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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약할 그때에 (고후 12: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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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약할 그때에 (고후 12:7-10)


혹시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을 했는데 상대방에게 거절을 당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것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평소에 많은 것을 베풀었습니다. 또 그 사람의 입장에 서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도움을 요청을 했는데 도움은 커녕 자존심마져 무너지는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보는 본문에 보면 바울의 기도가 거절당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7절에 보면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육체의 가시를 ‘사단의 사자’라고 했는데 그의 고통이 사단이 주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가시’라는 단어의 어원적 뜻을 보면 짐작이 갑니다. 헬라어로 ‘스콜로프스’(σκολοψ)인데 ‘말뚝’ 혹은 ‘뾰족한 창’ ‘쇠꼬챙이’란 뜻입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여러분, 우리가 하다못해 손톱 밑에 작은 가시가 박혀도 얼마나 아픕니까? 그런데 말뚝이나 쇠꼬챙이가 박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그 고통은 무엇입니까? 많은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몇 가지로 설명이 됩니다. 혹자는 간질병, 혹자는 말라리아, 혹자는 안질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게 맞는지 모르나 안질을 가리킬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찬란한 빛을 보았습니다. 그때 눈이 멀었습니다. 나중에 아나니아가 안수 기도를 해줄 때 다시 보게 됐지만 그 후유증으로 바울은 평생 눈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답답함과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됩니다.(갈4:15, 6:11 참조) 

그래서 그는 간절히 기도합니다. 8절에 보면 세 번 기도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대충 세 번했다는 횟수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력을 다해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금식하면서 목숨을 바칠 각오로 장기간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9절에 보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응답하셨습니다. 완곡하게 표현해서 그렇지 한 마디로 말하면 ‘거절’입니다. 지금 상태로 충분히 은혜를 베풀었으니까 그냥 지내라는 겁니다. 병을 고쳐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 병을 안고 평생 살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인간적으로 야속합니까? 

지난 세기를 살펴보면 바울이라는 한 사람의 역할 때문에 세계 역사가 바뀐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 즉 종교적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그는 엄청난 영향력을 이 인류 역사에 끼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복음을 위해 산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시다시피 그는 누구 보다 예수를 믿는 자들을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고전15: 9절을 보면 바울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다. 고 말합니다. 그가 고백한대로 그는 믿는 자들을 옥에 가두고 고문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수를 모독하는 말을 시켰으며, 심지어 그들을 죽이기까지 한 무서운 핍박자였습니다. 

그가 누구였습니까? 초대교회가 부흥을 경험 할 때 그 부흥의 찬물을 끼얹는 엄청난 박해를 한 장본인이 아닙니까? 행8:1에 보면,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또 행9장 1-3에서도 예수 믿는 자를 잡기 위해 다메섹까지 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여러분, 이런 자가 어떻게 변 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아는 것처럼 사울은 참 변화되기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엄격한 바리새파 유대주의 배경에서 자랐습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습니다. 나면서부터 할례를 받았고 유대전통과 율법에 정통한 사람입니다. 

그가 길리기아 다소출신이라는 말은 헬라의 문화와 철학, 그리고 로마의 정치와 법에 익숙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또 그는 태어나면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로마시민권을 돈으로 사기도 했지만 태어나면서 로마시민권을 가졌다는 말은 대단한 가문의 배경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는 당대 석학으로 알려져 있는 랍비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수학했습니다. 그는 지성인의 자격을 갖춘 사람입니다. 

이런 사실을 두고 볼 때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감옥에 집어넣고 교회를 핍박하게 된 것은 그냥 맹목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자신의 철학과 신학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자기의 생을 걸 정도로 열정이 있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는 그는 "자신만의 분명한 삶의 틀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이 틀을 깨라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삶을 포기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예수 믿는 자를 잡아오는 일에 분명한 확신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데반을 돌로 치는 일에 앞장을 섰고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는 일에 모든 생을 걸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이단의 괴수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잘못된 신앙이며 예수 믿는 사람을 없애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는 이런한 열심은 그 방향이 잘못된 것이었습니다.이와 같은 자가 도저히 예수를 믿을 수 없을 것 같은 그의 생을 송두리째 변케 한 사건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달리 이것이외에는 설명 할 길이 없습니다. 행9장에 그는 예수 믿는 자를 찾으러 가다 다메섹이라는 곳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납니다. 사울의 회심 사건의 핵심은 사실 하늘의 빛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도 아닙니다. 사울의 인생을 뒤바꾸어 놓은 그의 회심사건의 핵심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예수님과 사울의 만남! "주여 누구십니까? 나를 이렇게 찾아와서 나를 이렇게 무릎꿇게 만든 장본인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사울의 물음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너무 분명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그렇습니다. 

이 예수님과의 대면은 사울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충격이었습니다. 이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라고 말합니다. 사흘동안 보지 못한 것, 그리고 식음을 전폐한 것은 그가 받은 충격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말하는 부분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예수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지금 나에게 나타난 예수가 바로 메시야란 말인가?" "예수님이 부활한 것이 사실이란 말인가? 나에게 나타난 그 분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면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아마 수많은 생각들과 물음들이 그의 삶을 흔들어 놓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을 구원자로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나중에 우리가 성경을 읽어나가다 보면 이 다메섹에서부터 그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전하는 전도자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만나면 어디서든지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야는 바로 예수님이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은 그 분이 바로 그리스도였다. 그 분이 부활하셨다. 

그리고 나를 만나주셨다"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핍박자가 전도자로 바뀌어진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러 왔던 그가 예수를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정말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살아갑니다. 그런데 자신을 믿어주었고, 자신과 늘 함께 한 예수님께 자기 몸을 너무 너무 고통스럽게 한 이 가시를 빼달라 한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토록 주 앞에 목슴까지 내놓고 충성하는 종의 기도를 당연히 들어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보세요! 그가 자신의 몸에 육체의 가시가 있어 이것을 제거해 달라고 하는데 주님은 무엇이라고 이야기를 하십니까? 다같이 9절을 보겠습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여기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가 무슨 말입니까? 

병을 고쳐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 병을 안고 평생 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떠하겠습니까? 자신의 젊음, 지식, 모든 것을 송두리째 다 드렸는데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한번쯤 따져 보거나 아니면 대들기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그 말 한마디에 불평한마디 안합니다. ‘도리어 크게 기뻐합니다.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겠다고 다시 다짐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가 어떤 것인지를 깊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잘 잊어버리는 습성이 있습니다. 자신이 과거에 한 잘못도 다 잊어버립니다. 자신이 주님을 만나기 전에 얼마나 보잘 것 없고 형편없었는지도 잊어버립니다. 심지어 주님을 얼마나 많이 근심케 하였는지도 잊어버립니다. 그런 중에도 감당할 수 없이 큰 은혜를 받아 존귀하게 되고 높아졌다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교만해지고 자신을 대단하게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우습게 바라봅니다.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 합니다. 누가 조금만 잘못해도 용서할 줄도 모릅니다. 사람이 자신을 모르고 자신에 대해 착각하며 날뛰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우수꽝스러운 일입니까? 그럼에도 사람들은 조금만 높아지면, 조금만 인기가 올라가면 자신을 잊고 교만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스톰스 박사가 은혜에 대하여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은혜란 당신의 공로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당� 탔�무공로로 잃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만일 우리의 선함과 자랑할 만한 것을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그것이 건강이든, 장수든, 부귀든 간에 은혜일 수 없다. 또한 우리의 악하고 부끄러운 것을 따라서 주시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 역시 은혜일 수 없다. 은혜는 우리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주시는 선물이다. 이 놀라운 은혜 주심을 감사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이 무조건 주신 파격적인 은혜로 된 것이지 내 노력, 내 선함과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자기를 믿어 주신 하나님의 파격적인 은혜가 있었기에 주를 위해 더 많이 수고할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고전15:10절을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은 예수님을 알고 나서부터 전력을 다해 주님을 위해서 일한 사람입니다. 

마치 하루 종일 일거리를 찾지 못한 어느 일꾼이 오후 5시가 되어서야 마음씨 좋은 포도원 주인을 만나, 하루 일당을 받기로 하고 남은 한 시간 동안 열심히 일을 하게 된 것과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 일꾼이 감지덕지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포도원 일을 한 것처럼 바울 역시 너무 감격해서 그 어떤 사도보다 더 열심히 일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하나님께 충성하게 된 것은 자기의 적극적인 성격 때문이거나 자기의 능력과 학식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파격적으로 대우하신 '그러나'의 은혜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말을 들으면 그가 퍽 겸손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그는 고린도후서 11장 23절과 12장 10절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라고 실토합니다. 

주님을 위해 이 정도의 헌신을 한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자기의 공로를 내세울 만도 한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모든 공로를 하나님께 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눈물의 기도마져 거절하신 하나님 앞에 서운함도 있으련만, 겸손하게 오히려 약할 때 강함 주시는 주의 위로 앞에 일어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같으면 어떠하겠습니까? 자신의 젊음, 지식, 모든 것을 송두리째 다 드렸는데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한번쯤 따져 보거나 아니면 대들기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미 없는 고통을 결코 허용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C. S. Lewis 교수는 옥스퍼드 대학의 예배당에서 설교를 하고 나올 때, 한 학생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이 증거 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째서 이런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고통을 허용하시는 겁니까?? 그 때 루이스 교수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고통이 있어도 교만한 인생인데, 만약 인생의 길에 고통마저 없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더 교만하겠습니까?” 그리고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고통이란 귀먹은 세상 사람들을 깨우기 위한 하나님의 메가폰(확성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평온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자녀들이 말썽 부리지 않고 잘 커갈 때, 남편이 다른 사람들보다 승승장구하며 승진을 잘 할 때, 손대는 일마다 잘 되고, 일이 잘 풀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인생 가운데 폭풍이 불고, 풍랑이 밀려올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C. S. Lewis는 우리에게 다가온 고통은 귀먹은 사람들을 흔들어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바울을 보세요!! 

9절입니다.“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여기 주님께서 거절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도리어 크게 기뻐했다”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병을 통해서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 병이 나를 약하게 하는데, 내가 약해질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되는구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비록 몸은 ‘육체의 가시’인 그 병으로 인해 가시에 찔리는 것처럼 아픔이 있지만, 그 약함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그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기쁨을 가진 것입니다. 10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그는 육체의 가시인 그 병을 볼 때마다 자신은 예수님의 종일 수밖에 없고, 예수님의 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늘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병으로 인해 아픔을 겪을 때마다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당하신 예수님, 내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당신의 생명을 내어놓고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육체의 가시인 병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혹 우리에게도 약함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는 무엇이 약함입니까? 물질적인 약함일 수도 있고, 육체적인 약함일 수도 있고, 정신적인 약함일 수도 있습니다. 뭔가를 하고 싶은데 내가 가진 능력의 한계로 인해 할 수 없는 능력의 약함일 수도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내게 그런 약함을 주셨는지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적인 가치로 말한다면 약함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감추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약함이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게 만들고, 그 약함이 나로 하여금 예수님을 닮는 삶을 살게 한다면, 그건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이것은 바울이 거절 속에 다가오는 축복의 신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마 우리 중 고난을 당하다가 약점으로 인해 괴로워하다가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하나님 앞에 나온 분들이 상당수 있을 겁니다. 내 약점 때문에 주님을 만났다면, 내 고난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다면 그것은 오히려 축복입니다. 시119: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반대로 모든 게 형통하고 잘 되기 때문에 아쉬운 게 없어서 하나님을 찾지 못한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리 오히려 저주입니다. 종합적으로 판단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난도 다 필요해서 하나님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자동차에 브레이크가 없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끔찍한 일이죠.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 모든 게 잘 돼서 하나님을 찾지 못하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장미 나무에 꽃도 있고 가시도 있는 이유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꽃만 있으면 좋으련만 하나님은 가시도 만드셨습니다. 왜 그럴까? 어쩌면 너무 아름다운 장미꽃이기에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런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장미꽃도 축복이지만 가시도 축복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까지도 사용하셔서 인생을 값지게 복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롬8:28 말씀에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뤄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비밀을 깨달았기에 바울은 이제부터 자신의 고난과 약점까지도 감사하며 자랑합니다. 본문 10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혹시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까? 질병이나 고통이나 슬픔이나 걱정거리가 있습니까?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그 문제들이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혹 그 기도가 거절되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어쩌면 그 문제 때문에, 그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고, 더 큰 은혜를 체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보면 더 좋은 결과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거절된 기도조차 축복인 것입니다. 부디 이런 사실을 꼭 명심하시고 어떤 형편이든지 자족하며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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