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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은 고난 백화점 (시 1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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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고난 백화점 (시 119:71)

인생은 고난 백화점이라는 말은 백화점에 다양한 물건들이 있는 것처럼 인생에는 다양한 고난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설교는 고난이라는 주제를 다룰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이 주제에 대한 감동을 받은 후 잠간 고민을 해봤습니다. 내일은 설날입니다. 우리나라의 가장 큰 명절입니다. 명절 대목에 고난이라는 주제가 어울리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이럴 때는 좀 더 편안한 주제가 좋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달리 생각해보면 고난이라는 주제의 설교는 꼭 필요한 설교라고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크기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든 사람은 육체를 입고 살아가는 동안 고난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고난에 대한 이해가 되지 못하면 신앙생활을 바르게 할 수 없습니다. 이 주제를 이해하지 못하면 신앙생활에 갈등이 많습니다. 그런 갈등이 우리들의 신앙을 침체 시키는 것입니다.
   
제가 고난이라는 주제를 다룰 때마다 언급하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욥 5:7입니다.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 불꽃이 위로 올라가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인생에 고생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중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고생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성경을 펼쳐놓고 봐도 고난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나름대로의 고난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선민입니다. 하나님께서 천하 만민 가운데서 특별히 구별시킨 민족입니다. 그런 그들도 엄청난 고난을 당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고난을 당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합당했던 인생을 살았던 다윗도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의 인생에 고난이 있는 것일까요? 오늘 설교는 그 이유를 다각도로 조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난의 이유, 그것을 이해하게 되면 고난을 받아드리는 자세가 달라질 수 있고, 고난에 대한 반응이 달라지기 때문에 고난이 유익이 될 것입니다.
   
본문에서 고난당하는 것이 유익이라고 말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들은 주의 뜻을 배워야 합니다. 시 119:67을 보니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에서 벗어난 길을 가던 사람이 고난을 통해서 말씀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죄로 인한 고난이 있습니다. 
   
창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와 대화를 나누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대화의 내용 중에 아담과 하와가 받아야 하는 고난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여자는 임신하는 고통과 출산의 고통이 있고 남편에게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남자는 평생 수고하여야 합니다. 땀을 흘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보시자마자 “생육하라. 번성하라.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5대 축복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갑자기 사람을 저주하시며 사람이 받아야 할 고난을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아담과 하와가 범한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다 주시면서 단 한 가지 금하신 것이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입니다. 그것은 조물주와 피조물의 경계선입니다. 그것을 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유혹을 받아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어버렸습니다. 그 죄의 결과로 인하여 인간에게 고통이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요 5장에 보면 주님께서 베데스다 연못에 있던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후에 성전에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5:14) 그 사람이 38년 동안 병으로 고생했던 이유는 죄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마 9장에 보면 주님이 중풍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9:2) 이 사람 역시 죄 때문에 중풍병에 걸린 것입니다.
   
모든 고난이 죄 때문은 아닙니다. 그런데 만약 죄로 인해서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하나님 앞에 죄를 자백하고 그 죄를 끊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만약 죄로 인하여 고난당하는데도 죄를 버리지 못한다면 고난의 강도를 더 높이실 것입니다. 고난의 강도를 더 높였는데도 죄를 버리지 않는다면 또 다시 고난의 강도를 더 높이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이 계속 되는데도 죄를 버리지 못한다면 결국은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혹시라도 버리지 못한 죄 때문에 고난이 찾아오면 속히 죄를 버리고 경건한 생활로 돌아서기를 바랍니다.
   
경상도 어느 시골 교회에 한 사람이 교회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교회생활을 오래 하니 집사가 되고 또 장로가 되었습니다. 이분이 장로가 되었지만 끊지 못하고 있는 게 하나 있었습니다. 담배입니다. 담배 핀다고 지옥 가는 것은 아니지만 장로로서 구실을 하기가 부끄러웠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끊으려고 노력을 해도 담배의 유혹을 이길 수 없어서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분이 목사님 몰래, 교인들 몰래, 자식 몰래, 아내 몰래, 담배를 피는데 가장 좋은 장소가 화장실이었습니다. 옛날 화장실에는 구더기가 많았습니다. 구더기가 많으니까 여름에는 거기다가 석유를 한 번씩 뿌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아내가 석유가 없어서 휘발유를 한통 뿌렸습니다. 그걸 모르는 장로님이 그날도 몰래 담배를 피우고 담배꽁초를 밑으로 딱 떨어뜨린 순간 불길이 확 솟았습니다. 온몸에 화상을 입었습니다. 화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목사님이 심방을 갔더니 해괴망측한 자세를 하고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중얼중얼 내뱉더랍니다. “하나님 잘못 했습니다. 용서해 주이소. 확 끊어버릴 겁니다. 아이구 아파라. 확 끊어버릴 겁니다. 아이구 아파라. 한번만 용서해 주이소” 그러더랍니다. 이 장로님은 그 고난으로 인하여 담배를 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담배를 피우는 분이 있다면 끊기를 바랍니다. 백해무익한 것이 담배입니다. 미국의 워싱턴 대학에서 2년 간 담배를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술로 죽는 사람이 천 명이라면 담배로 죽는 사람은 만 명이 된답니다. 그리고 2년 간 동물들에게 담배 연기를 뿜어댔더니 담배 연기가 닿는 부분에 암이 발생하는 비율이 44%였답니다. 
 
2. 연단으로 인한 고난이 있습니다. 
   
옛날 대장간에서는 단단한 칼을 만들기 위해서는 철을 연단했습니다. 불에 넣어서 달구고 꺼내서 망치로 두들깁니다. 그리고 물에 넣어서 식히고 다시 불어 넣었다가 꺼내서 또 두들깁니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단단한 칼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을 연단하시는 방법도 동일합니다. 고난이라는 방법으로 우리를 연단하셔서 귀하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성경 욥 23:10에서 욥이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저는 고등학교 다니면서 성가대 의자에서 잠을 자고 전도사 생활을 할 때에는 교회 유아실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저는 그 과정이 하나님께서 저를 연단하신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조각가가 바위를 가지고 작품을 만들려면 망치와 정을 가지고 두들기고 깨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바위는 깨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깨는 작업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작품으로 재창조하시는 것입니다. 그 과정이 우리들에게는 아픔이고 고난인 것입니다. 고난의 과정을 잘 통과하면 반드시 좋은 날이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고난을 이겨냅시다.
   
어느 목사님이 시골에서 전도사 생활을 하면서 닭을 키우면서 고난의 비밀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모든 새들은 봄에 새끼를 낳습니다. 꿩, 닭, 참새, 제비, 비둘기, 종달새 모든 새들은 다 봄에 알을 낳습니다. 닭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런 새들은 너무 일찍이 태어나니까 너무 춥습니다. 병아리도 4월, 5월에 깨어난 것 추위와 싸워야 한답니다. 초봄에 바람이 막 불면 얼마나 춥습니까? 그런데 태어나서 살기 어려우니 “삐약, 삐약” 하면 어미가 품어주고 힘들게 자랍니다. 그러나 그 병아리는 9월 10월만 되면 벌써 알을 낳습니다. 잘 자랍니다. 

그런데 어떤 닭은 늦게 알을 낳습니다. 그래서 7, 8월에 병아리가 깨어나는데 이것은 태어나서는 고생을 안 합니다. 날씨가 따뜻하니까 너무 좋습니다. 그러나 초가을에 추위가 오면 그 닭은 견디기 힘들어한답니다. 어린 시절 추위를 통과하지 못한 닭들은 겨울을 보내지 못하고 모두 죽습니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 연단을 받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사람도 똑 같습니다. 7, 8월에 태어난 병아리들처럼 어린 시절 고난 없이 자라면 환난과 시험을 당하면 자살해버립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눈물 흘리고 수고하며, 고생하면서 큰 사람은 오히려 자신이 흘린 눈물 때문에 지도자가 되어서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줍니다. 자기가 아파 봤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있습니다. 고난에는 이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고난의 의미를 잘 알고 고난을 잘 통과하기 바랍니다. 
 

3. 과정으로서의 고난이 있습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 중에 하나가 신앙생활은 길게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목요일에 전라도 광주에 가서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가는 길에 통과해야 할 도시들이 많았습니다. 수원, 안성, 천안, 공주, 익산, 전주 등 많은 도시를 통과했습니다. 그 도시들은 저의 목적지를 가기 위해서 통과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궁극적인 목적지를 정해두셨습니다. 그 목적지를 향해서 가다보면 좋은 일도 있고 고통스러운 일도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당하는 좋은 일이나 고통스러운 일은 과정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애굽의 총리에 앉게 하시므로 7년 대흉년을 예비케 하고 그로 말미암아 히브리인들을 보호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혈통을 보호하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요셉은 그 자리에 가기까지 아버지 밑에서 자색 옷을 입고 왕자처럼 살기도 했고,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종으로 팔려서 종살이도 했습니다. 또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해서 억울하게 감옥살이도 했습니다. 요셉이 아버지 밑에서 지냈던 것이나 종살이, 옥살이는 총리가 되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우리는 요셉의 인생을 보면서 그를 종살이하던 순간만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또 옥살이하던 순간만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요셉의 인생 전체를 조망하면서 그를 판단합니다.
   
우리 각 사람은 자신이 알든 모르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가지고 계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때로는 푸른 초장도 통과하고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통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적지를 향해서 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푸른 초장이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목적지가 아닙니다. 과정입니다. 
 

4. 사명을 버림으로 인한 고난이 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해야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명을 버리고 욥바에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배 밑창에서 잠을 자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바다에 던져져서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죽지 않고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합니다. 그 때 요나의 고백 중에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욘 2:2) 여기서 스올은 음부를 말합니다. 이 단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요나가 죽음의 고통, 지옥의 고통을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나의 고난은 사명을 버린 이유 때문에 찾아온 것입니다.
   
저는 간혹 사명을 뿌리치고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다가 고난을 만나고 그 고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목회의 길에 들어선 목사님들을 만났습니다. 그분들의 한결 같은 고백은 자신이 고난당한 이유는 사명을 버렸기 때문이랍니다. 인생은 사명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것은 목숨을 걸만한 사명을 발견하고 하루를 살아도 사명대로 사는 것입니다.
   
사명을 버리는 것은 꼭 고의적으로만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도 모르게 사명의 길을 가지 않는 경우가 흔합니다. 초대교회 때 예루살렘 교회가 핍박을 받아서 온 세계로 흩어졌던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A.D 70년에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100만 명이 죽음을 당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그 환난을 피하게 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교회가 핍박을 통해서 흩어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교회에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흩어져서 복음을 전할 사명을 주셨지만 그 사명을 감당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핍박을 사용하신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교회에 고난을 허락하셔서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사명을 버림으로 당하는 고난은 사명을 회복하면 사라집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고 사명대로 살기로 하자 하나님께서 물고기에게 명하셔서 요나를 육지에 토해내게 하시므로 음부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5. 연대책임으로 인한 고난이 있습니다. 
   
내가 어떤 공동체에 속해 있는데 그 공동체가 어려움을 당하면 나도 그 어려움을 함께 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연대책임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에 유대는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을 당합니다. 유대의 멸망은 유대인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심판으로 인한 고난은 불의한 자들만 당하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린 그를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선지자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는 유다의 멸망을 가슴 아파하며 눈물을 강물처럼 흘리며 중보 하던 사람입니다. 예레미야는 그렇게 경건 했던 사람이지만 유다가 당하는 고난을 함께 당해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경건한 예레미야도 그 당시 불의했던 유대인들과 같은 나라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 벧전 2:19에서는 이런 고난을 ‘부당한 고난’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남이 잘못했는데 내가 고난을 당하는 일이 있습니다. 앞차 운전자가 잘못 운전을 해서 사고가 났는데 뒤 따라가던 내가 억울하게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고난은 부당한 고난이지만 지구 공동체에 함께 속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당해야 하는 고난입니다.
   
요즘 MBC 방송국에서 [남극의 눈물]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제가 그 프로그램을 보지는 않았지만 환경오염으로 인해서 발생한 지구의 온난화의 현상으로 남극에서 일어나고 있는 생태계의 비극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 남극에 살고 있는 짐승들이 지구 온난화를 일으킨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지구 공동체 안에 속해 있기 때문에 남극의 생태계도 함께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빠가 사업을 하다가 부도가 났으면 아빠만 물질적인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엄마도, 아이들도 함께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족 공동체의 일원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벧전 2:19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6. 자업자득으로 인한 고난이 있습니다. 
   
자업자득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제가 저지른 일로 하여 스스로 그 결과를 받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입니다. 성경 갈 6:7에 보면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은 많은 경우 자업자득입니다.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사람은 식습관이 중요합니다. 많은 경우 잘못된 식습관에서 질병이 찾아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체질에 관련된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에서는 태양, 태음, 소양, 소음의 4체질이 아니라 수양, 수음, 목양, 목음, 금양, 금음, 토양, 토음이라는 8체질을 말합니다. 제가 그 책을 읽으면서 제 아들 하은이와 저의 체질을 쉽게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제 아들 하은이는 금양체질로 기억합니다. 비염이 있고, 코감기가 잘 걸리고, 아토피가 있고, 음식 알러지가 있습니다. 이런 체질은 가난한 시절에 태어나서 채식만 하면 아주 건강할 체질입니다. 그런데 좋은 시절에 태어나서 육신을 하기 때문에 몸에 이상이 생기는 체질입니다. 하은이가 비염이나 알러지 등으로 고생을 하는 이유는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은이의 몸의 고통은 자업자득인 것입니다.
   
그 책의 저자는 한의사인데 건강한 노인분들에게 체질 검사를 하고 먹어도 되는 음식과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을 가르쳐주면 한결같이 “아니, 어떻게 내가 좋아하는 음식만 먹으라고 합니까?”라고 말합 답니다. 반대로 몸이 약한 노인분들에게 체질검사를 해주고 먹어도 되는 음식과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을 가르쳐주면 한결같이 “아니, 어떻게 내가 싫어하는 음식만 먹으라고 합니까?”라고 말한 답니다. 결국 건강한 노인들은 자신의 몸에 맞는 음식을 먹었기 때문에 건강한 것이고, 병약한 노인들은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어서 몸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노인들의 건강 유무는 거의가 자업자득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경우가 자업자득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씨를 뿌린 사람은 부정적인 열매를 거두는 것이고, 긍정적인 씨를 뿌린 사람은 긍정적인 열매를 거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씨를 뿌리고 좋은 열매를 거두도록 범사에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자업자득으로 인한 고난이 있습니다. 
 

7. 자기 십자가로 인한 고난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이 주님에게 지기를 원하셨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과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각자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 자기 십자가란 무엇입니까? 피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짊어져야 하는 고난이 십자가입니다. 부모에게는 자녀가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자녀에게는 부모가 십자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내에게는 남편이 될 수도 있고 남편에게는 아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질병이 십자가일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가난이 십자가일 수도 있습니다. 사명이 십자가인 사람도 있고, 가족은 아니지만 떨어질 수 없는 사람이 십자가일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교회가 십자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경 골 1:24에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했습니다. 또 사도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십자가였습니다. 그것이 안질인지 간질인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안질이 맞을 겁니다. 그의 지병은 그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질병이 자신에게서 떠나가게 해달라고 주님에게 세 번이나 간절하게 기도했는데 기도하다가 이런 응답을 받았습니다. 성경 고후 12:9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그 응답을 받은 사도 바울은 질병을 자기의 십자가로 받아들였습니다.
   
십자가는 짊어져야 합니다. 회피하면 안 됩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기도하시면서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신 후에 십자가를 받아드리셨던 것처럼 우리도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고난 없는 신앙생활을 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적당한 고난을 통해서 우리들이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1984년 LA 올림픽 때 오프닝 순서를 위한 멋진 아이디어가 나왔습니다. 국가가 연주될 때 올림픽 주경기장 서쪽으로부터 미국을 대표하는 새인 흰머리 독수리 한 마리가 날아 오른 후 경기장 잔디 아래로 낙하하여 오륜기가 있는 횃대 위에 사뿐히 내려앉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전문적인 조류학자들과 조련사들이 동원되어 밤비라는 이름의 독수리를 선정하여 특별히 고안된 훈련을 시켰습니다. 드디어 연습 비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시도에서 밤비가 운동장 한복판에 떨어져서 죽고 말았습니다. 밤비는 멋진 곡선을 그리며 비행하는가 싶더니 그만 중심을 잃고 운동장 한복판으로 급강하하여 땅을 찍고 즉사했습니다. 전문가들이 사인을 조사해 보니 밤비가 너무 잘 먹어서 살이 많이 쪘기 때문에 날개의 균형을 잃고 공중에서 떨어져 죽은 것이랍니다. 밤비에게 너무 좋은 환경이 오히려 밤비를 죽이는 독이 된 것입니다.
   
성경은 고난이 복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난 중에도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난 중에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너무 좋은 환경이 주어지면 의도적으로 긴장하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밤비처럼 신앙이 추락할 수 있습니다. 고난에 감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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