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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훔서의 3대 메시지 (나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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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훔서의 3대 메시지 (나 1:1-8)

대선지서는 분량이 많은 책이고 소선지서는 분량이 적은 책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대선지서는 4권이고 소선지서는 12권인데 나훔서는 12권의 소선지서 중 7번째 책입니다. “니느웨에 대한 중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나 1:1). 나훔 선지자의 고향은 엘고스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묵시의 글이라'는 것은 나훔 선지자가 공부하거나 연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로 주셔서 알게 된 말씀을 증거했다는 의미입니다. 

나훔서의 내용은 ‘니느웨에 대한 중한 경고’입니다. 니느웨가 죄악으로 말미암아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나훔 선지자가 예언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두 가지입니다.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와 앗수르의 왕입니다. “니느웨가 황무하였도다” (나 3:7). “앗수르 왕이여 네 목자가 자고 네 귀족은 누워 쉬며 네 백성은 산들에 흩어지나 그들을 모을 사람이 없도다” (나 3:18).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도 망하고 왕도 망할 것이라는 두 가지 내용입니다. 
 
앗수르는 나훔이 예언을 마친지 50년이 지나 B.C. 612년 바벨론 군대에 의해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나훔’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위로(consolation)입니다. 앗수르는 북 왕국을 B.C. 721년에 멸망시키고 B.C. 701년 히스기야 왕 때 남 왕국을 침공하여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나훔이 증거하는 앗수르가 망할 것이라는 내용의 예언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나훔서의 기록시기는 나훔서 자체 내용을 가지고 알 수 있습니다. 나훔서를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앗수르 왕이 남 왕국을 침공하기 이전입니다.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 사특한 것을 권하는도다” (나 1:11).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은 B.C. 701년 앗수르의 왕 산헤립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의 군대장관 랍사게가 남 왕국을 침공하여 유다의 성읍들을 정복하고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지 마라. 여호와를 의지하면 승리한다는 히스기야 왕의 말을 믿지 마라.”라고 하면서 사특한 것을 권했습니다. 그러므로 나훔서의 시작은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B.C. 701년 히스기야 왕 때 남 왕국을 침공하기 그 이전이었다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나훔 선지자의 예언이 끝난 시기는 나훔 3장 8, 10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네가 어찌 노아몬보다 낫겠느냐 그는 강들 사이에 있으므로 물이 둘렸으니 바다가 성루가 되었고 바다가 성벽이 되었으며” (나 3:8). “그가 포로가 되어 사로잡혀 갔고 그 어린 아이들은 길 모퉁이 모퉁이에 메어침을 당하여 부숴졌으며” (나 3:10). 

노아몬이라는 도시는 나일 강과 홍해 사이에 있는 애굽의 수도입니다. 이곳은 테베라고도 불리었는데 이곳이 B.C. 664년 멸망당했습니다. 이처럼 노아몬이라는 애굽의 수도도 멸망당하는데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멸망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통해 나훔의 예언은 노아몬이 멸망하던 B.C. 664년 이후까지 계속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훔의 예언은 B.C. 701년 이전에 시작되어 B.C. 664년 이후까지 계속된 것입니다. 이사야와 미가는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왕 때 예언을 했고 그들의 예언이 끝나자 하나님께서는 나훔을 일으켜 히스기야, 므낫세, 암몬, 요시야 시대에 계속해서 예언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증거하는 증인을 세우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시대에 유능한 설교자가 있었다가 죽으면 설교자가 없어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세대에 다시 새로운 설교자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Ⅰ. 나훔서는 모든 국가와 모든 개인은 하나님을 향해서 책임성(accountability)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나훔서에는 실제적인 교훈이 많이 있지만 중요한 세 가지 메시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메시지는 모든 국가와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책임을 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앗수르는 하나님께서 택한 나라가 아니라 이방 국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앗수르라는 이방 국가의 죄악에 대해서도 책임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나 1:2).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만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택한 백성을 향한 제한된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고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보복하시는 분입니다. 앗수르라는 이방 국가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나훔 3장 1절과 4절을 보면 니느웨의 죄악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피 성이여 그 속에서는 궤휼과 강포가 가득하며 늑탈이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나 3:1). “이는 마술의 주인된 아리따운 기생이 음행을 많이 함을 인함이라 그가 그 음행으로 열국을 미혹하고 그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 (나 3:4). 

앗수르라는 나라는 네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탐욕스럽고, 둘째, 사자처럼 잔인하고, 셋째, 간사한 거짓과 술책으로 나라들을 속이고 나라들과 맺은 조약도 어깁니다. 넷째, 귀신을 숭배하도록 현혹합니다. 마술로 백성을 미혹하고 귀신을 숭배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앗수르의 죄악에 대해서 책임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나훔 1장 11절에서도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너희 중에 나와서 사특한 것을 권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사특한 것’의 히브리어는 벨리알입니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고후 6:15). 벨리알은 사탄의 별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앗수르의 왕 산헤립은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탄을 숭배하도록 열국을 미혹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죄악에 대해서 책임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시되 속히 진노하지는 않으십니다.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 발의 티끌이로다” (나 1:3). 하나님께서는 피조세계를 다 다스리십니다. 하나님께서 꾸짖으시면 바다도 꼼짝 못하고, 회오리바람도 꼼짝 못하고, 구름도 하나님의 발아래 티끌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피조세계를 다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노하기를 더디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중요한 속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라는 나라가 극악무도한 죄를 지어도 바로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멸시합니다. 내가 죄를 지어도 대적하지 않고 그냥 두시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이 계시지 않거나 나를 징벌할 능력이 없는 것 아니냐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롬 2:4). 하나님께서 힘이 없어서 사람이 죄를 지을 때 바로 심판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죄로부터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 참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느 나라든지 죄악이 관영하고 한계에 달하게 되면 심판을 내리십니다. 나라도 윤리가 있어야 됩니다. 100%의 윤리를 요구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있어야 합니다. 북한처럼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까지 3대에 걸쳐 독재하면서 백성을 굶겨 죽이고 핵무기로 세계를 위협하며 국가를 상대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나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지만 어느 한계에 달하게 되면 심판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언제, 어떻게 개입하실지 모르지만 반드시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앗수르라는 나라도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참으셨습니다. 니느웨가 회개한 뒤 하나님께서 100여 년을 참으시고 또 그로부터 수십 년을 참으시다가 결국 B.C. 612년에 바벨론 군대를 보내셔서 앗수르를 완전히 멸망케 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 바벨론의 왕은 느브갓네살의 아버지 나보폴라사르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 너의 병거들을 살라 연기가 되게 하고 너의 젊은 사자들을 칼로 멸할 것이며 내가 또 너의 노략한 것을 땅에서 끊으리니 너의 파견자의 목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아니하리라” (나 2:13). 

불과 칼이 앗수르를 멸망시킬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젊은 사자라는 것은 앗수르의 군인들을 말합니다. 앗수르의 상징은 사자입니다. 그래서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는 사자상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젊은 사자들을 칼로 멸할 것이고 병거들을 불로 살라버릴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너의 파견자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앗수르 군대는 어느 도시든지 점령하면 사람들의 목을 베어 죽였습니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살려줘서 도망가도록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앗수르 사람들이 자신들을 칼로 다 죽였다고 소문을 내어 다른 나라들도 벌벌 떨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파견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파견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앗수르가 완전히 망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국가에 대해 책임을 물으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개인에 대해서도 책임을 물으십니다. 이것이 지금 자신과 무슨 상관이냐고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와 상관이 있습니다.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그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니 그를 인하여 바위들이 깨어지는도다” (나 1:6).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니까 바위가 깨어집니다. 등산을 하다 보면 큰 바위 조각들이 깨져서 날라 옵니다. 그러면 깨져서 날라오는 바위를 피해야 합니까? 그냥 맞습니까? 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차라리 그 바위를 피하지 않고 맞아 죽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계 6:16-17).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악인들은 차라리 바위가 떨어져서 죽는 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는 것보다 낫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훔 1장 6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그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니 그를 인하여 바위들이 깨어지는도다” (나 1:6). 

하나님께서는 나라의 죄악들에 대해서 어느 시점이 되면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각 개인의 죄악에 대해서는 최후 심판 때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후 심판을 받는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심판을 받는 것보다 차라리 바위 밑에 깔려 죽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최후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돈 벌어도 안 되고, 출세해도 안 되고, 인기를 얻어도 안 됩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야만 심판에서 면제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Ⅱ. 나훔서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시고, 기도로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두 번째 나훔서의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악인들은 심판하시지만 자기 백성은 위로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위로자가 되십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나 1:7). 

악인에게는 심판이 와도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위로가 있는 것입니다. 나훔 1장 11절 이하의 이야기는 이전에 말씀드렸듯이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침공했을 때의 일입니다. 산헤립은 B.C. 701년에 군대를 이끌고 침공하여 예루살렘에서 50km 떨어진 라기스라는 곳을 점령해서 거기에 본부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군대장관 다르단, 랍사게 이런 인간들을 보내 히스기야 왕과 예루살렘 거민들을 조롱하고 편지를 써서 여호와가 감히 내 손에서 예루살렘을 건지겠느냐고 거짓말을 하며 협박했습니다. 

그러자 히스기야 왕과 이사야가 그 편지를 놓고 기도했고 하나님께서 너희를 구원할 것이라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보니까 여호와의 사자가 앗수르 군대 18만 5천 명을 한밤중에 다 죽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천군 천사 가운데 하나만 보내도 100만 명을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앗수르 군대 18만 5천 명이 다 죽고 산헤립은 자기 고국으로 돌아가는데 아들들이 산헤립을 죽이고 결국 망하게 됩니다. 히스기야 왕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신 것입니다. 이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지 열왕기하 18, 19장에 기록되었고 이사야 10, 36, 37장에 기록되었으며 역대하 32장, 미가서에도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나훔서의 메시지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의뢰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응답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가 아무리 악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이 아무리 횡행해도 우리 성도에게는 기도가 정답입니다. 히스기야 왕뿐만 아니라 여호와를 의뢰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기도가 승리의 원동력입니다. 기도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환난 날에 산성이 되어주시고 피난처가 되어주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어려운 문제가 있으십니까? 세상 어디를 돌아다녀 봐도 피난처는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피하러 오면 그곳이 피난처가 되고 산성이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Ⅲ. 나훔서는 하나님의 은혜는 육신적 혈통을 통해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거한다 
  
세 번째 나훔서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은혜는 육신적인 혈통을 통해서 전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각 세대는 각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된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나훔이 예언하기 이전에 100여 년 전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세계적으로 부흥을 기록했던 도시입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좌우를 분별 못하는 어린아이만 12만 명이라고 하셨으니까 어른으로 계산하면 60만 명 이상 되는 엄청난 인구가 사는 니느웨에 요나 선지자를 보냈습니다. 

요나는 가지 않으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물고기까지 동원하여 결국 니느웨에 도착했습니다. 3일을 걸어 다녀야 하는 큰 니느웨 성에서 요나가 40일이 지나면 하나님께서 이 성을 멸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하자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왕도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회개하고 온 백성이 금식하고 회개하며 심지어는 짐승, 육축까지도 다 회개하고 금식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계획을 돌이키셨습니다. 니느웨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처럼 니느웨는 위대한 부흥의 현장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3, 4대가 지나니까 니느웨는 인류 역사 가운데 가장 악한 세대가 되었습니다. 경건한 자의 후손들이 가장 불경건한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핏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은혜 받았다고 자녀가 꼭 은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목사라고 해서 자녀가 저절로 은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도 하나님 앞에 기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핏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각각 은혜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저희 세대만 해도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받은 세대입니까? 성령의 은사가 무엇인지, 성령의 불 받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기도해서 기도 응답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우리는 큰 은혜를 받은 세대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대한민국은 참 살기 어려웠습니다. 개똥, 소똥이 동네 길에 널렸었습니다. 저는 인천에 살았는데 학교 갔다 오면서 개똥이나 소똥만 안 밟아도 복된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것을 보기 어렵습니다. 그만큼 복된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후손들도 부흥의 시대를 경험하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하나님을 등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열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의 정신이 공허해지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은 아침에 갔다 밤에 들어오니까 학교 갔다 집에 와도 아무도 없습니다. 혼자서 라면 끓여 먹고 저녁에 혼자 집에 있으니까 컴퓨터 켜고 게임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게임하지 말고 공부하라고 그러면 아버지도 하기 싫은 공부를 아이들이라고 좋아하겠습니까? 공부는 하기 싫고 정신이 공허하고 시간이 남으니까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흥을 체험한 기성세대이지만 젊은 세대에도 부흥이 일어나도록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나훔서인줄로 믿습니다. 너희 세대가 은혜 받았다고 해서 후손들도 저절로 은혜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후손들을 위해서 부흥이 일어나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대대로 주의 행사를 크게 칭송하며” (시 145:4). 

한 세대는 다른 세대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증거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길을 가든지 앉든지 서든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증거했습니다. 후손들을 위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십니까? 

“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저희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시 145:19). 


결론 

나훔서를 읽으면서 시간을 재보십시오. 1장부터 3장까지 읽는데 10분도 안 걸립니다. 10분도 안 걸리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평생 한 번도 안 읽고 천국에 가서 나훔을 만나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나훔서는 우리 각자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책임성이 있다는 것을 엄중히 말하는 책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은혜 받고 우리의 후손들도 은혜 받아야 된다고 말합니다. 또한 우리 성도들이 어렵고 흑암이 가득한 이 세대에 의지할 것은 기도뿐이고 기도를 통해 여호와는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는 것을 체험하도록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책임과 증거와 도전을 받아들이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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