수님, 고난 가운데서 성도를 지키시는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고난을 대신하신 예수님

그런데 성도 여러분, 성도의 고난에 대한 우리 주님의 태도는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구약의 여러 본문과 신약성경은 성도의 고난에 대한 예수님의 또 다른 태도를 보여줍니다. 즉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예수님은 성도의 고난의 현장으로 오셔서 그 고난 가운데 함께 계셔주시는 분입니다만, 신약의 예수님은 이와 다릅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고난의 현장으로 오셔서 고난을 함께 하시는 주님이 아니라 고난을 대신하시는 주님입니다. 이사야 53장이 이것을 예언했지 않습니까?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구약의 예수님은 고난의 자리에 오셔서 고난당하는 성도들과 함께 하시는 분이라면 신약의 예수님은 아예 성도들의 고난을 대신하는 분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고, 예수님은 이 말씀을 그대로 이루셨습니다. 

고난이나 삶의 역경을 만났을 때, 그에 반응하는 것에 따라 사람들은 세 가지로 분류됩니다. 첫째는 ‘포기형’입니다. 역경이 닥치면 그냥 주저앉아 포기하거나 도망을 갑니다. 두 번째는 ‘안주형’인데, 역경이 닥쳤을 때 극복하기보다는 현상을 유지하려 하고, 적당히 편하게 살려고 합니다. 세 번째는 ‘정복형’입니다. 있는 힘을 다해 역경에 도전하며 그 역경을 극복하려고 노력합니다. 첫 번째 포기형의 사람과 두 번째 안주형의 사람은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정복형의 사람들은 대부분 성공하는 인생을 삽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마슬로우’라는 사람은 󰡒그 사람이 얼마나 위대하느냐는 그가 얼마나 많은 고난을 이겨 왔느냐와 비례한다󰡓고 말했습니다. 역사적인 인물들을 보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위인들과 존경받는 지도자 300명을 조사한 결과, 루스벨트 대통령, 링컨 대통령, 처칠 수상, 헬렌 켈러, 간디, 마틴 루터 킹 등 거의 대부분이 어려운 가정에서 나서 큰 역경과 고난을 겪으면서 성장했고, 그 역경과 고난을 잘 극복함으로서 위대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합니다. ‘고난을 이겨내라’, ‘고난을 극복하라’, ‘고난을 이기는 자 삶을 이기고 세상을 이긴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의 메시지는 이와 다릅니다. 성경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성도는 고난과 한판 붙어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 고난을 대신하셨다는 것과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이 말하는 고난은 인생살이에서 누구나 겪는 고난이 아닙니다. 제한되고 연약한 인생이자 본질상 죄인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고난이 우리 앞에 있는데, 그 고난을 예수님께서 대신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이 말하는 고난은 이런 본질적인 고난만은 아닙니다. 

육신을 입고 이 현실 세상을 살기에 피할 수 없는 고난도 있는데, 사람에 따라, 경우에 따라 이 땅의 현실적인 고난, 육신의 고난까지도 예수님께서 대신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의 메시지입니다. 여러분의 궁극적인 고난과 이 땅의 고난을 예수님이 대신하셨습니다. 아멘? 이 믿음이 여러분에게 있다면 그 믿음이 여러분의 고난을 이기게 할 것입니다.

4. 고난이 영광이 되게 하시는 주님

그러나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고난의 현장으로 오시는 것도 은혜이고, 우리의 고난을 대신하신 것도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만,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고난에 대한 위대한 복음을 바울 사도는 로마서 8장 18절에서 선언하고 있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사람들은 사고로 인한 고난, 人災나 天災地變으로 인한 고난, 육신의 疾病으로 인한 고난, 경제적인 문제로 인한 고난, 사업이나 직업상의 고난, 인간관계의 갈등으로 인한 고난, 부부끼리의 문제 혹은 자녀 문제로 인한 고난, 직장에서의 고난, 성도간의 갈등으로 인한 고난,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 뜻대로 살기 위한 고난, 공부로 인한 고난, 취직을 위한 고난, …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고난에 대해 성경이 들려주는 놀라운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에게 있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것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영광, 너무나 놀라운 영광이 성도 앞에, 특히 고난당하는 성도 앞에 있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도대체 여기서 말하는 영광은 무엇일까요?  로마서 8장 21절은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없어질 세상에 매여 살고 육신에 매여 삽니다. 세상에서 자유하고 육신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으면 가능하다고요? 천만의 말씀! 죄인으로 죽으면 이 세상과 육신에 매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통과 억압에 매일 것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장차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맛볼 것입니다만! 성도 여러분, 세상에 매이지 않고 육신에 매이지 않는 진정한 자유와 해방! 이것이 여러분의 고난에 대한 주님의 보답이 될 것입니다.  

그 뿐 아닙니다. 여러분들에게 장차 나타날 영광은 로마서 8장 23절이 약속하고 있는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입니다. 예수님 재림하시는 날 홀연히 변화되어(고전15:51) 더 이상 욕되지 아니하고(43절), 약하지 않으며(43절), 썩지 아니하고 죽지 아니하는(54절) “영광의 몸의 형체”를 입을 것(빌3:21)입니다.  그 뿐 아니죠. 주님이 예비하신 면류관을 쓰고 주님과 더불어 왕노릇하면서 온 세상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장차의 영광, 상상할 수 없는 세계가 여러분 앞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고난이 너무 무겁다고, 여러분의 삶이 너무 힘들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곧 여러분의 영광의 크기와 넓이와 높이를 가늠케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복과 특권과 영광을 아직까지 여러분은 제대로 맛보지 못했습니다.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처럼 지금까지 여러분이 누린 은혜와 복은 정말 지극히 부분적이고 작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날, 여러분은 그 놀라운 영광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더 여러분이 예수 안에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장차 누릴 영광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고난을 이기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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