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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자의 기쁨 (빌 1: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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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자의 기쁨 (빌 1:12-18)
  

들어가는 말

지난 수요예배 때 드린 말씀입니다.
크리스천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속적인 크리스천(worldly christian)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하나님을 찾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기도는 본인의 필요, 축복, 그리고 행복에 맞춰져있습니다.
그들은 ‘나’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세상을 품은 크리스천(world christian)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명을 위해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들은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 예로 몇 사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지난 부산 수영로교회에서 열린 ‘한국교회의 이슬람대책 세미나’에서 만났던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은 북한 모 대학교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하는 분입니다.
한국 사람이지만 외국시민권을 가지고, 박사학위 소지자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발각되면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에 추방 내지는 감쪽같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사명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인하대학교 병원 교수인 김창환 의사입니다.
그도 선교사로 사역했으며 현재 의사들로 구성된 선교단체를 이끌고 있습니다.
의사라는 직업을 자기욕망을 성취하는 수단으로 쓰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을 위하여 쓰고 있습니다.
의사가 선교지로 나가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든 지위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또 의학지식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데 선교지에 있는 동안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한다는 것은 전문가로서 심각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명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헌신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처음 교회에 발을 들여놓을 때에는 세속적인 크리스쳔이었지만 주님을 만나고, 신앙이 성숙됨으로 세계를 품은 크리스쳔이 되길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힌 상태가 오히려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12절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바울이 빌립보서를 기록한 목적 중의 하나는 자신의 투옥으로 인해 근심하는 빌립보 교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에게 있어서 바울의 투옥은 단지 존경하고 사랑하는 한 목회자의 시련 정도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바울은 하나님의 사자였으며 그러한 바울의 투옥은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에게 있어서 복음의 패배로까지 보일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그러한 빌립보 교인들의 생각을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자신의 투옥이 복음의 패배가 아니라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는 계기가 되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빌립보 교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허세를 떨고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복음 전파에 진전’이란 구절에서 ‘진전’이란 말은 희랍어로 ‘프로코페’라는 명사입니다. 
이 말은 ‘나무를 찍어 가면서 전진한다.’는 뜻입니다. 
군인들이 싸우기 위해 밀림 지대를 지나게 되면 길을 만들어야 합니다. 
나무를 베어내고 찍어 버리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 이것을 ‘프로코페’라고 합니다. 
장애물을 제거한다는 뜻입니다. 
분명히 감옥 생활이라는 것은 선교에 장애물이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전하지 못하고 끝장날 것 같은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가 당한 일이 복음의 문을 닫는 사건이 아니요, 오히려 그 문을 더욱 활짝 여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더 귀하고, 더 크게, 더 신비롭게, 더 놀랍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바울의 갇힘이 어떻게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었습니까?

1. 시위대에 복음을 전할 기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13절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여기서 ‘나의 매임’이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은 본래 쇠사슬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 쇠사슬은 죄수와 간수의 손을 함께 매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집트에서  죄수들을 호송할 때를 보면, 수갑을 경찰의 손목과 죄수의 손목을 함께 묶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셋집에서 사는 것이 허락되었으나 이 집에는 주야로 그를 지키는 시위대 병사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종일 시위대 병사의 손과 함께 쇠사슬에 매여 있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이 얼마나 복음을 전하기 좋은 기회입니까? 
실제로 빌립보서 4:22절에 보면 이로 인해 상당한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
‘가이사 집 사람’이란 황제를 모시는 궁전의 신하를 가리킵니다. 
이는 복음이 시위대뿐만 아니라 로마 황제의 신하들에게도 전해지고, 또 그들 중에 믿는 자가 생겨났음을 시사해줍니다. 
실로 하나님은 위기를 도리어 기회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한 결과, 네로 황제의 박해 때에 이미 네로의 삼촌과 친척들이 예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 백해 때에는 이미 그의 어머니와 딸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 후 불과 300년도 안 되어 대로마제국이 기독교 국가로 선포됩니다. 
당시 로마의 그리스도인은 전체 인구의 겨우 7%에 지나지 않았지만 최고 고관들이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역사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바로 바울이 뿌린 복음의 씨앗이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은 비단 복음 전파에서뿐 아니라 성도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이 처한 처지와 환경만을 보고 두려워하거나 불안해 하지 마십시오. 
그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믿음의 안목을 갖게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바로 이 사실이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이유인 것입니다.

2.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전파에 큰 도전을 주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14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여기서 ‘형제’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감옥에 갇힌 바울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의연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도대체 신앙이란 무엇이기에 죽음의 공포를 뛰어 넘을 수 있을까?’ 
‘도대체 복음은 무엇이기에 감옥 속에서도 저렇게 외쳐야 되는 것일까?’ 
그들도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증거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 성도의 선봉적 신앙 행위는 다수의 사람으로 하여금 그와 같이 행동을 하도록 긍정적인 동기 유발의 계기가 됩니다. 

중근동 지방에서 기르는 양떼에는 ‘인도하는 양’이라고 불리는 노련하고 민첩한 양이 한 마리씩 있다고 합니다. 
목자가 양떼를 깊은 계곡으로 인도하려고 할 때 처음에는 양떼들이 겁을 먹고 내려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한 마리의 인도하는 양이 먼저 내려가면 모든 양떼가 그 양을 따라 계곡 아래로 내려간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처럼 교회에서도 한 성도의 선봉적 신앙적 행위가 다른 많은 성도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기도하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들을 탓하지 말고 기도의 선봉장이 되십시오.
사랑하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을 탓하지 말고 사랑의 선봉장이 되십시오. 
봉사하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을 탓하지 말고 봉사의 선봉장이 되십시오.
희생하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을 탓하지 말고 희생의 선봉장이 되십시오.
모이기를 힘쓰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을 탓하지 말고 모이기를 힘쓰는 선봉장이 되십시오.
그러면 교우들은 안보는 것 같지만 다 보고 도전과 격려를 받게 됩니다.

2007년 7월25일 아프가니스탄 경찰의 발표가 외신을 타고 한국에 전해졌습니다. 
“가즈니주 카라바그의 무샤키 지역에서 머리·가슴·배에 총탄 10발을 맞은 한국인 남자 시신이 발견됐다.”
단기선교 팀 20명을 이끌고 아프간으로 선교활동을 떠난 분당 샘물교회 배형규 목사의 시신이었습니다. 
피랍 인질들의 무사를 빌었던 가족들과 한국교회의 성도들은 깊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11일 전 7월14일, 경기 성남시 분당 샘물교회의 배형규 목사와 청년 등 20명은 단기선교와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아프간에 입국했습니다.한국에서 출발한 20명과 아프간 현지에서 합류한 안내인 3명은 19일 버스를 타고 남부 칸다하르에 있는 힐라 병원과 은혜샘 유치원으로 향했습니다. 

수도 카불에서 170㎞ 거리의 가즈니 주 카라바그 지역을 통과하다 탈레반 무장 세력에 납치됐습니다. 
배형규 목사의 살해 후 탈레반은 30일 심성민씨를 또다시 살해했습니다. 
이후로 그렇게 여론의 비난을 받았던 분당 샘물교회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문을 닫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뜨거운 선교열기로 충만해졌습니다. 

지난번 부산 수영로 교회에서 열린 ‘한국교회의 이슬람 대책 세미나’에서 발제자 중의 한 분은 그 단기 선교팀에 참여했다가 살아나온 전도사님이었습니다.
순수한 모습으로 발제하는 모습이 저에겐 너무나 감동스러웠습니다. 
어떻게 이런 현상이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배형규목사, 심성민 형제의 순교가 상상할 수 없는 도전을 많은 사람들에게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성가-비바람이 앞 길을 막아도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복음전파라는 시금석으로 자신의 삶을 평가합니다. 
다른 기준이 아닙니다.
복음전파입니다!
그래서 복음 전파에 플러스된 일이면 성공이요, 마이너스된 일이면 실패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가 고난 당하느냐 당하지 않느냐, 요즘 말로 돈을 버느냐, 못 버느냐, 출세하느냐 못 하느냐는 아무 상관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복음 전하는 일만 성공적으로 된다면, 그 거룩한 일을 위해 내가 소중하게 쓰일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다는 마음으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1장 20절에서 말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 같은 복음적 생활 철학을 확고하게 수립하고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삶이 될까요? 
이런 삶을 살게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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