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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시 예루살렘으로 (눅 24: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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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to Jerusalem (눅 24:13-35) 

‘엠마오 도상’(On the Road to Emmaus)이란 그림을 네델란드의 화가인 렘브란트가 그렸습니다. 그는 젊어서부터 초상화를 그려주면서 큰돈을 벌었습니다. 남부러울 것이 없이 살았는데 그 행복이 하루아침에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갑자기 죽었기 때문입니다. 렘브란트는 실의에 빠져 붓을 내던졌습니다. 그러다가 사람이 죽어도 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엠마오 도상’을 그리려고 무려 18종류의 번역 성경을 읽었습니다.

렘브란트는 위대한 생명의 비밀을 깨닫고 이 그림을 그렸다고 고백했습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남으로 인한 인생의 허무함과 좌절감의 길목에서 렘브란트는 부활의 주님을 만났고 엠마오 도상의 예수님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그림은 엠마오에 도착한 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는 장면입니다. 세 번째 그림은 낯이 익을 것입니다. Robert Zϋnd 가 그린 그림입니다. 

본문을 보면 제자 둘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그려집니다. 장소로 볼 때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다가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영적으로 볼 때 눈이 가리어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눈이 밝아져 알아봅니다. 감정적으로 볼 때 슬픔에 잠겨 가다가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사역적으로 볼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나다가 증인의 역할을 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이나 렘브란트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좌절의 길목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을 만난 후 회복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귀한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 실의나 좌절에 빠진 분은 안계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엠마오입니까? 예루살렘입니까?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 곁에 서서 우리와 함께 걷기 원하십니다.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만나 회복을 경험하며 삶의 현장인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합니다(13-24절)

앞에 있는 누가복음 24:1-12절은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하여 ‘빈 무덤’사건을 다룹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여인들이 무덤에 갔지만,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은 옮겨져 있었고,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곁에 섰던 두 천사가 근심하던 여인들에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5절)고 말합니다. 천사들의 역할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깜짝 놀란 여인들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사람들에게 알립니다. 베드로도 무덤이 빈 것을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천사들의 알림과 여인들의 증거와 베드로의 확인으로 구성된 빈 무덤 이야기는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갑자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큰 충격에 빠져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하고 여전히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글로바와 그의 친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낙심이 되어 예루살렘을 떠나 이십오 리 즉 7마일 쯤 떨어진 엠마오라 하는 동네로 가고 있었습니다. 7마일이면 우리 교회에서 동쪽으로는 에스콘디도 city hall 정도이고 서쪽으로는 78번상에 있는 Costco 정도입니다. 

길을 가면서 제자들의 화제는 온통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 믿음이 좋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과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사신 것을 믿지 않으면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지만 믿지 못하니 기뻐하고 감사하기는커녕 도리어 안타까워합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며 가는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 함께 걸어갑니다. 

그렇지만 그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습니까? “저희의 눈이 가려져서.” 다시 사신 주님은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부활의 몸을 입으셨기에 제자들이 모여 있던 곳에 들어가실 때 문이 닫혀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문을 통과하여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렇게 변화된 예수님이신지라 영적으로 어두운 상태에서는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없었습니다. 왜 어두워졌습니까? 불신앙 때문입니다. 믿지 않기에 그들의 영안은 어두웠습니다. 

길을 가면서 주고받는 이야기가 무엇이요? 예수님이 말을 걸자 두 사람은 슬픈 빛을 띠면서 가던 발걸음을 멈춥니다. 가장 기뻐해야 할 시간에 그들은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글로바라 하는 자가 말합니다. 당신은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최근에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합니까 하면서 답답하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정말로 답답한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사셔서 지금 그들 앞에 있는데 그들은 알아보지 못하고 도리어 죽은 예수를 붙들고 슬퍼하고 있습니다. 

글로바는 자기가 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하여 말해줍니다. 그분은 갈릴리 나사렛 출신인데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셨습니다. 그의 말씀이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서기관들이 전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라 권세 있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분은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심지어 죽은 자들을 살리셨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장정만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에 남는 기적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시기해서 그가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빌라도에게 고소했더니 그는 예수님이 죄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정치적인 야망에 눈이 어두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허! 우리는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요 이스라엘을 구속할 메시아 인줄 알았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죽다니 너무 안타까워요. 그가 죽은 지 벌써 삼일이나 지났어요. 이제 모든 게 끝났어요. 끝났어. 예수님을 향한 기대가 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말이요. 어떤 여자들이 우리를 놀라게 했어요.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오더니만 예수의 시신은 간 곳 없고 대신 천사들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예수님은 다시 사셨다나요. 기가 막혀서.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베드로도 무덤에 달려갔는데 그도 예수의 시신은 보지 못하고 돌아왔대요. ‘예수님이 다시 사시다니’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말도 안 돼요. 다들 정신이 어떻게 되었나봐. 두 제자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안다고 하면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기 전에는 못 믿겠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가진 믿음의 한계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가치, 우리의 신앙은 항상 말씀에 점검받고 조율되어야 합니다. 말씀보다 우리의 생각이나 경험을 더 의지할 때 엉뚱한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말씀을 들으며 마음이 뜨거워집니다(25-27절)

예수님은 이미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셨습니다. 그의 죽음이나 부활은 말씀의 성취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드러내십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면서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와 성경이 말씀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영광의 메시아, 승리의 메시아만 생각했지 고난 받는 메시아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구약을 인용해가며 당신에 관하여 말씀한 부분들을 자세히 풀어서 설명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깨우쳐 주시지 않으면 어떤 영적 진리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어떤 부분을 다루셨을까요? 

모세의 율법: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자의 후손이 바로 메시아를 가리킨다.

출 12장에 보면 해질 때에 이스라엘 자손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양을 잡아 그 피로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했는데 그 어린 양이 바로 메시아를 상징한다.

민 2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광야에서 놋뱀을 쳐다 본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던 것처럼 나사렛 예수를 믿는 자들은 구원을 받는다.


예언서: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나사렛 예수님은 동정녀 탄생을 하셨다.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그분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메시아는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다.


시편:

시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서 외친 말이다.

시 16: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이 예언에 따라 예수는 부활하셨다.

예수님에 관한 어떤 사건도 우연하게 일어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고난,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하나님께서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선포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들은 성령께서 마음의 문을 열어주셔야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연결시킬 때만 예수님에 일어난 사건들이 구약의 예언의 성취인 것이 깨달아집니다.

“자세히 풀어” 강해. 예수님은 강해설교의 원조입니다. 입에 침을 튀기며 ‘믿습니까?’‘믿음대로 될지어다’ 하면서 불과 같이 토해내는 말씀이라야 은혜를 받는 것 같지 강해 설교는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안계십니까?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길을 가면서 메시아에 대한 말씀을 풀어줄 때에 목소리를 높이며 열변을 토했겠습니까? 잔잔하게 말씀하셔도 성령에 충만한 메시지인지라 제자들은 들으면서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고백합니다. 주님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의 지경을 넓혀주기 원하십니다. 

단 위에서 내려다보면 설교 중에 눈을 지그시 감은 분들이 보입니다. 대개 매주 조는 분들이 주로 졸아요. 주님의 날에 아버지의 집에 왔으니 얼마나 편안하겠어요. 눈을 감고 묵상하며 한 주일동안 쌓인 피로를 풀고 있습니다. 어느 부흥회에 가서 목사님이 열심히 말씀을 전하는데 앞에 있는 분이 계속 조는 것이 너무 눈에 거슬려서 곁에 있는 권사님에게 좀 깨우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권사님이 자기가 재워 놓고 왜 나보고 깨우래 하며 툴툴 대더랍니다. 

효율적인 메시지 전달을 위하여 목소리는 어떤 톤으로 하고 어떤 제스처를 쓰고 음향 장치는 어떻게 조정해야 하고 등등 기술적인 면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자가 회개를 통하여 깨끗해지고 성령에 기름 부음을 받아 먼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고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은혜를 사모하고 자기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을 때 가슴에 더 진한 감동을 받게 됩니다. 서로 화답할 때 시너지 효과가 나타나 은혜가 더 은혜 됩니다. 그런 면에서 목사가 교인들을 만들고 교인들이 목사를 만듭니다. 은혜로운 설교가 되도록 목사를 위하여 기도를 많이 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주님의 기도에 눈이 떠집니다(28-31절)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엠마오에 거의 다 왔습니다. 두 제자는 이미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에 푹 빠졌습니다. 주의 말씀을 인하여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며 그들을 눌러온 슬픔과 염려는 사라집니다. 주의 말씀을 인하여 마음이 뜨거워진 제자들은 엠마오를 그냥 지나쳐 가시려는 예수님을 붙잡습니다. 그분을 그냥 보낼 수 없었습니다. 날도 이미 저물었는데 오늘 밤에는 우리와 같이 이곳에 머무십시다. 간절하게 권하니 예수님은 그 청을 받아

들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교제를 나누자고 먼저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원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그게 더 은혜가 되기 때문입니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씀을 토대로 그린 성화를 보면 예수님은 문밖에 서계신데 문 바깥쪽으로는 문고리가 없습니다. 그 문은 오직 안에서만 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마음 문을 열어 주님을 영접하기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 들어오실 때 자신을 더 많이 드러내십니다. 함께 음식을 드실 때에 예수님이 떡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난 후 떡을 떼어 저희에게 주시자 그들의 영안이 밝아집니다. 지금까지 함께 오시면서 성경을 풀어주었던 분이 바로 예수님인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을 깨닫는 순간에 예수님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족합니다. 이미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증인이 됩니다(32-35절)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누가 먼저 가자 말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난 것은 예수님을 잃은 슬픔 때문이었는데 이제 예수님이 다시 사신 것을 믿게 되었으니 더 이상 엠마오에 머무를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들은 즉시 일어나 그 밤에 열 한 사도와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시간에도 제자들은 모여서 주님이 다시 사셨다는 이야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했던 것을 인하여 낙심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이미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그 두 사람도 엠마오 도상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자기들과 함께 길을 가던 것과 구약에서 메시아에 관련된 말씀들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신 것을 말해 주었습니다. 엠마오에 있는 집에 들어가 식사를 나누면서 예수께서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자기들에게 주었을 때 갑자기 눈이 열리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된 것을 흥분된 목소리로 알려주었을 것입니다. 어느 새 두 사람은 갈릴리 여인들처럼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었다는 소식을 인하여 낙심하고 예수님이 부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던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갔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 믿음을 회복한 후에는 그들은 부활의 기쁜 소식을 가지고 엠마오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 낙심과 좌절과 포기의 길, 슬픔으로 가득 찬 길, 소망을 잃은 길, 도피의 길, 문제에 압도되다 보니 믿음을 사용하지 못하고 영의 눈이 어두운 채로 가는 길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는 길: 믿음으로 채워진 길, 기쁨으로 충만한 길, 소망으로 가득 찬 길, 사명을 가지고 가는 길.


성도 여러분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길을 가다보면 오르막길을 갈 때도 있지만 내리막길을 갈 때도 있습니다. 모든 일이 우리 뜻대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찬송을 부르면서도 막상 현실의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나를 택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더 나아가면 하나님은 과연 계시는가 하는 회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근심과 염려가 깊어지면 몸이 탈진이 되고 마음에 기쁨이 없고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됩니다. 믿음의 여부에 상관없이 사실은 이런 침체는 누구나 경험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거장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잠 못 이루는 밤을 가지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심지어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하소연하기도 했습니다. 모세가 그랬고 엘리야가 그랬습니다. 

민 11:5,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 

왕상 19:4,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문제에만 사로잡히면 주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이 보이지 않으면 우리 속에 아직 남아있는 세상적인 잔뿌리들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의심하고, 염려하고, 좌절하고, 슬퍼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항상 우리를 지켜 보시기에 찾아오십니다. 아들이 없다고 낙심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하나님, 졸지에 도망자가 되어 40년이란 긴 세월을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며 낮아지는 훈련을 하던 모세에게 찾아오신 하나님,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인과 대결하여 불의 응답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었으나 자기를 죽이겠다는 이세벨의 말을 듣고 영적 침체에 빠져 로뎀 나무 밑에서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한숨짓던 엘리야에게 찾아오신 하나님, 과거와 현재의 수치를 인하여 사람들의 낯을 피하던 수가 성 여인에게 찾아오신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찾아오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든지, 어떤 절망이나 근심거리에 싸여 있든지, 어떤 질병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든지, 어떤 인간관계로 인한 상처를 받고 있든지 주님은 우리를 치유하고 회복시키기 원하십니다. 우리 눈에 눈물을 닦아주시고 상처를 싸매주시기 원하십니다. 무엇으로? 주님의 부활의 능력으로.

말씀을 통하여 회복을 경험합니다. 

제자들이 부활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더디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디 믿는 사람들에게 성경 말씀은 단지 문자에 불과합니다. 구약은 이스라엘의 역사요 신약은 예수님의 전기로 여겨집니다. 믿음이 약해질 때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주님은 우리의 믿음의 지경을 넓혀주기 원하십니다. 

오늘도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고 삶을 변화시킵니다. 우리가 낙심과 불신의 길로 들어설 때 저의 발 앞에 말씀의 빛을 비추셔서 의의 길로 인도하시고 말씀을 통해 주의 뜻을 분별할 수 있도록 믿음의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성경을 풀어주실 때 마음의 뜨거움을 느꼈습니다. 말씀은 사람의 영과 혼, 관절과 골수까지 찔러 쪼개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히 4:12). 말씀이 우리 심령을 수술하고 우리의 아픈 부분을 어루만져 주시고 소망을 주십니다. 그럴 때 영적인 신령한 눈과 분별력을 가지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 열정과 생명력을 얻습니다. 하늘 문이 열립니다. 영의 눈이 밝아집니다. 


회복된 후 증인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회복은 모든 것이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더구나 그의 시신이 무덤에서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낙심했던 두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회복을 경험합니다. 말씀을 가르쳐 주셨을 때 제자들은 자기들을 둘러싼 의심과 염려의 구름이 걷히는 경험을 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을 회복하였습니다. 회복은 사명과 연결이 됩니다. 주님을 경험한 벅찬 감격을 자기들만 간직할 수 없어 다른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잠시 방황하였지만 다시 자신들의 사명을 발견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슬픈 얼굴을 하고 예루살렘을 떠났지만 이제는 기쁜 마음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대책 없이 예루살렘을 떠났지만 이제는 주님의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열정을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부인할 수 없는 체험이 있었기에 의심과 좌절의 상황에서 소망과 비전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체험은 우리 삶의 목적을 변화시킵니다. 예루살렘에서 다시 만난 사도들의 기쁨과 놀라움의 환호성이 오늘 우리 교회 안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부활의 진리를 알고 느끼고 감격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것이 삶의 변화와 헌신으로, 사명을 감당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삶에 일어나는 문제들을 인하여 낙심하거나 포기하며 엠마오로 가려는 마음을 가진 분들은 없습니까? 주님과 교제를 통하여 시련과 좌절을 딛고 일어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엠마오 길을 걸으며 예수님을 만났던 두 제자의 마음이 얼마나 뜨겁게 불타올랐습니까? 

은혜가 풍성하신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마음이 두 제자들처럼 뜨거워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세요. 성령께서 나의 영안을 열어달라고 기도하세요. 신실하신 주님은 우리의 부족함,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들로 만들어 사용하시고 우리의 삶과 사역을 통하여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가 부활하셨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도 부활하여 영생을 갖게 됩니다. 성도들은 이 땅 가운데 살면서 부활의 산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의 베푸신 은혜, 즉 말씀과 기도를 인하여 영육 간에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고 주가 맡기신 사명에 충실하며 신실한 부활의 증인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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