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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데메드리오 (행 19: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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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메드리오 (행 19:21-41) 
 
 
본문은 에베소에서 하나님의 도를 대적한 사건을 소요 주동자인 ‘데메드리오’를 중심으로 기록했습니다. 영적 어두움 속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에서 주님의 진리를 대적하게 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에베소 사역이 마무리 될 무렵에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면서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21)는 생각을 품었습니다. 다른 서신서들을 참고하면 당시 예루살렘 성도들이 기근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연보를 모아 돕기 위함이었지요(롬 15:25; 고전 16:3). “경영”했다는 말은 직역하면 ‘성령님 안에 계획을 두었다’(에떼토 엔 토 프뉴마티)이며(20:22), “하리라”(데이)도 ‘반드시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로마 선교가 개인의 야망에서 계획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좇은 것임이 드러나 있습니다. 땅 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데(1:8), 아직 로마와 그 서쪽으로는 복음을 전하지 못한 상태라 이런 결정을 하게 된 것이지요.

성정에 있어서는 사도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지만, 사도는 교회의 터전을 놓던 시기에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아 무오류하게 말하거나 글을 쓸 수 있는 독특한 존재였습니다. 이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주위의 상황을 고려하여 이제 무엇을 해야 할 때인가를 이미 주신 계시에 근거하여 판단하고 성령 안에서 결정합니다. 자기의 이성적인 판단만으로 결정한 것도 아니고, 지성은 전혀 사용하지 않은 채 신비하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것도 아니지요. 오늘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건전한 방식 역시 먼저 은혜의 방편인 성경의 계시된 말씀에 근거하여야 할 것이고 동시에 기도하는 중에 변하는 정황을 이성적으로 분별하면서 그분의 뜻을 점차 확인해가는 방식이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자기를 도와 사역하던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마게도냐”로 먼저 보내고 자기는 에베소를 중심으로 “아시아”에 얼마간 더 있었습니다(22). 이 무렵에 “이 도로 인하여 적지 않은 소동”이 발생했습니다(23). 누가는 ‘바울’ 때문에 소동이 일어났다 하지 않고 ‘주님의 도’ 때문에 소동이 발생했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도가 바르게 선포될 때 마술사도 회개하는 역사가 발생하는 반면 강력히 저항하는 세력도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소요의 주동자는 수하에 “직공들”을 두어 은으로 “아데미” 여신의 “은감실” 곧 은으로 신상이나 신전 모형을 만들어 성공적인 판매를 해오던 사업가 “데메드리오”였습니다(24).

“아데미”는 가슴부위에 24개의 동그란 알 모양을 가지고 있어 생식과 다산을 관장하는 하늘에서 내려온 모신(母神)으로 숭배되었습니다. 다른 지역의 운석 숭배처럼 여인 모습 비슷한 운석이 떨어지자 하늘로서 내려온 신으로 여기고 받들었던 것 같습니다.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한 건축물 중 하나이기도 한 아데미 신전은 가로 세로가 약 120m×60m로 아덴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4배나 큽니다. 20m 높이의 127개 대리석 원기둥들은 이음매가 금으로 처리되었습니다.

아데미 신전은 에베소와 아시아 경제의 중심이기도 했습니다. 신전 주변에는 몰려드는 여행객들을 위한 음식점과 숙박소들과 기념품 가게들이 즐비했고, 신이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돈을 신전에 맡기는 외국인들도 많아서 신전을 중심으로 금융업이 성행했습니다. 특히 5월은 아데미 숭배를 위해 바쳐진 달이어서 아시아에서 가장 큰 초대형 축제가 에베소에서 열렸고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했습니다. 데메드리오는 “직공들과 이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놓고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유족한 생활이 이 업에 있는데”(25)라고 했는데, 아데미 숭배가 그들의 생활과 사업과 핵심적인 위치에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데메드리오는 최근의 매상이 부쩍 줄어든 이유를 분석했습니다. 기업의 지도자격이니 경기 변동과 시세에 대해서는 민감한 촉수를 가지고 있었겠지요. 분석한 결과 바울이 전하는 기독교 교리 때문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우상 숭배를 반대하고 유일신을 믿는 사상은 유대교도 가르쳤겠지만, 이방인 전도는 잘 하지 않는 유대교는 그동안 별 영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허다한 사람을 권유”한 “바울” 때문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26a). 마냥 이렇게 방치했다가는 우상 사업 전체가 망하겠다는 판단 하에 어떻게든 기독교의 전파를 막아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게 된 것이지요.

복음의 놀라운 영향력을 발견했을 때, 데메드리오는 에베소의 마술사들처럼 우상 숭배를 중단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진리를 대적하기로 결심하고 동조자들을 모았습니다. 그들을 선동하는 세 가지 근거가 제시되었는데, 첫째는 반진리의 관점에서 시도되었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26b)는 진리에 대해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하고 반박했습니다. 진리에 대해 아예 귀를 막아버리고 오히려 반진리로 공격하는 모양세지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참된 신앙이 무엇이며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 선포했는데, ‘그건 말도 안됩니다’라고 대적해버리면 더 이상 가르칠 수가 없고 모든 대화는 원천 차단이 됩니다.

둘째는 명예의 관점에서 제시되었습니다. “우리의 이 영업만 천하여질 위험”(27a)이라는 말은 에베소 문화를 주도하는 사업이라는 명예가 미신을 조장하는 천박한 장사치로 전락한다는 우려를 담고 있습니다. 그들이 만든 은감실이 단지 모조품이나 기념품이 아니라 신통력을 담고 여러모로 효험이 있다고 알려질 때 좀 더 비싼 값으로 팔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그들의 직업이 숭고해집니다. 에베소의 민속 문화를 보존하고 보급하고 있다고 생각하게끔 하면 보람도 느낄 수 있고 일종의 무형문화제라는 명예도 가질 수 있지요. 이처럼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회적 평판과 마땅히 누릴 수 있는 직업적 명예가 실추될 것을 내다본 것입니다.

셋째는 종교적 경건을 내세운 경제적 관점에서의 반박입니다. “큰 여신 아데미의 전각도 경홀히 여김이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27b). 현재 누리고 있는 생활의 유족함과 직업적 명예가 모두 아데미와 관련이 있는데, 아데미의 위엄이 떨어지면 몽땅 상실될 것을 염려했습니다. 아데미를 참으로 믿느냐 안 믿느냐하는 종교적 경건은 나중 문제입니다. 사실 데메드리오의 열변 속에는 바울 한 사람 때문에 자기 위엄조차 지키지 못하는 아데미의 무능함이 역설적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결국 데메드리오에게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아데미의 위엄보다 그것과 함께 동반 추락할 ‘소득의 감소’라는 결과입니다. 

데메드리오의 연설을 통해 ‘내 삶에 손해가 생기고 내 명예가 실추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청중들이 격렬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분이 가득하여”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고 외쳤고, “온 성”의 확산디었습니다(29-30). 내게 손해 날 일이 없었다면 아데미를 참신으로 신봉하는 광신자들 외에는 잠잠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우상 하나에 자신의 생활과 명예를 몽땅 걸고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데미가 신이든 아니든 아데미를 잃으면 직업을 잃고 지금껏 힘써 왔던 삶의 보람을 잃고 인생을 망친다고 생각하니 눈이 뒤집혀지는 것이지요. 결국 이들이 표면적으로 섬긴 것은 아데미 여신이지만, 사실은 ‘자기’라는 우상을 섬겼습니다.

우상 숭배는 근본적으로 자기 숭배입니다. 자기 행복과 영광을 탐닉하는 마음이 에베소 사람들에게 아데미 숭배라는 형식으로 나타났지만, 모든 종류의 우상 숭배는 결국 자기 숭배의 다양한 외적인 표현일 뿐입니다. 자기 행복과 자기 영광에 탐닉하는 그러한 “탐심”이 곧 “우상 숭배”입니다(골 3:5). 하나님 백성은 마음의 태도나 추구하는 삶의 목적에서 우상 숭배자들과 근본적으로 달라야 합니다. 성경은 주님을 따름에 있어서 반드시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는 것과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과 이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마 16:24; 고전 10:31; 눅 14:26).

물론 행복을 누린다는 것은 기독교인에게도 중요합니다. 소득이나 명예도 소중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보다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기 위해 필요하다면 기꺼이 손해를 감수해야 하고,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하다면 기꺼이 헌신도 해야 참 성도이지요. 기독교가 단지 자기 행복과 영광을 추구하기 위한 방편이라면 우상 숭배자의 마음가짐과 똑같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이러한 자기 추구가 있다면, 데메드리오 같은 선동가가 나타나 연설할 때 언제라도 참된 진리를 대적하는 무리에 속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 영광과 자기 행복에 대한 희생을 각오하지 않은 기독교 신앙은 성경 앞에서 철저한 자기 점검이 필요합니다.

32절을 보면 소동에 가담했던 사람들 중 태반은 어찌하여 모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동하는 분위기에 휩쓸렸음을 알 수 있지요. 그들은 두 시간 동안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34)라고 외치며 광적인 신앙심을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서기장이 이런 “불법 집회”는 로마 당국으로부터 엄중한 문책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하자 해산합니다(40). 자기 종교에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것 같다가도 막상 ‘자기 안전’을 위협받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손해를 감수하지 않는 태도는 자기희생을 각오하고 백성 가운데 들어가려던 바울의 태도와 대조됩니다(30). 서기장도 결국 ‘자기 안전’을 추구하기 위해 소요를 막은 것일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각 사람이 추구하는 바를 섭리적으로 사용하셔서 결국 진리를 대적했던 악한 소요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 사건의 마무리는 자기 위엄과 자기 추종자들을 지켜주지 못했던 아데미 우상과 감히 비교할 수 없으신 분을 생각하게끔 합니다. 자기 백성을 지키시는 참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는 우상 숭배자들이 가진 관점이나 태도들과는 분명한 구별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해결해야 할 숙제는 그 옛날 에베소의 데메드리오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데메드리오적인 요소일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도를 사랑하며 자기 명예나 자기 유익보다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삼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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