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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고후 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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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고후 6:1-2)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천국 문 앞에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저 멀리서 아주 눈에 익은 노인 한 분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깜짝 놀라며 그 노인을 붙들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저, 혹시 세상에 계실 때 목수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예, 그랬지요.”, “그럼 혹시 아내를 통해 낳지 않은 아들이 하나 있지 않았는지요?”, “아니, 그걸 어떻게 아시지요?”, “그 아들이 본래 사람이 아니었지요?”, “네 맞아요.” 예수님은 감격에 북받쳐서 계속 질문을 합니다. “그 아들의 손과 발에는 못 자국이....”, “네 그렇습니다.” 그 대답을 들은 예수님이 노인을 와락 끌어안으면서 “아버지, 접니다. 제가 바로 세상에 살 때에 당신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말합니다. “아니, 그럼 네가 정말로 피노키오란 말이냐?” 

성공하려면 성공에 익숙해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행복해지려면 불행과 사귀라는 말도 있습니다. 사람이 즐겁게 살려면 웃음과 친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연구에 의하면 아이들은 하루에 400번을 웃는다고 합니다. 반면에 어른들은 15번 밖에 웃지 않는다고 합니다. 요즘 같으면 어디 15번이나 웃겠습니까?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웃음과 친해져서 즐거운 삶을 찾아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가까이 하고 친해져야 내 것이 되는 법입니다.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로운 삶을 살려면 은혜와 친해져야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받은바 은혜대로 살아가는 삶에 은혜가 은혜 되는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철학자 [파스칼]은 말하기를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밖에 없다.” 고 했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죄인 됨을 알고 사는 죄인이 있고, 또 하나는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고 고집부리면서 사는 교만한 죄인, 이 두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달리하자면 이렇게도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은혜를 아는 사람이 있고,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안 입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알든지 모르든지 상관없이 이미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은혜 속에 태어나서 은혜 속에 삽니다. 하지만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은혜를 배반하며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은혜와 친숙한 사람이 있는 반면에 은혜와 사귀기조차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빅토 프랭클(Victor E. Frankl)]이라고 하는 심리학자가 인간실존의 필수조건 세 가지를 이야기하는데 그 첫째가 영성입니다. 인간에게는 이 세대 이 순간만 가지고는 아무 의미가  없고 영원한 것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가 자유입니다. 그런데 그 자유란 물질로부터, 욕심으로부터, 명예로부터, 시기 질투로부터 내 영혼이 완전히 자유로울 때 인간은 비로소 높은 가치의 생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인간 실존 가치는 책임성 있게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에 책임을 질 줄 아는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야 그것이 진정한 인간실존가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은혜를 안다면, 그리고 그 은혜를 받아 누리고 있다면 제대로 살아야 합니다. 은혜 받은 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려면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로 은혜 되게 하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은혜가 은혜 되려면 먼저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깨달음이란 참으로 중요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은혜를 은혜로 아는 지식이 있어야 비로소 감격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은혜인 줄 모르는데 감격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은혜 가운데 살면서도 은혜를 모릅니다. 여러 가지 지식이 필요하겠습니다만 은혜를 아는 지식, 은혜로 깨닫는 지식이 정말 필요합니다. 

그럼 생각해 보십시다. 언제 은혜가 더 크게 와 닿습니까? 은혜에 대한 감각지능이 가장 민감할 때가 언제이냐 말입니다. 역경 속에 있습니다. 가장 어려웠을 때에 은혜에 대한 감각이 가장 민감하다는 말입니다. 배고픈 사람의 코는 엄청나게 예민합니다. 여러분, 배고플 때는 무슨 냄새이든지 다 좋지 않습니까? 뭐든지 배부르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은혜에 대한 것도 그렇습니다. 고마운 마음이란 게 내가 어려울 때, 내가 힘들었을 때 그 느끼는 감각지수가 훨씬 큽니다. 여러분들도 생각해 보십시오. 언제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크게 느껴집니까? 어려워서 힘들어서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습니다. 세상 적으로, 인간적으로 살아갈 희망조차 없어서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일으켜 세워 주시고 살려주셨습니다. 아마 그때의 그 은혜는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 되게 하고, 그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비결은 내가 하나님 앞에 연약한 자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고백이 크면 클수록 나에게 오는 은혜도 더욱 큰 것입니다. 고로 우리는 교만할 것이 아닙니다.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겸손하게 도움을 바라며 사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가장 잘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은혜를 입은 사람의 마음에는 나 자신의 의가 부정됩니다. 그래서 내 공로도 아니고, 내 진실도 아니고, 내 의도 아니고, 내 노력도 아니고, 내 지혜도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나는 다 없어지고 오직 은혜만 남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 속에 숨겨진 깊은 뜻이요, 은혜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가 잘하는 말로 은혜를 쏟아버리지 말아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주일예배에 은혜를 듬뿍 받고는 나가면서 말 한마디로 그 은혜를 다 쏟아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 말하는 재주가 어쩌면 저것밖에 안되냐!” 싶은 사람입니다. 그런가하면 행동 하나로 평생 받은 은혜를 순식간에 쏟아버리는 안타까운 사람도 있습니다.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은혜를 주신 이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왜 은혜를 주셨겠습니까? 설마 그 은혜로 남을 괴롭히라고 주셨겠습니까? 남을 업신여기라고 주셨겠습니까? 자랑이나 하라고 주셨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는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 보답이 무엇입니까? 가장 먼저는 하나님께 돌려 드릴 것을 마땅히 드려야합니다. 원래 나의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이 부족한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맘대로 누리고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누리고 삽니다.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다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부분이 있고 이웃에게 베풀고, 다른 사람에게도 나눠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보답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내면이 달라져서 삶의 의미가 변화되고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만 심지어는 얼굴까지 달라집니다. 은혜 받은 사람의 얼굴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얼굴은 표정에서 다릅니다. 은혜 받은 사람의 얼굴은 생글생글한 미소로 다른 사람도 기분 좋게 만듭니다. 하지만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면 무슨 세상 불만은 혼자 다 가진 것처럼 입이 대엿 발 튀어나오고, 눈은 벌겋게 충혈 되고 입만 벌리면 불평에 불만에,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기는커녕 시험에 들게 만듭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 이제 우리가 은혜를 지켜가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무엇보다도 겸손해야 됩니다. 은혜의 극치는 뭐니 뭐니 해도 겸손입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겸손하든지 겸손한 그 만큼 은혜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은혜를 모릅니다. 은혜 받았다가도 쏟아버립니다. 은혜는 받으면 받을수록 점점 더 겸손해집니다. 점점 더 자신은 낮아집니다. 모든 사람이 나보다 훌륭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나보다 의롭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해질 때 아무도 원망할 마음도 없고 주어진 현실 그대로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은혜를 주실 뿐 아니라 겸손하게 하는 은혜를 주셔서 은혜를 보존하도록 하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받은바 은혜로 말미암아 교만해질까봐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질병이 있어서 고민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을 때 하나님의 응답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고 응답 받은 이야기는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겸손했습니다. 그리고 은혜에서 은혜로 계속 겸손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 고전 15:10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다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사도바울은 은혜 받은 자신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은혜 받는 것도 중요하고 은혜 받은 자신을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두뇌강국 마스터플렌 프로젝트>라는 운동이 있습니다. 지식으로 경제를 살리고 두뇌강국이 되어 선진국을 따라잡자는 취지로 시작되었습니다. 국제경영전력분야의 세계적인 전문가로 알려진<하버드 대학>의 [로자베스 모스 캔터] 교수는 기업성공의 비결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사람의 몸이 아니라 머리가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곧 사람들로부터 나오는 지식이야 말로 성공의 비결이라는 뜻입니다. 전면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세계 경제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두뇌강국 프로젝트는 우리의 유일한 무기인 지식의 칼날을 잘 세우자는 것입니다. 결국은 아는 것이 모르는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이러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지식위의 지식이 필요합니다.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야말로 일상의 어떤 지식보다 훨씬 강한 무기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졌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대로 지금은 은혜로 살아야 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받은바 은혜를 쏟아 붓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은혜 받은 대로 보답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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