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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로부터 오시는 이 (요 3: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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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부터 오시는 이 (요 3:31-36)


『세상을 바꾸는 작은 관심』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여섯 단어는 “내가 정말 잘못했다는 사실을 나는 인정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다섯 단어는 “당신은 정말 훌륭한 일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네 단어는 “당신은 이걸 어떻게 생각하나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세 단어는 “당신에게 이것을 부탁드립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두 단어는 “정말 고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한 단어는 “"우리.”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지 않은 한 단어는 “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우리’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가장 중요한 예수님께서 중요하지 않은 한 단어 ‘나’를 내려놓으셨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우리가 풍요한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 예수님을 묵상하는 하루가 되십시오.

먼저 생각할 것은 예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례 요한은 세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설명하면서 위로부터 오시는 이,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 하나님이 보내신 이라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비슷한 말을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사용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주 강한 강조입니다. 사실 제자들이 와서 예수라고 하는 분이 선생님보다 나중에 일을 시작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분에게로 다 모여드는 것을 보니 마음이 별로 좋지 않다고 말을 할 때 그분은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앞세웠습니다. 그런데 그 구체적인 이유를 지금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땅에서 난 자에 불과하지만 예수님은 위로부터 오시는 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단순한 위가 하닌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요 그것도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이 땅에 오신 분이라고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늘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는 하늘과 지금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그 뜻이 다릅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하늘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늘이 아닙니다.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하늘 즉 하나님 나라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위로부터 오신 분입니다. 그 위는 하나님이 계신 곳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은 위입니다. 위라 함은 사람의 힘이나 지혜나 능력으로는 도무지 갈 수 없는 그런 위를 말합니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하늘이 아닌 삼천 층의 위를 가리킵니다. 일천 층은 사람의 눈에 보이는 하늘입니다. 이천 층은 사람의 눈으로는 도무지 볼 수 없는 하늘을 뜻합니다. 천체 망원경으로 보거나 그 이상의 것으로 보아도 보이거나 보이지 아니하거나 하는 곳입니다. 삼천 층의 하늘은 여기 있거나 저기 있거나 하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위, 곧 하늘이지만 사람이 감히 이를 수 없는 하늘입니다. 

사람의 눈에 띄지 아니하기에 절대로 볼 수도 만질 수도 이를 수도 없는 곳에 속합니다. 아주 가까이 있기도 하면서 아주 멀리 있기도 한 곳입니다. 다만 영적인 눈이 열려야만 볼 수 있기에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장소에 여러 사람이 있다 하여도 하나님이 보게 하셔야만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게 하심으로 영적인 눈이 열려 본 것을 그대로 증거하는 자가 있을지라도 그 증거조차 믿을 수 없는 곳이 곧 하늘입니다. 이 하늘나라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입니다. 우리가 흔히 천국이라고 부르는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다스리지 않는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마지막에 들어가게 될 그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하나님 나라는 원한다고 해서 다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허락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된 것을 가리켜서 생명을 얻었다고 표현합니다. 

이 생명은 단순히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 목숨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살 수 있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을 가리켜서 여기 영생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흔히 조금만 힘들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죽고 싶다는 것입니다. 사실 죽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숨을 몇 분만 쉬지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 말이 쉽지 단 1분도 숨을 멈추고 있을 재간이 없습니다. 

억지로 목을 졸라서 숨을 쉬지 못하게 한다든가 아니면 물속에 처박혀서 도무지 숨을 쉴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아무리 숨을 멈추려고 해도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 몸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연적으로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생명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요즘 80세 보험을 말하다가 100세 보험을 말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그만큼 장수하는 사람이 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 통계만 해도 1919년에 우리나라 평균 수명이 겨우 20세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유아 사망률이 높았다는 뜻도 됩니다. 

그래 이 삼십년 전만 해도 회갑 잔치 하면 대단했습니다. 큰 잔치요 경사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회갑 잔치 하겠다고 하면 사람들이 웃습니다. 이제는 칠순 잔치도 하지 않고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장수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하지만 그래 봤자 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천년이 하루 같다고 한 베드로 사도의 말을 들어 생각해본다면 100수를 한다고 해 봐도 그거 두세 시간밖에 더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지금 우리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한시적인 잠시 있다가 사라질 생명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생명으로 남는 것이 너무도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하늘로부터 직접 이 세상에 오시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그래 비록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의 몸을 빌려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랬기에 우리는 자꾸 예수의 어머니라 해서 성모 마리아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한 번도 공적인 자리에서 마리아를 어머니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 자라에서도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하셨고 십자가 위에서도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셨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이긴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마리아가 더 존귀함을 받아야 된다는 뜻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도 보면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서있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예수님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라고 할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그리고는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면서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맡겨주신 대로 그 맡은 바 직분대로 충성하는 우리들이나 예수의 모친 마리아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니까 성모 마리아라고 해서 특별히 더 존귀하게 대우해야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부르심대로 충성하는 믿음의 사람들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 소유된 백성으로서 보배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잘 베워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소유를 삼으셨다고 하는 것을 언제나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왜 이렇게 사나, 나는 왜 이런 어려움을 겪어야 하나 하면서 여러 가지 탄식도 있고 때로는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할 때가 있지만 그러나 그러기에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더 크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같은 자식이라도 아픈 자식이 있으면 더 마음이 쓰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볼 때 더 안쓰러운 마음으로 주님이 우리를 그 품에 안아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찾으시는가 하면 하나님이 찾으시는 자는 우리를 위해서 하늘로부터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입니다. 왜 믿는 자를 찾으시는가 하면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에 잠시 살다가 사라질 목숨이 아닌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믿음의 사람들을 하나님이 찾으시며 부르신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 위로부터 오신 그분이 하늘나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도 사람들이 믿지를 않습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믿을 수가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습니다. 
보십시오. 내가 전혀 가보지 못한 곳이 있습니다. 지금이야 가보지 못했다고 해도 TV나 인터넷을 통해서 보고 들어서 오히려 다녀온 사람보다도 더 잘 알 수도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예전 그런 것이 전혀 없던 시대를 생각해 보십시오.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생각하던 그런 때에 지구 반대편에도 다른 나라가 있다고 하는 것을 사람들이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더군다나 지금 우리가 낮인데 반대편은 밤이라고 하는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가 있고 알지 못하는데 어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나는 그런 곳을 가 봤다고 한들 그 말을 믿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사실로 제가 그 반대편까지 가서 반대편 세상을 보고 왔다고 합시다. 그래서 내가 가서 보았더니 이렇고 저렇고 하고 아무리 입이 아프게 말을 해 봤자 사람들이 그걸 믿겠습니까? 오히려 저 사람이 한참 행방불명되었다가 나타나더니 정신없는 소리만 하고 있다고 머리가 돈 모양이라고 하지를 않겠습니까? 

지금 요한이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앞서 증거하였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알려주셔서 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누가 알려주셔서 알게 된 분이 아닙니다. 직접 하늘에서 오신 분이시니 당연히 자기가 보고 들은 것 자기가 아는 것을 우리들에게 전해주시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설사 제가 미국을 갔다 왔다고 해도 그래서 미국이 어쩌고저쩌고 이야기한다고 해도 미국 사람이 직접 이야기하는 것만 하겠습니까? 저는 그저 잠시 그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뿐이지만 미국 사람이라면 자기가 직접 살아왔던 이야기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세례 요한은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땅에서 나서 결국 땅의 것을 말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지만 역시 땅의 사람으로서의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사본이 아닌 원본이라는 것입니다. 남의 나라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라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위로부터 오셨습니다. 땅에서부터 온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된 분이십니다. 이 세상의 육신을 입으셨지만 잉태될 때부터 위로부터 온 분이십니다. 이런 분은 온 세상을 통틀어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 예수님 외에 성령으로 잉태된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외에 다른 자를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게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만일 그러하였다면 하나님이 예수님에게만 독생자라는 이름을 붙이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에게만 독생자라는 이름을 붙이신 것은 예수님만이 성령으로 잉태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위로부터 오셨기 때문입니다. 에녹이나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하늘에 올라갔지만 예수님처럼 성령으로 잉태되어 온 자는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위로부터 오셨던 예수님이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에녹이나 엘리야가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위로 올라갔을지라도 이 세상 모든 죄를 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위로부터 오신 예수님은 죽으셨지만 이 세상 모든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위로부터 오신 분으로서 만물 위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만물 위에 계심으로 만물 또한 당신의 말씀으로 다스리십니다. 예수님이 파도를 잔잔케 하실 수 있었던 것은 만물을 다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가실 수 있었던 것도 만물 위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고도 남은 것을 열두 광주리나 거둘 수 있었던 것도 그분이 만물 위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됐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수 있었던 것도 그분이 만물 위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행할 수가 없습니다. 혹 사람 중에 이렇게 행할 수 있는 자가 있다 하여도 모두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미혹하려는 자들의 증거로 모두 조작하고 뻥튀기한 말에 불과합니다. 오직 위로부터 오셔서 만물 위에 계시는 분만 이렇게 행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자기와 함께 있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모든 복을 우리로 누리도록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처럼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다고 한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렇다면 지금 나의 모습은 왜 이럴 수밖에 없느냐고 하시겠습니까? 그러기에 하늘 영광은 더 크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늘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그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한 마디로 죽으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깨달은 바울 사도가 고백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걸 깨달은 세례 요한도 그래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잔치 자리에 가거든 상석에 앉지 말라 차라리 말석에 가서 앉으라”고 하셨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세상에서는 꼴지가 된들 뭐 어떻습니까? 그로인해 오히려 하늘나라에서 최고가 될 수 있다면 꼴지 자리도 감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억하십시오. 하늘나라는 눈에 보이는 나라가 아닙니다. 영적인 눈이 열려야만 볼 수 있는 나라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하나님 나라는 너무나도 멋진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요한 계시록이 잘 설명해주고 있지를 않습니까? 오죽하면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나라라고까지 하겠습니까? 

이제 그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는 이미 얻은 자임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어떻게 우리가 하늘나라를 얻을 수 있었습니까? 그 아들 예수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셨고 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구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는 당당하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법칙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믿음대로 될지어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삶의 주인이 되심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그 어떤 일에도 주저함이 없이 말씀대로 순종하십시오. 
예수님은 위로부터 오신 분으로서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말씀으로도 얼마든지 다스릴 수 있는 분이심을 믿기 원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처럼 물 위를 잠간이라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물 위를 걸어오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후로는 예수님이 일러주신 말씀보다도 파도에 더욱 집중하였기에 물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위로부터 오셨습니다. 또한 만물 위에 계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일러주신 모든 말씀은 땅의 일을 말씀하실지라도 사람을 살리기 위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땅에 속하여 땅의 일을 말하는 자는 사람을 살리는 말이 아니라 도리어 사람을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말을 합니다. 이런 영적 차이조차 구별하지 못하기에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여도 어렵다 하거나 깨닫지 조차 못하는 거지요. 하지만 이를 깨달은 시편 기자가 노래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이 아름다운 고백이 우리들의 삶에도 날마다 울려 퍼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의 기도문”을 소개합니다.

우리의 삶이 분주하고 여유가 없을지라도 / 사랑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소서
자신의 일에 취하여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거나 / 세상이란 벽에 자신을 걸어놓고 / 불안에 빠져 있지 않게 하소서.
수많은 일들로 마음에 여유가 없을 때에도 / 사랑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소서.
시간을 내어 대화를 나누고 / 서로의 마음을 나누며 멀어졌던 발길을 /
한걸음씩 더 다가가게 하소서.

막연한 이해를 바라기보다 함께하는 시간을 통하여 / 건강한 사랑을 만들게 하소서.
서로에 대하여 무관심의 소외가 / 얼마나 마음을 슬프게 하고 / 아프게 하는지 알게 하소서.
삶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들을 / 함께 나누는 시간을 통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
필요한 존재임을 더 깊이 깨닫게 하소서.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 마음을 같이하지 못하면 / 모든 것을 다 갖추어도 절망이 보이니 / 서로의 만남을 감사하게 하소서.

삶의 세세한 생활들을 주고받으므로 / 서로가 믿고 신뢰하며 살아감의 중요함을 알게 하소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 시간이 늘 준비되어 있지 않으니 / 서로가 관심을 갖고 사랑의 통로를 만들게 하소서.
우리가 서로 사랑으로 늘 건강하게 하소서. / 우리가 서로 사랑으로 늘 행복하게 하소서.
우리의 사랑이 힘 있고 아름답게 피게 하소서. / 우리의 삶이 분주하고 여유가 없을지라도 / 사랑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소서.
자신의 일에 취하여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거나 / 세상이란 벽에 자신을 걸어놓고
불안에 빠져 있지 않게 하소서.

수많은 일들로 마음에 여유가 없을 때에도 / 사랑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소서.
시간을 내어 대화를 나누고 / 서로의 마음을 나누며 멀어졌던 발길을 / 한걸음씩 더 다가가게 하소서.
막연한 이해를 바라기보다 함께하는 시간을 통하여 / 건강한 사랑을 만들게 하소서.
서로에 대하여 무관심의 소외가 / 얼마나 마음을 슬프게 하고 / 아프게 하는지 알게 하소서.
삶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들을 / 함께 나누는 시간을 통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 필요한 존재임을 더 깊이 깨닫게 하소서.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 마음을 같이하지 못하면 / 모든 것을 다 갖추어도 절망이 보이니 / 서로의 만남을 감사하게 하소서.
삶의 세세한 생활들을 주고받으므로 / 서로가 믿고 신뢰하며 살아감의 중요함을 알게 하소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 시간이 늘 준비되어 있지 않으니 / 서로가 관심을 갖고 사랑의 통로를 만들게 하소서.
우리가 서로 사랑으로 늘 건강하게 하소서. / 우리가 서로 사랑으로 늘 행복하게 하소서. 
우리의 사랑이 힘 있고 아름답게 피게 하소서.

이 사랑의 기도문처럼이나 위로부터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귀하고 크신가를 다시 기억하여 오늘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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