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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승리 (고후 4: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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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승리 (고후 4:7-12)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은 원본이 아닌 사본을 바탕으로 번역된 것입니다. 성경의 많은 사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본은 ‘사해사본’, ‘쿰란사본’이라고 합니다. 이 사해사본은 우연히 발견이 되었습니다. 

1947년 쿰란이란 산악지대에서 산양을 쫓고 있던 베두인족 양치기 소년이 절벽에 위치한 동굴을 발견했습니다. 그 동굴은 상당히 깊은 동굴이라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에서 동굴 속으로 돌을 던져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항아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소년이 굴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니 큼직한 항아리가 10여개가 있었습니다. 그 속에는 양피지에 글이 쓰인 두루 마리들이 수북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사해 사본의 첫 발견입니다. 

이후 고고학자들에 의해 주변 동굴에서 히브리어와 아람어 등으로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기록된 850여 개의 두루마리가 더 발견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발견된 성경 사본은 에스더서를 제외한 구약성경의 모든 책과 일부 주석, 외경, 공동체 조직과 생활에 관련된 여러 문서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남아 있는 히브리어 사본은 거의 전부가 9-11세기에 기록된 것인데, 사해사본은 2-3세기의 것으로 현존하는 사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성경연구 사료입니다. 

두루마리를 처음 발견한 소년은 골동품상에 한 개당 4만원씩 받고 팔면서 횡재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히브리대학교는 이 보물을 골동품상으로부터 한 개에 우리 돈으로 약 2억5천만 원씩 주고 다시 사들이게 되었습니다. 항아리는 값싼 토기였지만 그 안에 엄청난 보물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 존재의 연약함을 질그릇으로 표현했습니다. 질그릇이라는 것은 진흙으로 빚어진 값싼 그릇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존재를 생각할 때 비천한 존재로 보는 의미에서 질그릇으로 생각했습니다. 죄짓고 타락한 존재, 하나님을 반역한 존재, 이런 모든 것을 생각할 때 자기 자신이 얼마나 질그릇 같은 존재인가 하는 의식을 가졌고, 또 인간은 누구나 다 부서지고, 상처 나고, 부딪히면 깨지는 이런 연약한 존재적 의미에서 질그릇이라고 표현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다 부딪히면 상처 나고, 깨지고, 넘어지면 부서지는 연약한 존재인 것을 우리 스스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인간의 연약성에 대하여 상한 갈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연약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세계 역사를 움직이는 엄청난 힘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그 비밀을 사도 바울은 이 질그릇 속에 보배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질그릇 속에 담긴 보배는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 속에 있는 보배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보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벧전 2:7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성도에게는 보배”라고 했습니다. 골 2:3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의 보배입니다. 

사도 바울은 질그릇처럼 보잘 것 없는 자신도 하나님께서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아주셨기에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노라고 선포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후 6:9-10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사도 바울이 자신 만만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질그릇 같이 약하지만 가치는 겉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고, 속에 무엇이 담겨져 있느냐로 좌우됩니다. 우리 속에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담겨져 있을 때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고 있으면서도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배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은 성도들은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한 골동품 수집가가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가 그 식당의 개 밥그릇이 아주 귀한 청자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저것을 가져갈까 궁리하다가 주인에게 개를 팔라고 했습니다. 값이 얼마 나가지 않은 개를 30만원이나 되는 많은 돈을 주고 샀습니다. 

개를 안고 나오면서 주인에게 개 값을 후하게 쳐주었으니 저 개 밥그릇도 같이 주면 안 되냐고 했더니 주인은 개밥그릇은 절대 줄 수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개 밥그릇 때문에 개를 50마리도 더 팔았다는 것입니다. 비싸지 않은 개를 비싼 값으로 산 것은 개 때문이 아니라 밥그릇이 귀한 청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이 우리를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라고 한 것은 겉보기에는 개 밥그릇 같으나 실제로는 청자같이 귀하다는 말입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심히 큰 능력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 속에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에 우리는 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큰 능력을 소유한 존재임을 깨닫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의 심히 큰 능력을 발휘하며 살아갈 것을 기대하십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 속에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고 사는 삶의 모습이 무엇입니까?

1. 우리 속에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고 있으면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를 질그릇에 담고 살면 우리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않습니다. 우겨쌈을 당한다는 말은 포도즙을 짤 때 포도를 짓누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인생의 무거운 짐으로 짓눌릴 때가 있습니다. 좌우 앞뒤가 꽉 막혀서 정말 앞이 캄캄하고 숨조차 쉬기 어려워 몸부림칠 때도 있습니다. 

왕하 6장에 보면 아람왕 벤하닷이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를 잡으려고 군대를 동원하여 엘리사가 머물고 있는 도단성을 포위하였습니다.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을 엘리사의 종이 보고 놀라서 엘리사에게 알렸습니다. 수많은 병거와 군사로 둘러싸일 때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우리도 일생을 살면서 우리 주위에 아람 군대와 같은 원수가 우리를 죽이려고 첩첩이 둘러싸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방으로 우겨 싸임을 받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죄와 세상의 유혹, 질병이 우리를 둘러쌉니다. 혹은 생활의 염려와 근심, 불안과 초조, 절망이 우리를 둘러싸기도 하고 원수가 둘러싸고 우리를 공격하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싸우려고 하다가는 우리의 질그릇은 여지없이 깨지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의지할 때 문제는 달라집니다. 믿는 성도들은 고통과 아픔으로 짓눌려져도 내가 깨지지 않고 터지지 않는 것은 내 안에 하나님의 능력인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결코 환경을 바라보고 두려워하여 뒤로 물러가면 안 됩니다. 

요일 4:4절에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 안에 계신 이가 세상보다 크십니다. 우리는 초라하고 보잘 것 없어도 우리 안에 우주와 만물을 지으신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세상보다 크신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우리는 어떠한 일이라도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순절 기간에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우겨 싸는 세상의 모든 환경으로부터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2. 우리 속에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고 있으면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는 삶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8절 중반 절에서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우겨쌈을 당하는 것이 외부적인 불안과 고통이라면, 답답한 일을 당한다는 것은 내적인 고통과 근심과 걱정, 그리고 불안으로 인한 고통을 의미합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답답한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대하 20장에 보면 유대의 여호사밧 왕이 갑자기 모압과 암몬의 연합군의 침공을 받아 유대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적군은 쳐들어 와서 유다를 포위했는데 대적할 능력이 없으니 여호사밧 왕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래서 답답한 심정을 하나님께 토로합니다. 대하 20:11-13절에 “이제 그들이 우리에게 갚는 것을 보옵소서 그들이 와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주의 기업에서 우리를 쫓아내고자 하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유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아내와 자녀와 어린이와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섰더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신앙생활이나 삶에서 이처럼 답답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해도 환난을 당할 수 있고, 선한 일을 했는데도 억울한 일을 겪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고, 주님을 잘 섬기고, 주일 성수하고 십일조 생활을 잘하는데도 고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정직하게 살았는데 억울한 일을 겪기도 하고, 생선을 달라고 열심히 기도했는데 뱀이 나타나기도 하고, 떡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돌이 나타나는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 항로가 순풍의 돛단배는 아닙니다. 태풍 유라굴로를 만나기도 하고, 파도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뒤집힐 것 같기도 하고, 엎어질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우리가 깨닫는다면 아무리 바람이 심하고, 파도가 높다고 할지라도 참고 이기고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서 어떤 큰 일을 하시려고 하실 때에는 어려운 일로부터 시작한다는 말씀입니다. 나를 통해서 기적적인 일을 하시려고 하실 때에 도저히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일로부터 시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승리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쓰시기 위해서 노예로 팔리게 하셨고, 13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하셨습니다.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만드시기 위해서 40년 동안 양떼를 치게 하셨습니다. 로마에 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해서 바울을 로마 감옥에 가두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답답한 일을 당해도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하나님이 길을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보배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위로하시고,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3. 우리 속에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고 있으면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거나 망하지 않는 삶이 됩니다.

사도 바울이 또 하나 자기 질그릇 속에 그리스도의 능력의 보화를 갖게 되었을 때 고백은 “박해를 받으나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가정에서 남편으로부터 버림을 당했고, 또 부모로부터 내어 쫓김을 당했습니다. 동족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사회로부터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거꾸러뜨린다는 것은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히11:36-37절에 보면 “희롱, 채찍질, 결박, 옥에 갇힘, 돌로 지는 것, 톱으로 켜는 것, 칼에 죽는 것, 궁핍, 환란, 학대”등의 핍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한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 버림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버림을 당하나 하나님께로 부터는 버림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승리입니다. 

초대교회 한 성도가 토굴 속에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발각되어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황제 앞에 서서 최후의 심문을 받습니다. “네가 가지고 있는 신앙을 포기하라 그러면 내가 용서하고 살려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저는 결단코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믿는 그리스도를 배신하고 나는 살 수 없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황제가 분노하여 신하에게 “저놈을 극악무도한 죄인들이 있는 감방에 가두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때 신하가 “안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죄인들이 있는 방에 가두면 그 감방 안에 있는 죄수들을 전도하게 되어 다 예수를 믿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황제가 “그러면 굶겨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신하가 “예수쟁이들은 굶기면 금식하며 기도하기 때문에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황제가 “그러면 당장 목을 쳐서 사형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또 신하가 안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쟁이들에게 제일 큰 영광은 순교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핍박이나 고난에도 절대로 넘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위로 주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 1:4-5절에서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 것은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속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0-11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아무리 죽음이 다가와도 우리 속에 있는 부활한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를 넘치게 붙잡아 주시고 계시기 때문에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확신으로 삽니다. 일곱 번 넘어지면 여덟 번 일어섭니다. 성도는 반드시 이 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결코 넘어지지 않습니다. 비록 어렵고 힘들기는 할지라도 결코 넘어지지는 않습니다. 거꾸러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 세상을 이긴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이 나를 넘어뜨리려고 할지라도 세상을 이기신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므로 반드시 승리할 줄 확신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 어디에도 탈출구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까? 조용히 앉아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이미 여러분 안에 엄청난 능력의 보배를 간직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속에 간직된 그 엄청난 믿음의 능력과 예수의 생명을 이제 확신하십시오. 그리하면 헤쳐 나가지 못할 문제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 어떠한 환경과 처지에 놓여 있다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길로 도전해 가십시오. 여러분 속에는 보배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사순절 기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승리의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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