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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른 사람 상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 (요 2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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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 상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 (요한복음 21:18-25)

부활주일부터 몇 주 동안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부활에 관계된 말씀을 연속으로 드렸는데 오늘 한 번 더 전하는 것으로 마무리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지만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하셨습니다.   

이 말은 그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예고하심이라 했습니다.   어떤 죽음이기에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요?   베드로가 원하는 죽음의 방식이 아닐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죽음은 평안한 죽음, 사람들이 부러워 하는 멋진 죽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죽음은 주님의 뒤를 따르는 험악한 죽음, 다른 사람이 억지로 데려가 팔을 벌리는 십자가의 죽음이 되리라는 예고였습니다.   

베드로는 그런 죽음이 두려워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 부인했었는데 이제 와서 결국 그런 죽음을 맞이하게 되다니 얼마나 모진 운명입니까?   그래서 ‘난 못합니다’ 거절하며 도망했습니까?   베드로는 그 말씀을 듣고 순순히 주님을 따릅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베드로는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 시기에 십자가에 달려 죽임당했다고 합니다.  그것도 사형 집행관에게 거꾸로 달려 죽게 해달라 청하여 그렇게 집행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지난 시간에 예화로 소개했던 강영우 박사의 죽음 그리고 이어령 박사의 따님 고 이민아 목사 이야기 등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분들이 있습니다.  죽음에도 타고난 복이 있다고들 말합니다.  그 복이란 건강하게 오래 살다 죽기 전에 잠간 투병하며 자녀들의 정성스런 수발을 받다가 자녀들이 지치기 전 적당한 시기에 잠자듯 평안히 세상을 하직하는 죽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앞에서 예를 든 분들은 그런 복을 전혀 누리지 못한 분들입니다.  평생 신체장애를 가지고 살거나 오랜 세월 정신적 고통을 당하였고 죽을 고생을 하며 질병과 싸웠고 마지막에는 암에 걸렸습니다.  죽기에는 아직 너무 아쉬운 나이에 주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삶의 고통을 견디기 어려워 자살이나 안락사 등 죽는 방법까지 자기 마음대로 선택하여 인생을 마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 소개한 그분들은 호흡이 그치고 심장이 정지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주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감사함으로 살다가 가신 분들입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 길을 걷기 때문에 가는 길이 험하고 고단해도 믿음으로 전진합니다.   그리고 죽음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끼치고 남겨진 사람들의 삶을 성찰하게 하며 그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이것이 복된 죽음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죽음입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아무 명성도 대단한 업적도 남기지 못한 평범한 성도일지라도 생애 마지막 순간에 그 죽음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힘이 있고 성공하며 화려한 공적을 세워야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를 드러내려는 욕심에서 나온 생각일 뿐입니다.  나의 연약함이 도리어 주님의 능력을 내 속에 모시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달게 지고 주님이 명하신 그 길을 감사함으로 걷는다면 나의 연약함 모두 주의 영광을 위해 사용됩니다.   성공하고 잘 나가는 사람만 주의 은혜와 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실패하고 연약하게 보이는 사람도 얼마든지 주의 길을 따르며 주의 사명을 위해 일합니다.  

만사가 잘 되는 사람들을 의식하고 그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며 저 사람의 마지막은 어떻게 될까 상관하지 말고 나는 나의 길을 갑니다.   나는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고생스럽게 일하는데 저 사람은 만사가 형통한 길을 걸으며 편하고 즐겁게 일하고 있으니 세상이 불공평하다 이런 생각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그에게 주어진 삶을 살고 나는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 때문입니다.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내가 계획한대로 일이 잘 풀리고 하는 일마다 성공하면 자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일이 꼬이고 실패를 거듭하면 의기소침하고 세상을 원망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우쭐하거나 우울증에 빠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잘 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나의 불투명한 미래와 팍팍한 현실에 염증을 느끼고 열등의식에 사로잡히거나 다른 사람에 대한 질투와 비평으로 나의 힘든 처지를 달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처럼 주변 환경과 결과에 연연하며 사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자족하기를 배우는 지혜가 부족합니다.

가난할 때는 가난함으로, 병들었을 때는 병든 몸으로 그리고 실패하였을 때는 실패한 그대로 나를 받아들이고 나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발견하는 것이 더 지혜로운 자세가 아닐까요?    강영우 박사가 ‘시력을 잃고 재활을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알았다’ 말한 것처럼 나를 어려움에 머물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깨달으며 사는 지혜를 구합시다.       

앞서 가시는 주님을 따르던 베드로가 뒤를 돌아보니 요한도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문득 요한의 마지막은 어찌될 것인지 궁금해졌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했지만 요한은 평소 베드로와 경쟁자였고 예수님께 사랑을 독차지했던 제자였으니 나와 다른 모양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아니면 나이 어린 동생 요한을 많이 아끼고 사랑했기 때문에 요한은 나와 같은 어려움을 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까요?  그래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나처럼 팔을 벌리는 죽음이 아니라 뭔가 다른 결말을 보는 것 아닐까 하는 궁금증입니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예수님께 질문하였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찌 되겠습니까?’ 그때 예수님은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그를 세상에 살아있도록 남겨둔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요한은 내가 세상에 다시 오는 날까지 죽지 않고 살아서 내가 맡긴 일을 한다 해도 너는 그 사람의 길에 대해 상관할 필요가 없다.  그가 너처럼 험한 죽음을 맞이하거나 혹은 편안한 길을 걸을지라도 그것은 요한에게 주어질 분깃이고 너는 나를 따라 너의 길을 걸으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대답이 너무 냉정하여 베드로가 민망하지는 않았을까요?  

라이벌로 여겨지는 사람이나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동료의 미래가 어떻게 될까 궁금합니다.   나도 저 사람 못지않게 예수를 잘 믿고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고 자부하는데 나의 라이벌로 여기는 저 사람의 인생은 어떻게 될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나는 어려운 사명을 받고 고난의 길을 걷기로 결단했는데 나와 함께 있던 저 사람은 어떻게 될까 궁금합니다.   솔직하게 말해 우리는 다른 사람이 어찌 될까 하는 궁금증을 가집니다.   그리고 은근히 경쟁의식이 발동합니다.    나만큼 잘되면 축복하고 격려하기 보다 먼저 시샘과 부러움이 앞서고 그 사람의 마지막은 어찌 될까 하는 불필요한 관심을 가집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의 길이 있고 요한은 요한의 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길이라면 누가 더 잘하고 못하고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어찌하든 먼저 내가 주님을 따를 마음이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다른 형제들이 나처럼 고난의 길을 걷지 않고 편안하게 예수믿고 형통한 길을 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의 삶에 상관없이 내가 맡은 일에 충성하면 됩니다.   내가 가야 할 길이 있고 다른 사람이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다른 이들이 나처럼 힘껏 일하지 않는다고 섭섭하거나 속상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길을 걷게 될 것이니 상관하지 않고 나에게 주신 사명에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아,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그대로 지지리 궁상맞은 모양으로 체념하며 살고, 병든 사람은 평생 아픈 몸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인생이 복잡하게 꼬여 앞날이 불투명한 사람은 꿈도 갖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살라는 말이구나 이렇게 오해하고 비틀어 듣지 말기 바랍니다.  전하고자 하는 말씀의 핵심은 그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될까 나와 비교하여 상관하지 말고 주님이 나에게 주신 십자가, 내가 지고 갈만하여 허락하신 그 십자가를 지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앞을 바라보고 주님만 따라갑시다.   십자가 지고 가다 쓰러지면 주님께서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요, 지치고 곤하여 넘어지면 다가와 손 내미시고 함께 가자 하며 힘을 주실 것입니다.  

나는 어려운 생활에 최대한 절약하며 돈 한푼 마음 편하게 못쓰는데 어떤 이는 형편이 넉넉해 하고픈 일 마음대로 하고 선한 일 할 때도 척척 내놓습니다.   남을 의식하지 않으려 하지만 이따금 나와 비교가 되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꼭 필요하다 판단될 때 내 하고픈 일 포기하고 더 우선적인 필요에 물질을 사용하면 잘 하는 일입니다.   

생활에 여유가 있다고 누구나 선한 일에 시간과 물질을 즐거이 나누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있을 때 거기서 즐거운 나눔이 시작됩니다.  그 감사의 마음이 있을 때 넉넉하면 넉넉함으로 어려우면 어려움 중에도 나보다 더 힘든 형편에 있는 이들을 생각하며 힘껏 나누는 것입니다.   각자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대로 받은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 믿음의 분량대로 섬기는 것이며 나는 나에게 허락하신 은혜대로 섬김을 다하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는 것이 우선 목적이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주의 영광 나타냄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처럼 ‘내가 다른 사람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한다면 그런 마음으로 주를 섬기고 그런 마음으로 계속 주를 따르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요한은 어떻게 되든 베드로가 상관할 일이 아니고 베드로는 주님만 따르면 됩니다.   그런데 이 말이 다른 형제들에게 ‘요한은 죽지 않는다 하셨다’는 잘못된 소문으로 전해졌습니다.  말이란 이상하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과정에 전혀 다른 뜻으로 바뀝니다.  원래 의도했던 것이 아닌데 전달받는 사람은 정반대로 듣고 오해합니다.   베드로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 또한 이상한 뜻으로 전달되었습니다.  다른 말도 아니고 예수께서 맡기신 목양의 사명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따라오라 하신 말씀이 본래의 뜻과는 상관 없이 요한은 죽지 않는다는 말로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소문이 더 부풀려지면 사람들이 요한을 불사신이나 되는 것처럼 떠받들고 영웅으로 만드는 일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요한에게 관심이 모아지며 너도나도 요한처럼 장수하는 복, 고난을 피하는 법, 죽음을 면하는 법… 이런 것에 관심을 둘 수도 있습니다.  그럴리가 있겠나 하겠지만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힘든 십자가의 길 보다는 그런 일에 더 많은 관심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4복음서 가운데 시간적으로 가장 나중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도들 중에 요한이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제자였습니다.  요한의 친형 야고보는 주후 44년에 가장 먼저 헤롯 임금의 손에 목이 잘려 순교하였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도 로마의 박해 기간 중에 순교하였는데 요한은 밧모섬으로 유배 당하기 전까지 에베소에 머물며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서머나 감독 폴리갑의 제자 이레니우스의 말에 의하면, 유배 생활을 마친 요한이 밧모섬에서 돌아와 주후 98년까지 에베소에 살았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요한은 유일하게 순교당하지 않고 평안하게 세상을 떠난 사도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베드로는 순교당하지만 요한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죽지 않고 살아 남는 사도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이런 소문을 퍼뜨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요한은 잘못된 소문을 바로 잡기 위해 복음서 마지막 부분에 한 마디 덧붙입니다.    ‘예수의 말씀은 그 제자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너에게 무슨 상관이냐?’하신 것이라.  ‘그 사람 상관 말고 너는 나를 따라 너의 길을 가면 된다’고 하셨다 그 말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증거하고 기록한 제자가 바로 이 사람이니 그 말이 진실이라’ 하며 그 현장에 있었던 증인으로서 그리고 당사자로서 다시 한 번 분명히 강조하여 못을 박습니다.   주의 말씀이 오해되고 와전되는 것을 바로 잡으려는 요한의 진실한 의도가 확실하게 보입니다.  

사도 요한이 복음서 끝 부분에 부록처럼 남긴 이 구절이 복음의 의미를 분명하게 해줍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진실과 사실을 바탕으로 한 말씀이지 사람들에게 전해들은 소문이나 흥미거리를 재미있게 포장하여 전달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의 철학이나 도덕 강의 혹은 인생 성공의 비결로 변형시켜 전하는 것도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의 목적은 그 말씀을 듣고 믿는 사람의 인생이 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씀을 깨닫고 예수를 믿어 그를 따르는 제자가 됩니다.  

복음의 주인공은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지 복음을 전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위대한 사도였던 베드로나 요한, 바울이나 다른 분들이 사람들에게 존경은 받았을지라도 숭배의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그분들은 자신들의 언행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누가 될까 조심하고 또 조심하며 어찌하든 나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 기쁨이 되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던 신실한 청지기들이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1:20-21) 했던 바울의 고백은 복음을 맡은 모든 일군들이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나를 통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시기만 바라는 청지기의 본분에 힘써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어 부자가 되고 성공한 인생을 사는 사람도 있지만 예수를 믿어도 여전히 가난하고 소위 세상이 말하는 출세도 못하며 질병 중에 고생하는 사람들도 허다합니다.   가난하든 부자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 차별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시인하며 세상 사는 동안 거짓이 없는 선한 양심과 믿음을 가지고 성도로서의 삶을 충실하게 산다면 그 사람이 참으로 복음에 합당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주님은 교회를 위해 목숨을 주신 것처럼 교회는 주님께 사랑으로 복종하는 신부로서 섬기는 관계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를 따라 나의 양들을 먹이고 돌보며 마지막에는 목숨까지 내어 줄 수 있느냐?  이것이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요구하신 헌신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만 주님을 따라가다 뒤돌아보며 저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걱정하거나 시샘하지 말고 나의 길을 걸읍시다.   

요한은 어떤 모습으로 따르던지 요한이 걸어야 할 길이며 베드로는 베드로로서 맡아야 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며 심지어 죽음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 바랍니다.    이것이 확실한 부활의 소망으로 사는 성도가 누리는 진정한 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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