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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좋은 땅의 축복 (막 4: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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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땅의 축복 (막 4:13-20)


13 또 가라사대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 14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15 말씀이 길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16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17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18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리우는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 19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20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농사와 관련된 속담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농(下農)은 잡초를 가꾸고(作草), 중농(中農)은 나락을 가꾸고(作穀), 상농(上農)은 땅을 가꾼다(作土)” 농사의 하수는 피와 같은 잡초를 뽑는 데 힘을 쓰고, 중농과 같은 평범한 농사꾼은 좋은 결실을 얻으려고 나락만 가지고 씨름하며, 진짜 잘하는 농사꾼은 땅을 좋게 만드는 데 전력한다는 뜻입니다. 잡초를 뽑는 것도 중요하고, 나락에 신경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땅의 질이 좋고 영양분이 있어야 작물의 수확이 좋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농사꾼은 부지런히 땅을 갈고 고르고 또 그 위에 영양분을 주는 객토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농사꾼입니까? 잘못된 것만 가지고 씨름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다른 것은 버리고 잘된 것만 붙잡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것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힘쓰고 있습니까? 씨앗은 자체 생명력이 있습니다. 좋은 환경만 제공되면 어떤 곳에서든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좋은 땅의 중요성을 일깨워줍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뿌렸지만 길가나 돌짝 밭이나 가시떨기 밭과 같은 마음에서는 좋은 결실을 얻을 수 없었고 오직 옥토와 같은 좋은 땅에서만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좋은 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 수는 적었을는지 모르지만 그곳에 이룬 30배, 60배, 100배의 결실로 말미암아, 길가와 돌짝과 가시떨기 밭에서 잃었던 손해를 너끈히 보상하고도 남았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이처럼 네 종류로 나누고 있지만 원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모두가 길가나 바위처럼 단단했는데 점점 옥토로 바뀌어 가는 것입니까? 아니면 원래 옥토였는데 완악해지고 단단해져서 길가나 바위처럼 변해버린 것입니까? 동양의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하여 본래 바탕이 되는 선한 마음의 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습니다. 순자는 반대로 성악설을 주장하여 인간은 본래 악하니 법과 규율로 다스려야 될 필요성을 역설하였습니다. 

사회학자이며 교육학자였던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는 단순히 문명에 대한 거부의 말이 아닙니다. 인간이 만든 사회조직이나 제도가 오히려 인간의 자연적 본성을 왜곡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을 비판하고 제시한 루소의 교육학 방법론의 일종이었습니다. 루소는 교육학의 고전이 되어버린 그의 책 『에밀』의 첫 줄을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신은 만물을 선하게 창조했지만 인간의 손에서 모든 것은 악하게 된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타락을 중심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우주와 인간을 만드실 때는 흠이 없고 아름다웠습니다. 모두가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밭은 형편없이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형편없이 망가졌다고 자주 말하였습니다. 이를 전적타락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전적타락이라는 말은 단지 구원과 관련되어서만 사용해야 합니다. 

인간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전적타락이라는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전적타락이라는 것을 인간성에도 적용하여 인간 마음의 본질적인 악함이나 무능력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를 적용한다면 옳지 않습니다. 이런 경향은 어린 아기를 바라보면서도 어떻게든 그들이 죄인이고 악하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신앙인들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성마저도 형편없이 망가졌다는 말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심각한 도전입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철저히 망가질 작품이라면 그것은 원래부터 완벽한 작품이라 할 수 없습니다. 타락은 작은 흠에 불과합니다. 인간 생명 자체는 에덴 동산에서나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위대하고 아름답습니다. 위대한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워낙 아름답게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루소나 맹자의 성선설에 한 표를 던지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의 원래 인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막10:14-15)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곧 옥토와 같은 마음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자에게는 어떤 씨앗이 뿌려져도 풍성한 결실을 맺습니다. 불행히도 인간은 이 어린아이와 같은 심성을 잃어버리고 단단하고 완악해져서 길가나 바윗덩어리처럼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래적인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무엇보다 단순하고 솔직한 마음입니다.

어린아이들은 단순하고 솔직합니다. 단순하고 솔직하다는 것은 자기 눈앞에 있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안다는 의미입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웃고 떠들며 그 순간을 즐깁니다. 자신이 가난하거나 자신이 위기에 처한 현실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는 화를 내거나 엉엉 소리 내어 웁니다. 자신의 위치가 어떻고 자신의 체면이 어떻고 하는 그런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울다가고 금방 까르르 웃기도합니다. 서로 싸우다가도 금세 함께 어울려 놉니다.

어른들은 가능할까요? 아닙니다. 내일에 대한 염려 때문에 현재를 마음껏 즐기지 못합니다. 자기 체면이나 위치 때문에 마음껏 울거나 웃지도 못합니다. 자기에게 잘못하거나 상처를 입힌 사람은 평생 원수가 됩니다. 소위 ‘뒤끝작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기억하고 있다가 결국 어떻게든 복수합니다. 편견이란 것도 어른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저 사람은 이래’ ‘저것은 이래’라고 규정하면 도무지 그것을 바꾸기가 어렵습니다. 상황이나 현실이 바뀌어도 수용하지 않습니다. 어른들은 그래서 예수님을 믿기가 힘이 듭니다. 자기 생각이 강해서 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SBS에서 하는 TV 동물농장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 동물원에 원숭이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중 한 원숭이가 자기 오빠 원숭이를 괴롭혔습니다. 가까이 올 때마다 얼마나 사납게 구는지 먹지고 못하고 함께 지낼 수도 없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동물들 하고 의사소통이 되는 하이디라는 커뮤니케이터를 불렀습니다. 하이디는 동물과 대화가 가능한 희한한 능력을 가진 여성이었습니다. 이 하이디라는 여자가 먼저 여동생 원숭이와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여동생 원숭이가 이렇게 자기 오빠를 사납게 대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했습니다. 자기는 강한 수컷과 짝을 짓고 싶은데 오빠 때문에 다른 수컷이 접근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이번에는 괴롭힘을 당하는 오빠 원숭이와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대화를 하면서 다른 원숭이 가족들과 따로 만남을 갖게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가족들이 오빠 원숭이와 함께 있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 “동생에게 당하지만 말고 용기를 내라”는 가족들의 메시지를 전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즉시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오빠 원숭이가 용기를 갖게 되었고 그 무서워했던 동생에게 용감하게 접근했습니다. 동생 원숭이는 처음에는 으르렁댔지만 달라진 분위기를 느꼈던지 이내 수그러들고 말았습니다. 급기야는 오빠 원숭이를 안아주며 털에 있는 이까지 잡아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동물과 대화하는 하이디라는 여성보다도 바로 이 장면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화해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렇게 쉽게 변화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었습니다. 인간들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단 한 번에 용서도 하고 변화도 수용할 수 있을까요? 절대 못합니다. 이것이 인간 마음이 가지고 있는 복잡함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힘든 것입니다. 

『실낙원』을 썼던 밀턴은 노년에 앞을 못 보는 시각장애인이 되었습니다. 눈이 멀고 난 후 밀턴이 했던 말이 있습니다. “나를 절망케 한 것은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소경된 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내 생각이었다.” 인간의 생각이란 것이 불행하게 만듭니다. 자기에 대한 집착, 내 처지에 대한 비관, 미래에 대한 염려 때문에 사람들은 솔직해지지 못합니다.

류시화 씨의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에 실렸고, 인터넷에서도 떠돌고 있는 작자 미상의 “신과의 인터뷰”라는 글이 있습니다. 신과 인터뷰하는 가상의 글인데 ‘나’란 사람이 신에게 “사람들을 보실 때 어떤 것이 가장 신기한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어린 시절을 지루해 하는 것, 서둘러 자라나길 바라고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길 갈망하는 것 / 돈을 벌기 위해서 건강을 잃어버리는 것, 그리고는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 돈을 잃어버리는 것 / 미래를 염려하다가 현재를 놓쳐 버리는 것, 결국 미래에도 현재에도 살지 못하는 것 / 결코 죽지 않을 것처럼 살더니, 결국 살았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죽는 것.”

이어서 ‘나’가 또 질문을 합니다. “아버지로서 어떤 교훈들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해주고 싶으신가요?” 하나님이 대답합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도록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단지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너 스스로를 사랑받게 만드는 것임을... 부자는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가장 적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너희에게 사랑을 표현 못하거나 말하지 못하는 사람 중에서도 너희를 진실히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나 자신 역시도 용서해야만 된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당신의 자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또 있나요?” 하고 ‘나’가 묻자 하나님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씀합니다. “늘 기억하거라. 내가 항상 이곳에 있음을. 언제나, 모든 방법으로.”

어린아이는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어린아이의 단순함과 솔직함은 실은 그 배경에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는 부모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어린아이에게 있어서 부모는 하나님과 같은 절대적인 보호자입니다. 어린아이는 전폭적으로 신뢰합니다. 부모가 왜 어린아이들에게 매여 있습니까? 아이들이 자기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도움 없이는 그들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믿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제 그분 앞에 어린아이가 되어갑니다. 그분이 우리 인생을 책임지시고 모든 것을 채우시는데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 될 때 우리에게 풍성한 열매가 주어집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이런 옥토 밭이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유대 지도층들의 위협이 있지만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제자들은 철부지 같았지만 주님은 염려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을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옥토 밭과 같은 결실이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진리 안에 거하는 자는 어린아이가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그분의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입니다. 

서예에서는 최고의 경지는 교(巧), 즉 아름다움이 아니라 졸(拙)이라고 합니다. 서예의 대가 추사 김정희가 세상을 떠나기 3일전에 봉은사 현판에 판전(板殿) 이라는 글씨를 썼는데 매우 어수룩한 필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글씨를 최고의 경지로 칩니다. 서예에서 최고의 경지를 환동(還童)이라고 하는데 이는 어린이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금세기에서 가장 존경받는 종교인 중 하나는 아마 티벳 라마교의 달라이라마 일 것입니다. 서구 사회에서도 이 달라이 라마가 가면 아무리 시골이라도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그런데 그를 가까이에서 본 사람들의 공통적인 인상은 그가 어린아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표정에 항상 웃음과 생기가 돌고 장난기도 있습니다. 진리가 그 안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신뢰와 확신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 기쁨이 있고 그 기쁨이 사람들에게 전해집니다.

최근에 돌아가신 분 중에 제가 보기에 가장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간직하고 계신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은 강영우 박사입니다. 이 분의 강연도 듣고 사진도 보았는데 항상 어린아이처럼 천진스럽게 웃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분은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입니다. 중학교 때 축구공에 맞아 두 눈을 다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그 1년 전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실명하고 나서는 그 충격으로 어머니와 누나가 죽었습니다. 동생들은 다 흩어져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형편이면 죽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그를 다시 일으켰고 그분의 의지가 스스로를 절망의 길로 몰고 가지 않았습니다. 실제 그렇습니다. 현실은 그렇게 비관적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견디기 힘들 현실이라고 거기에는 의미와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이란 것이 우리를 극단적인 비극으로 몰아갑니다.

강영우 박사는 이에 좌절하지 않았고, 열심히 공부해서 연세대학까지 들어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예쁜 여대생을 자기의 아내로 맞았습니다. 유학 가서는 열심히 공부했고 그래서 교육학 박사가 되었습니다. 부시 정부 때는 백악관의 장애인위원회 차관보라는 높은 자리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자서전 『빛은 내가슴에』나 『우리가 오르지 못한 산은 없다』는 책을 써서 절망한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었습니다. 그 자녀들은 아버지를 존경하며 자랐고 의학과 법학 분야에서 탁월한 인재들이 되었습니다.

그가 금년 2월에 췌장암으로 생을 마쳤는데 죽기 전에 지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겼습니다. “... 하나님의 축복으로 저는 참으로 복되고 감사한 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저의 실명을 통해 하나님은 제가 상상조차 할 수도 없는 역사들을 이루어 내셨습니다. 전쟁이 휩쓸고 가 폐허가 된 나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두 눈도, 부모도, 누나도 잃은 고아가 지금의 이 자리에서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덕분입니다. 

실명으로 인하여 당시 중학생이라면 꿈도 못 꿨을 예쁜 누나의 팔짱을 끼고 걸을 수 있었고, 실명으로 인하여 열심히 공부해서 하나님의 도구로 살아 보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습니다. 실명으로 인하여 책도 쓸 수 있었고, 세상 방방곡곡을 다니며 수많은 아름다운 인연들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아름다운 인연들로부터 받은 게 너무 많아 봉사를 결심 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하는 강연들도 하게 되었습니다. 두 눈을 잃고, 저는 한 평생을 살면서 너무나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늘 여러분의 곁에서 함께 하며, 이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싶은 마음은 무엇보다 간절하나 안타깝게도 그럴 수 없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최근 여러 번 병원에서 검사와 수술, 치료를 받았으나 앞으로 저에게 허락된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이 의료진들의 의견입니다. 여러분들이 저로 인해 슬퍼하시거나, 안타까워하지 않으셨으면 하는 것이 저의 작은 바램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누구보다 행복하고 축복받은 삶을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끝까지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렇게 하나, 둘 주변을 정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할 시간도 허락 받았습니다. 한 분 한 분 찾아뵈옵고 인사 드려야 하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점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으로 인해 저의 삶이 더욱 사랑으로 충만하였고, 은혜로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분은 두 눈을 잃었기에 하나님만 의지하였고 하나님께서 그의 앞길을 인도해 가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어린아이 같은 믿음이며 옥토와 같은 마음입니다. 우리 인생에 행복을 맛보고 싶습니까? 우리 인생이 100배의 결실을 맺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분과 함께 담대히 나아가십시오.

인내가 필요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좋은 땅에 대해서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8:15) 좋은 땅을 만들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 마음 밭을 가는 수고라 할 것입니다. 부지런한 농부는 황무지도 옥토로 만듭니다. 돌멩이 투성이인 밭을 부지런히 갈고 물을 주다 보면 어느새 옥토가 되어 있는 것을 주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저희 고향에 가면 광활면, 만경면이란 곳이 있습니다. 조정래 씨의 소설 『아리랑』의 무대가 되었던 곳입니다. 

땅이 얼마나 너른지 지평선이 보일 정도이고, 광할이라 만경이라는 말을 사용할 정도입니다. 원래 이곳은 바다였습니다. 일제 시대 간척을 했습니다. 처음 간척된 땅은 소금기 때문에 농사를 할 수 없습니다. 간척지의 염분을 제거하는 데 평균 10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물을 대고 빼면서 소금기를 빼고 객토를 한 끝에 이곳은 비옥한 땅이 되었습니다. 가을 추수철에 벼가 무르익어 바람에 물결치는 모습이 지평선 끝까지 이어지는 모습을 보면 장관입니다. 인내로 옥토를 만들었습니다.

땅 위의 모든 생물들은 미생물과 지렁이의 수고에 감사해야 합니다. 미생물과 지렁이가 수 억 년 동안 지상의 땅을 일구었습니다. 그 결과 전지구상에 평균 1m 두께의 토양층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 결과 이 대지 위에 식물이 자라고 동물과 인간이 생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내의 수고가 만들어놓은 결실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원래 좋은 땅입니다. 더러 완악해지고 더러 힘들게 살다보니 어느새 다져지고 단단해져버렸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묵은 땅을 기경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새 영을 주셔서 우리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께 우리 마음을 맡겨 드리면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옥토로 바꾸어 주시고 그래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인생을 만들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으로 인내로 모두 풍성한 인생의 복을 받으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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