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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기다림의 순례자 (고전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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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순례자 (고전 1:4-9) 

남아공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은 27년 동안 감옥에 있었습니다. 
만델라 대통령이 감옥에 있을 때에 딸이 아이를 낳아 아버지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아버지,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세요.” 
딸의 요청에 만델라는 아이의 이름을 ‘Hope’ ‘희망’이라고 지었습니다. 
“너는 희망이야. 감옥에 있는 동안 희망이 나를 떠난 적이 없었지. 
그리고 앞으로도 희망은 나를 떠나지 않을 거야.” 

만델라가 석방되던 날 전 TV에 비춰진 그의 모습을 보고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2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사람 같지가 않았습니다. 
너무나 평안하고 기쁨과 확신에 찬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대통령이 된 후에도 자신을 학대하고 괴롭힌 자들에게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한 맺힌 사람의 모습이 아닌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용서했습니다.
만델라는 세계인의 존경을 받는 평화의 상징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만델라에게서 희망이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랜 감옥생활 속에서도 그는 희망의 봄을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은 그에게 진정한 자유와 소망, 그리고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우쳐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다림은 절망을 뚫고 새로운 소망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급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기다리는 것을 못 견딥니다.
특별히 ‘빨리 빨리 병’에 걸린 우리는 기다리는 데 익숙하지 않습니다.
사탕을 입에 넣차 마자 치아 건강을 자랑하기라도 하듯 ‘으드득’ 씹습니다.

실제로 사탕을 주고 실험을 해 본 결과 한국사람이 가장 먼저 사탕을 깨트려 먹었습니다. 
자판기에 커피를 뽑는 것만 봐도 얼마나 기다리지 못하는 지 알 수 있습니다.
실험을 했는데 10명 가운데 3사람은 동전을 넣자마자 뚜껑을 열고 컵을 붙잡고 있더랍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어떻습니까?
다 나오면 불이 꺼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뚜껑을 열고 허리를 숙여 쳐다보고 있습니다.

밥을 할 때도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빨리 밥 먹겠다고 솥뚜껑을 열면 밥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뜸을 들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패스트푸드 문화, 인스턴트 문화에 길들여진 우리들이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기다림은 내일의 희망이요 꿈입니다.
기다림은 우리 인생을 성숙시키고, 풍요롭게 합니다.
기다림은 오늘의 현실을 넘어 내일로 다가가게 하는 힘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자입니다.

오늘은 교회 절기가 새롭게 시작되는 대림절입니다.
교회는 절기는 크게 대림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오순절)입니다.
대림절(Advent, Ankunft)은 대강절, 혹은 강림절 이라고도 합니다.
성탄절이 오기 전 4주간을 대림절이라고 부릅니다.

대림절의 의미는 2000년 전에 이 땅에 메시야로 오신 그리스도의 성탄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 속에, 삶의 현장에 주님께서 능력으로 임재해 주시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 다시 오실 영광의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시기입니다.
대림절 기간은 자신을 돌이켜 보며 회개하고, 깨어 기도하면서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때입니다.
그래서 대림절 기간을 “겨울철의 사순절(Winter Lent)” 이라고도 합니다.

대림절과 사순절의 색깔이 같은 보라색입니다.
보라색은 슬픔과 참회, 소망을 상징하는 색입니다.
대림절 기간은 들뜬 분위기가 아니라 차분하게 자신을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보며, 자신을 내어 놓고, 사랑과 봉사의 삶을 실천하는 중요한 절기입니다.
대림절 첫 번째 주일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태도를 말씀을 통해 점검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4절)

대림절을 맞이하는 첫 번째 자세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감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4절 말씀을 같이 읽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은혜(karis)’는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없는 신앙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믿음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 역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입니다.
화요 알파를 하시는 분 가운데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신 분 가운데 이런 말을 하셨어요.
제가 알파에 와서 보니 도우미들의 표정이 너무 밝고 환해서 기분이 좋대요.
내가 뭔데 이렇게 아무런 조건이나 대가 없이 잘 환대해 주는지 이해되지 않는대요.
그러면서 자기도 예수님을 믿고 행복해지고 싶대요.
그런데 안 믿어진대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는 것이 은혜입니다.
내가 믿어야지 라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8-9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여러분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내 행위나 공로나 의로움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그 은혜를 인하여”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은혜에 대한 반응입니다.
값없이 조건 없이 베풀어 주시는 한량없으신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베풀어 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주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배는 우리들이 무엇을 받으러 오는 자리가 아닙니다.
일주일 동안 삶의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러 오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마음과 성품과 힘과 뜻을 다하여 감사함으로 예배를 드리면 주님은 영광 받으시고, 다시 한량없는 풍성한 은혜와 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기쁨과 감격이 넘치는 예배가 이루어지는 비결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에 대한 감격이 없는 예배는 진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작고 사소한 것이라도 크게 감사하며, 반응하는 자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로 최고의 칭찬과 축복을 받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윗은 좀 튀기를 잘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블레셋에게 빼앗겼다가 다윗성으로 돌아올 때를 보십시오.
모든 백성들이 기쁨과 감격으로 법궤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드디어 제사장들이 멘 법궤가 다윗 성 안으로 들어옵니다.
다윗은 이것을 왕궁에 앉아서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길거리고 뛰어 나가 기쁨의 춤을 추며 하나님의 법궤를 맞이합니다.
그런데 너무 정신없이 춤을 춘 나머지 바지가 내려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이것을 본 부인 미갈이 왕이 체신도 없이 바지 내려가는 줄도 모르고 춤을 춘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때 다윗이 뭐라고 합니다.
‘내가 이 보다 더 큰 창피를 당한다 할지라도 주 앞에서 뛰놀리라’고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노래방에서 나이트에 가서 아무리 뛰고 놀아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기쁨으로 뛰놀면 놀라운 복이 있습니다.
다윗은 모든 백성 가운데서 하나님 보시기에 튄 행동을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웠습니다.
‘왕의 체면 다 무릅쓰고 네가 나를 그렇게 기뻐 여기는구나’
이것이 다윗이 축복을 받은 비결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시116:12)
다윗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함으로 영광 돌린 사람입니다.

바울은 고전 15:10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에서 제일 미련한 사람은 “내가했다” 라고 힘주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입술은 항상 “주님이” 주님이 내 삶의 <주어>가 되어야 합니다.
내게 주신 건강도, 가정도, 직장도, 일터도 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예배드릴 수 있는 좋은 교회를 주신 것도 은혜입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베풀어 주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런 점에서 믿음은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삶입니다.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감사가 넘칩니다.
은혜를 맛본 사람은 결코 교만하지 않습니다.
은혜를 깊이 경험 할수록 더욱 낮아지고 겸손해집니다.
대림절 아침에 올 한해 동안도 여기까지 인도해주시고 보호해 주신 에벤에셀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둘째, 재림의 소망을 가지고 오늘을 준비하라(7절)

대림절을 맞이하는 두 번째 태도는 재림의 소망을 가지고 오늘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아직’ 구원의 완성을 기다리는 자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성화가 완성되지 않은 미완성의 성도들이 모여 있기에 교회는 여전히 ‘공사중’입니다.
지구상에 있는 보편적 교회 가운데 완성된 교회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로 그 교회를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어제의 은혜를 기억하고, 내일의 소망을 가지고, 오늘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누리고 있는 현재의 삶에 빠져서, 우리의 모든 삶이 결산되는 ‘그날’을 준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기다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조급함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서두르다가 일을 그르치는 것을 봅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언약을 기다리지 못하고 그만 인간적인 생각으로 첩 하갈을 취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은 약속의 씨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조급함이 이스마엘을 낳았고, 그 후손은 이삭의 자손과 끊임없이 싸우는 불행의 씨앗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울왕도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에 사무엘 선지자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제단에 분향을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 보시기에 망령된 행동을 한 사울은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기다림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기다리지 못함으로 일을 그르친 경우는 없습니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분별할 줄 아는 것이 지혜요 능력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기다리는가 기다림의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인 기다림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유명한 성경 주석학자인 윌리엄 바클레이는 4가지로 하나님 나라를 소개합니다.

첫째로, 풍요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결핍이나 부족함이 없는 풍요로움의 나라입니다.
아모스 9:13-14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그 때에 파종하는 자가 곡식 추수하는 자의 뒤를 이으며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이으며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며 작은 산들은 녹으리라......그들이 포도원들을 가꾸고 그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들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리라’
즉, 하나님 나라에서는 아무도 주리지 않으며, 아무도 목마르지 않으며, 아무도 가난하지 않은 그런 시대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 나라는 화평과 조화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갈등과 긴장이 없습니다. 폭력과 전쟁도 없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화해와 조화를 이루는 곳입니다.
심지어 인간과 짐승 사이의 적대 관계가 사라집니다. 
이사야 11:6-9 말씀을 보면 “그 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세 번째로, 하나님 나라는 고통이 없는 나라입니다.

생노병사의 육신의 모든 고통이 사라지는 나라입니다.
더 이상 눈물이 필요 없는 나라입니다.
이사야 25장 8절을 보면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말씀하십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 나라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모든 전쟁이 끝이 나고 진정한 평화가 있는 나라입니다. 
이사야 11장 9절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32장 18절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에 있으려니와”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간의 싸움이 있습니다. 
많은 부족함과 결핍이 있습니다. 
반목과 질시가 있습니다.
전쟁과 폭력이 있습니다.
수 많은 아픔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에는 이런 것이 없습니다.
대림절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다시한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간직할 수 있기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소망한다고 가는 것은 아닙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기름을 준비하고 신랑을 기다려야 합니다.
근신하고 깨어서 언제 주님이 오셔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세상의 쾌락에 사로잡히거나, 현실의 삶에 안주하면 신랑을 놓칠 수 있습니다.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처럼 열매 맺지 못한 나무는 불에 던져질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오늘 내게 맡겨주신 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십시오.
끝까지 충성하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성하십시오.
기회 주셨을 때 충성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준비된 성도의 태도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으라(9절)

대림절을 맞이하는 우리의 태도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짧은 교회 역사를 가지고 있었지만 모든 구변(logos)과 언변(gnosis)에 탁월했습니다.
즉 영적인 방언과 영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은사와 영적인 지식이 사랑의 통제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고린도 교회 안에는 분열과 갈등, 성적인 문란함과 무질서함의 문제를 가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고린도 교회를 향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견고하게 세우실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케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바로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거룩하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랑으로 기다려 주십니다.
기다리시는 아버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탕자와 같이 아버지의 품을 떠났지만, 세상에서 허랑방탕하고 살았지만 아버지는 한 번도 집을 나가는 순간부터 탕자를 잊지 않았습니다.
매일 사랑하는 아들을 기다립니다.

누가복음 19장1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탕자는 기다리시는 아버지를 연상했습니다. 
용서해 줄 것이라는 아버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갑니다.
아버지는 아직 거리가 먼데도 돌아오는 아들을 먼저 보고 달려갔습니다. 
기다림은 먼저 보게 합니다. 
기다림은 절대 걷지 않게 만듭니다. 
달려가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 기다림이 탕자를 회복시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힘으로 능으로 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탕자와 같은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길이 참으시고 기다려주십니다.

교회는 시험 보는 곳이 아니라 훈련하는 곳입니다.
시험은 공부를 시키고 난 후에 시험을 보게 만듭니다. 
그리고 커트라인을 정해놓고 점수가 모자라면 자르면 됩니다.
그러나 교회는 점수로 채점하는 곳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합격할 때까지 계속 기다리며 훈련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시험 감독관이 되고자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결과를 가지고 쉽게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그 이유는 기다림의 영성이 사라져가기 때문입니다. 
집에서 일한 맏아들과 같이 동생을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시험 보는 곳이 아닙니다. 
어떤 죄인, 어떤 부족한 사람이 오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랄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훈련하는 곳입니다.
안되면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기다림이 우리를 회복시키고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탕자를 기다리시는 아버지는 바로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십자가의 은혜로 초청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기다리고 계신다면 우리도 인내하며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 기다림의 영성이 필요합니다.
복음의 능력은 바로 기다림 속에 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끝까지 참고 기다리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다리지 못합니다.
냄비근성을 가지고 조급함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려고 합니다.
가정에서도 부모가 자녀를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서로의 부족의 지적하고 비난하기 앞서 사랑함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사랑은 기다림입니다.(Love is patient.)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한걸음 한걸음씩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순례의 여정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관광객이 아닌 순례자입니다.
때로는 어려운 가시 밭길을 걸어갈 때도 있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아픔과 고통의 시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을 품고 기다리십시오.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신실하게 응답하시는 주님을 기대하며 기다리십시오.
주님이 바로 우리 곁에서 연약한 손을 붙잡아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일으켜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는 대림절을 맞았습니다.
우리 모두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 희망의 노래를 부릅시다.
기다림의 순례자로 희망을 가슴에 품고 희망을 노래하는 은총의 계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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