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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을 놀라게 한 믿음 (마 8: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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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놀라게 한 믿음 (마 8:5-13)

어떤 두 사람이 서로 마주 앉아 기차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화를 나누다보니 둘 다 예수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둘은 금방 친해졌고 시간이 지나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점심으로 김밥을 준비해왔고 또 한 사람은 기차에서 사먹으려고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식중독 위험이 있다며 기차에서 아무것도 팔지 않는 것입니다. 
그때 김밥을 사온 한 사람이 김밥을 꺼내 먹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점심을 준비 못한 사람이 한 마디 합니다. 저는 요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읽으면서 큰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자 이에 질세라 혼자서 김밥을 먹고 있던 사람이 말했습니다. 뭐라고 말했을까요? 저는 요즘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말라는 말씀에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조금 과장된 부분이 없지않아 있지만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믿음이 있다고 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어쩌면 믿음이 무엇인지를 전혀 내 주변의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 보여드리지 못하며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 중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분 계십니까? 
믿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 이렇게 나와 있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 모두는 분명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 똑같이 믿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어떤 믿음이 정말 참다운 믿음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 앞에 칭찬 받았던 믿음의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백부장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읽어볼까요? 예수님은 이 백부장을 가리켜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만나보지 못한 믿음이라고 칭찬해주셨습니다. 사실 그 당시에도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은 백부장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주위에는 셀 수 없는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좇고 있었습니다. 
8:1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 수 많은 사람들 속에서 예수님이 인정하고 칭찬한 믿음은 백부장의 믿음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의 백부장의 믿음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길래 그 수 많은 가운데 예수님 앞에 칭찬받는 믿음이 될 수 있었을까요?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이 백부장의 믿음을 살펴봄으로써 주님을 믿는 수 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저 그런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 앞에 칭찬받을 수 있는 참된 믿음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째로 백부장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나요? 
8장5절을 읽어볼까요? 
백부장의 믿음은 주님 앞에 나아와 간구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여러분, 믿음에는 크게 세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바로 주님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칭찬하실만한 믿음 그것은 예수님께로 늘 가까이 나아가는 믿음입니다. 
오늘 백부장은 주님 앞에 나아가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 주변을 맴돌았지만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뒤에서 멀찍이 좇아야 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 앞에 나아가 그 분과 만나고 그 분을 대면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베드로가 예수님을 멀찍이 뒤따를 때 그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부끄러운 제자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회개하고 성령의 충만을 받은 후 그는 예수님을 뒤에서 멀찍이 뒤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해 생명을 걸고 복음의 최일선에서 십자가를 거꾸로지까기지 주님 앞에 나아가고 복음을 위해 나아가는 믿음의 용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 앞에 얼마나 자주, 얼마나 가까이 나아가시고 계십니까? 여러분, 겨울과 여름은 어떻게 오는 지 아시나요? 겨울은 태양하고 멀어지면 여름은 태양하고 가까워지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여름과 겨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의의 태양이신 예수님과 거리가 멀어진다면 우리의 신앙이 겨울이 되는 것이요, 예수님과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다면 신앙의 여름이 되는 것입니다. 차갑고 냉랭한 신앙의 겨울 그것은 주님을 가까이 하지 않을 때 오는 것입니다. 나도 알지 못하는 순간 주님과의 거리가 멀어지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렇게 우리의 신앙의 겨울이되면 우리의 인생도 차가운 북풍 한설이 몰아치는 겨울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과의 여름처럼 뜨거웠던 첫 사랑이 있으셨나요? 그때가 언제였나요? 행여 그때가 언제였는지 가물 가물 할만큼 너무 멀어지지는 않으셨나요?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주님만을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활화산처럼 타오르던 주님을 향한 사랑이 아직도 여러분의 심령 깊은 곳에서 타오르고 계신가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오늘 이 시간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을 회복할 수 있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멀어진 주님과의 거리가 다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직 날씨는 겨울이지만 적어도 우리의 신앙만은 이제 겨울을 지나 꽃피는 봄이 될 수 있길 간절히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백부장의 믿음이 주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는 뜨거운 신앙이었기에 주님께 칭찬받았음을 기억하며 우리 역시 주님께 날마다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의 성도들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께 칭찬받는 믿음은 먼저 주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는 믿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칭찬받는 믿음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 나아왔으면 간구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5절을 다시 보십시오. 나아온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나아와 간구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오늘도 우리 모두 금요기도회로 주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참 잘 오셨습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는 것처럼 금요기도회에 오신 여러분들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실 복된 믿음의 성도들이십니다.  
그러나 칭찬받는 믿음은 여기서 끝나는 믿음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 나아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 단계 즉 주님께 간구하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즉 간구함을 통해 주님을 만나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그것이 칭찬받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주님 앞에 나아오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 오늘 이 밤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주님 앞에 간구하며 나아가는 믿음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도 백부장처럼 주님 앞에 간구하며 나아가는 성도들에게 우리 주님은 예비하신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가득히 부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백부장이 주님 앞에 나아오기만 했다면 백부장은 결코 예수님께 칭찬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백부장은 나아왔을 뿐만 아니라 간절히 주님을 찾았습니다. 
주님 앞에 나아왔다면 간절히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 사람만이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잠8:17 말씀 기억하시죠?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예배를 드린다고 , 예배당에 앉아있다고 하여 모두가 다 주님을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사도행전에도 바울사도가 설교를 해도 졸다가 떨어져 죽는 유두고 같은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오늘 큐티 말씀처럼 예수님이 말씀을 전해도 그것을 믿지 않던 나사렛 사람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왕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왔다면 백부장처럼 주님을 만나고 돌아가는 이 밤이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단 한 마디의 기도라도 하나님께 상달되고 열납되는 기도를 드리시길 바랍니다. 
단 한 줄의 찬양이라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찬양을 드리시길 바랍니다. 
단 한 마디의 말씀이라도 마음밭에 심기어져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죤 웨슬레 목사님은 친절하고 인자하시지만 설교시간엔 엄위하셨습니다. 어느 예배 시간에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고 있었는데 교인들 중에 몇이 졸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입을 벌리고 머리를 들고 조는 사람, 머리를 숙이고 처음부터 '잠이여, 오소서!' 하고 자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설교를 하다가 너무 안타깝고 가슴이 답답하였습니다. 
목사님은 갑자기 소리를 꽥 질렀다. 
"불이야! 불!" 
교인들은 갑자기 목사님이 지른 큰 소리에 눈이 동그랗게 되고, 잠이 든 교인들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아니, 불이라니, 어디에 불이 났습니까?" 
어떤 교인이 소리쳤다. 교인들은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살펴보았지만 연기도 불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웨슬레 목사님은 엄숙하게 말했습니다. 
"지옥의 불을 말하는 것입니다. 설교 도중에 잠을 자는 사람들이나 정신없이 멍히 앉아 있는 사람들이 가게 될 지옥불 말입니다." 

아니 한번 졸았다고 지옥불이라니... 
그렇습니다. 설교 시간에 한번 졸았다고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배 시간에 집중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드릴 온전한 예배로 드리지 못하게하는 악한 습성과 잘못된 습관은 지옥불에 불타 없어져야 할 습성이요 습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끔 예배를 인도하다보면 저분은 왜 여기 와 앉아있을까 싶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간인 목사가 볼때도 아니다 싶은데 하나님이 보셨을 때 오케이 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보셨을 때 오케이가 아니라면 우리의 인생도 오케이는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께서 보셨을 때 오케이 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심으로 여러분의 인생이 오케이 인생이 될 수 있길 간절히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칭찬받는 믿음의 주인공은 주님을 대하는 태도가 남다른 성도입니다. 단 한번의 예배를 드리더라도 그저 그런 늘 그래왔던 예배가 아니라 정말 주님이 받으실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오늘 이 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런 예배자들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이런 주님이 칭찬하실 믿음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길 간절히 바랍니다. 

두 번째 백부장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길래 예수님께 칭찬받을 수 있었을까요? 
그는 자기가 아닌 하인을 생각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의 세 가지 측면 중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을 대하는 모습에서 드러납니다.
6절 말씀을 읽어볼까요? 그는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 주님 앞에 나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챦은 종 하나를 위해 주님 앞에 나아와 간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흔히 기도를 많이 하고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면 그 사람이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그것도 믿음에 있어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믿음의 전부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교회생활 열심히 하고 기도 많이 하는 것 같이 보이는 사람 중에도 주님께 칭찬받을만한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두 번째 측면 그것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는지 뿐만 아니라 바로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를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이 어떤지를 판단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간증하시는데 시골에서 목회할 때 보면 어떤 집사님이 새벽 기도때는 침이 튀겨라 세게 기도하시고는 돌아 갈 때는 남의 텃밭에 들어가 오이 상추 깻잎 다 따가지고 가는 사람이 있더랍니다. 여러분, 이 사람의 믿음이 과연 예수님께 칭찬받을 수 있는 믿음일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원에서 정말 목이 쉬도록 기도하고 내려 올 때는 서로 먼저 버스에 타겠다고 싸우는 모습들을 보면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목이 쉬도록 뭘 기도한 것일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 칭찬받았던 백부장은 자신의 기도제목이 아닌 하챦은 하인을 위해서 자신의 자존심도 체면도 다 버리고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 당시 백부장이 어떤 존재입니까? 그 당시 백부장은 단순한 로마 군인 장교가 아니었습니다. 백부장은 예하의 100명의 부하를 거느린 고급장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 로마는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나라였습니다. 
 
아주 쉽게 예를 들면 일제치하에 우리나라에 있었던 헌병대 장교를 생각해보세요.. 그야말로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권세와 위엄을 가지고 있었던 권력자요, 세력가였던 것입니다. 그 지역사회에서 그의 말 한 마디면 안 되는 게 없을 정도의 실력을 가진 세력가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가 종 하나를 위해 간절하게 주님 앞에 매어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이러한 믿음을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 종은 어떤 존재입니까? 
요즘은 밑에 일하는 직원에게도  말 잘 못했다간 큰 일납니다. 일하시는 분들 얘기를 들어보면 종업원들 무서워서 장사 못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당시 종은 지금과 같지 않습니다. 종은 가라면 가고 하라면 하고 죽으라면 죽는 것이 그 당시 종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소나 개와 같은 짐승처럼 취급받던 시절의 하인입니다. 그런 짐승 같은, 물건 같은 하인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 믿음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것도 지극히 연약한 사람,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섬겨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마25장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마25:40절 말씀을 볼까요?
여러분이 만약 지극히 작은 주일학교 학생 한 명에게 빵을 하나 사 주었다면 그것은 그 아이에게 사준 것이 아니라 주님께 사드린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힘겨워하고 있던 성도에게 작은 위로의 말 한마디라도 던졌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주님께 드린 위로의 말 한마디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동전을 요구하는 누추하게 보이는 그 사람에게 동전 한 닢 던져주었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 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작은 소자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예수님께 한 것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기 바랍니다. 
그렇기에 나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칭찬받는 믿음입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해 먼저 기도하고 눈물로 안타까운 심정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결코 외면치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테레사 수녀가 미국을 순회할 때 한 여인을 상담하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말합니다. 자기는 지금까지 온갖 상담을 다 받았지만 별 도움이 안 되었고 그래서 이제는 자살을 생각하고 있다 고 말합니다. 테레사는 조용히 그러면 내가 제안을 하나 하겠다고 말합니다. “기왕에 죽을 결심을 하셨다면 자살을 연기하고 내가 일하는 인도에 와서 나를 한 달만 도와주고 그 다음에 죽으시라”고 말했습니다.  
여인은 뭐 죽기전에 좋은 일 하고 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대로 하겠다고 했고 결국 한 달 후에 테레사가 이 여인을 다시 만났습니다. 
다시 만난 그녀의 얼굴은 전과는 달리 환히 빛나고 있었습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웃으며 묻습니다. “언제 돌아가시겠느냐?”고. 그녀는 대답합니다. “수녀님, 죽다니요? 이제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는데요. 전에 나만을 생각하던 시절 나는 나를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웃을 돌아보면서 내가 살아할 이유를 알게 되었고 살고 싶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고 싶으십니까? 행복하게 살고 싶으십니까? 보람있게 살고 싶으십니까? 잘 살고 싶으십니까? 그럼 나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을 위해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의 인생은 지긋지긋하고 괴로운 인생이 아니라 살맛나는 인생 보람있는 인생, 의미있는 인생으로 바꾸어지게 될 것입니다.

혹시 주변에 부족해 보이고 연약해 보이는 사람이 보이더라도 부족하다고 연약하다고 지적하기보다 위해서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놀랍게도 우리가 어떤 대상을 향하여 부족하다고 말할수록 그 사람은 부족한 사람이 되고 못 한다고 말할수록 못하는 사람이 되고 안 된다고 말할수록 안 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부족함이 보이거든 기도해주시고 그 부족함을 여러분이 채워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왜 그 사람의 부족함이 나에게 보인 것일까요? 왜 그 사람의 허물이 나에게 보인 것일까요? 내가 기도해주라는 것입니다. 내가 채워주라는 것입니다. 내가 덮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부족한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고 채워주다보면 그 사람도 언젠가는 부족한 사람이 부족하지 않은 사람으로, 연약한 사람이 연약하지 않은 사람으로 점점 더 변화되어 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이 하인은 중풍병으로 누워있었습니다. 여러분 주인에게 있어 이런 종처럼 부족한 자가 어디있습니까? 이처럼 쓸모 없는 자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백부장은 밖에 버려져야 마땅한 이 종을 위하여 주님 앞에 친히 나아와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 종을 불쌍히 여겨 낫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 종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채워달라고 간구할 때 종은 회복되었고 일어났습니다. 새로운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공동체안에서 자주 문제가 되는 부분이 바로 그것입니다. 
때로 누군가가 실수를 하고 잘못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누군가처럼 나도 어느 순간 실수하고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듯 우리도 서로를 용서하고 이해하고 따뜻하게 감싸주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마음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해주는 것입니다. 쓸모 없어 보이고 병들고 연약하고 허물이 보이는 자를 내버리고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위해서 기도해주고 품어주고 그 부족함과 허물을 채워주고 덮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렇게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도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참된 믿음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지막 셋째,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기도를 들으시고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말씀하시자 8절에 보면 백부장은 예 어서 오세요 하지 않고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지극히 겸손한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음의 세 번째 측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측면입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자신의 가치가 어떤 존재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그가 그 인근지역에서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실력자였지만 그는 예수님 앞에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자임을 철저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앞에 여러분은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질문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느니 내 주먹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자신의 주먹보다도 못한 존재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 가운데 그런 분은 없겠지만 여러분은 예수님보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재산이나 지식을 더 의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들 때문에 예수님보다 여러분 자신을 더 의지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자를 대적하신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싶으시다면 그 분 앞에 겸손하십시오.. 그 분 앞에 나는 아무것도 아닌 자입니다. 라고 두 손을 들고 나아오십시오.. 그 사람만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손에 무엇인가를 가득 들고 있다면 우리는 주님이 주실 그 어떤 좋은 은혜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손에 들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 앞에  겸손함으로 나아갈 때 주님은 우리가 버리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이 크고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 

성경은 다윗과 사울을 통해 교만과 겸손의 차이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보다 인물도 뛰어났고 모든 면에 있어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하고 맙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 앞에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다윗은 그저 어린 목동에 불과했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철저히 하나님을 인정하고 신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골리앗을 만났을때도 또 사울의 자신을 죽이려는 위협 속에 죽을 고비를 몇 번씩이나 넘기면서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뢰하며 겸손히 그 분과 동행했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은 결코 모른척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하나님앞에 위대하게 쓰임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 쓰임 받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겸손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인생은 마치 밑빠진 독에 물붓기와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여러분, 밑빠진 독을 채우는게 가능할까요? 불가능하죠..
그러나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밑빠진 독을 채울 수 있을까요? 
그 밑빠진 독을 강물에 풍덩 내어던지면 가능합니다. .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인생을 살아가려고 할 때 그것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와 같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우리가 그 독을 채우려고 하지 말고 그 독을 깊은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에 풍덩 내어던지면 그 독은 충만하게 채워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강물에 풍덩 내어던지면 그 독은 가득히 채워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여러분이 채워보려고 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럴 때 돌아오는 것은 실패요 좌절이요, 실망뿐입니다. 
오직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 겸손함으로 맡기고 내어 드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밑 빠진 독과 같은 여러분의 인생을 풍성한 은혜의 독, 축복의 독으로 새롭게 채우실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백부장의 믿음을 통해 주님께 칭찬받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 칭찬받는 믿음에는 세 가지 측면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삼각형의 꼭지점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무게중심으로 한 믿음의 삼각형의 첫 번째 꼭지점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드러납니다. 백부장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간절한 마음으로 아뢰는 모습이 칭찬받는 믿음입니다. 멀찍이 예수님을 뒤따르는 성도가 아닌 진정으로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그분을 간절히 찾는 성도들 되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을 향한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의 백부장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주님 앞에 나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당시 소모품에 불과했던 종 하나를 위해 주님 앞에 나아와 간구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칭찬받는 믿음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그 사람을 위해 먼저 기도하고 섬겨주고 사랑해주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지극히 작은 소자하나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다. 

세 번째는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에서 나타납니다. 백부장은 주님 앞에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자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고 싶다면 하나님 앞에 겸손하기 바랍니다. 
하나님 없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없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습니다. 
한번 밖에 살 수 없는 인생, 어떤 인생으로 살아가시겠습니까?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시겠습니까? 
한번 밖에 살 수 없는 인생 , 우리를 멸망에서 구원해 주시고 우리 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그 주님을 위해 멋지게 살다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께 칭찬받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 이 밤 우리 모두 백부장과 같이 칭찬 받는 믿음의 주인공들로 설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합시다. 예수님과의 관계속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모습속에서 칭찬 받을 수 있는 믿음의 모습으로 설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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