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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학개서의 역사적 배경과 메시지 (학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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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개서의 역사적 배경과 메시지 (학 1:1-6)

구약성서에 예언서들이 많이 있는데 시기적으로 나누면 네 가지로 분류됩니다. 먼저 B.C. 721년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 왕에 의해서 멸망당할 때 예언했던 선지자가 있습니다. 호세아, 아모스, 요나, 이사야, 미가, 오바댜 이렇게 6명은 B.C. 721년 예언을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B.C. 587년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멸망할 때까지 예언한 사람들이 스바냐, 예레미야, 나훔, 하박국입니다. B.C. 587년부터 B.C. 539년 바벨론 포로기에는 에스겔, 다니엘이 예언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기 전반부에 활동했고 다니엘 선지자는 포로기 전체에 걸쳐서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B.C. 538년 고레스 칙령이 발표되고 예루살렘으로 유다 백성이 돌아온 이후 학개, 스가랴, 말라기 선지자가 활동했고 요엘 선지자도 후기 저작설이 맞는다면 이 시대에 활동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는 같은 시대에 활동했습니다. 학개와 스가랴가 활동한 시대적 배경이 에스라 1장부터 6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가 학개와 스가랴의 메시지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이것을 잘 읽고 알아야 됩니다.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그들이 증거하는 메시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학개서의 시대적 배경은 네 단계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Ⅰ. 고레스 칙령(B.C. 538) 

남왕국 유다는 북왕국이 멸망한 B.C. 721년으로부터 136년 더 지속되었습니다. 그동안 히스기야나 요시야와 같은 훌륭한 왕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악한 왕들이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므낫세는 55년을 통치하면서 엄청난 악을 행했습니다. 결국 남왕국 유다도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케 한 우상숭배의 길을 따라갔고 B.C. 587년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멸망하였습니다. 

열왕기하 25장과 예레미야 52장에 이것이 자세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솔로몬이 7년에 걸쳐 지은 궁전도 완전히 파괴되고 모든 집들이 불태워졌습니다.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히고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성전에서 사용되었던 모든 금그릇, 은그릇은 옮겨져 바벨론 신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유다는 망했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렘 29:10).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고나면 돌아오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B.C. 605년 여호야김 왕 때 느부갓네살에 의해 1차로 다니엘과 세 친구가 포로로 끌려간 때부터 시작해서 70년이 지나 B.C. 537년 고레스 칙령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B.C. 539년 하나님께서는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를 사용하셔서 바벨론을 멸망시켰습니다. 

고레스 왕은 바벨론을 멸망시키기 20년 전인 B.C. 559년에 페르시아의 왕이 되어 B.C. 550년에 그 옆에 있는 나라 메대를 정복했습니다. 그리고 B.C. 539년에 바벨론을 멸망시켰는데 오늘날로 치면 이란이 이라크를 멸망시키고 지배한 것입니다. 고레스 왕이 바벨론을 통치하기 시작한 B.C. 538년에 고레스 칙령을 발표하였습니다. 

고레스 칙령의 내용은 에스라 1장 1~4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와서 70년 동안 고생한 유다 백성들은 이제 자유롭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도 좋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으니 너희는 돌아가서 성전을 지으라. 예루살렘으로 안돌아가고 바벨론에 남는 사람들은 고국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은이나 금이나 물건이나 짐승으로 예물을 드려라.” 이것이 고레스 칙령인 것입니다. 고레스는 페르시아 사람으로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고레스 왕이 어떻게 이런 칙령을 발표할 수가 있느냐? 이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고레스 왕이 칙령을 발표하게 된 것에는 세 가지 원인이 있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이미 그렇게 할 것이라고 예언하셨기 때문입니다.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 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 (사 44:28). 

고레스가 정권을 잡기 100년 전에 이미 이사야가 고레스라는 이름도 알고 고레스가 자기 백성을 바벨론의 포로된 것에서 해방시키리라는 것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언을 한 것입니다. 둘째, 다니엘 선지자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다니엘 9장을 보면 다니엘 선지자는 예레미야서를 읽다가 바벨론 포로생활이 70년 갈 것을 알고 금식하며 약속을 이루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고레스 왕의 마음에 섭리하셨습니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잠 21:1). 

저수지에 있는 물을 농부 마음대로 인도하듯이 왕의 마음도 하나님 마음대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스 1:1).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작정하시고 예언케 하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언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여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고레스 칙령이 발표되었고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고레스 칙령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수가 몇 명이냐? 

에스라 2장 64~67절에 기록된 것을 보면 42,360명이 돌아오고 노비가 7,337명, 노래하는 남녀가 200명 돌아왔다고 아주 정확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모두 합해보면 5만 명에서 103명이 모자랍니다. 하나님께서 대충 5만 명으로 써놓지 않으시고 정확하게 기록해놓으신 이유는 무엇이냐? 천국은 대충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착각하거나 실수로 들어가서 숫자가 틀리는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확실히 예수님을 구주로 믿은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만 명에서 103명 모자란 사람들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고 이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은 바벨론에 정착해서 남아있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느부갓네살이 성전에서 탈취했던 금, 은그릇 5,400개도 다 돌려받았습니다. 고레스 왕이 성전에서 쓰던 그릇을 다 돌려주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의 마지막 왕인 벨사살이 잔치를 열어 술을 마시다가 기분이 좋아져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금그릇으로 술을 마셨는데 갑자가 손가락이 나타나 벽에 알 수 없는 글씨를 써 놓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오늘 벨사살이 죽고 바벨론도 멸망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결국 그날 고레스가 쳐들어와서 벨사살은 죽고 바벨론은 멸망하였습니다. 이것을 듣고 고레스는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모든 기물을 다 돌려주라고 한 것입니다. 


Ⅱ. 성전 지대를 놓음(B.C. 536) 

고레스 칙령이 B.C. 538년이고 유다 백성이 돌아온 해가 그 이듬해인 B.C. 537년 4월이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돌아와서 성전에 지대를 놓았습니다. 이들이 돌아오자마자 먼저 성전 터에 가서 보았는데 그들을 인도한 사람은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였습니다. 

옛날 솔로몬 성전이 있던 터에 가서 보니까 완전히 황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지고 온 모든 보물들을 성전 건축을 위해서 바쳤습니다. 이들이 가장 처음 와서 한 일은 성전 건축을 위해 예물을 드린 것입니다. “역량대로 역사하는 곳간에 드리니 금이 육만 일천 다릭이요 은이 오천 마네요 제사장의 옷이 일백 벌이었더라” (스 2:69). 

이들은 인색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학개 선지자가 증거하는 백성들은 인색해서 헌금하지 않은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헌금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헌금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학개서의 메시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전심을 다해 헌금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도착한지 3개월이 지난 B.C. 537년 7월에 이르러서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한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성전을 짓기 전에 먼저 예배를 회복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듬해 B.C. 536년에 드디어 성전 건축을 위한 지대를 놓게 되었습니다. 

에스라 3장 8~11절에 보면 레위인들 가운데 20세 이상 되는 남자들은 공사 감독을 하고 나머지 지파들은 공사를 하여 성전 건축을 위한 토목 작업인 지대를 놓게 되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레위인들 가운데 찬송을 맡은 사람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불고 제금을 들고 여호와를 찬양했습니다. “주는 선하시므로 그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레위인들이 찬양하니까 백성들도 즐거운 소리로 부르며 화답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성전을 눈으로 보았던 노인들은 대성통곡을 합니다. 어렸을 때 보았던 솔로몬 성전은 매우 큰 성전이었는데 그 성전이 어디로 갔냐고 하면서 대성통곡을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전 지대를 놓을 때 대성통곡하는 소리와 여호와를 찬양하는 소리가 어우러져서 어떤 소리인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학개 선지자의 책망을 받고 있는 유다 백성들은 불신자가 아닙니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고 찬송하며 전심을 다해 헌물을 드린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이었습니다. 


Ⅲ. 사마리아인들의 반대가 일어남 

성전에 지대가 놓이고 성전 재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사마리아인들이 스룹바벨과 족장들을 찾아왔습니다. B.C. 721년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앗수르 왕 에살핫돈의 명령으로 사마리아의 유대인들은 전 세계로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사람, 에돔 사람, 아람 사람 등 이방사람들을 사마리아에 심어놓았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팔레스타인 땅에 살고 있지만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처음 사마리아에 와서 하나님을 업신여겼습니다. 그러다가 몇 사람이 죽자 그때부터 정신을 차리고 제사장을 데려다가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호와만 섬긴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가지고 온 신도 섬긴 것입니다. 이것을 종교 혼합주의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저희가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 (왕하 17:33). 

한국에는 종교혼합주의가 많습니다. 주일이 되면 교회 가고 4월 초파일이 되면 절에 갔다가 명절이 되면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유교도 아니고 불교도 아니고 기독교도 아닌 종교혼합주의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혼합주의로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에스라 4장 2절을 보면 사마리아 사람들이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와서 헌금할테니 성전 건축에 동참시켜달라고 요구합니다.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로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 같이 너희 하나님을 구하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스 4:2). 

그러자 스룹바벨과 족장들은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스 4:3). 왜냐하면 스룹바벨은 우상숭배로 70년을 고생해본 사람입니다. 바벨론에 가서 70년을 고생해봤기 때문에 종교혼합주의를 다시 허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거절당하자 그때부터 조직적, 의도적으로 성전 건축을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페르시아왕 고레스 때부터 다리오 왕에게 이르기까지 페르시아 관리들에게 뇌물을 줘서 방해 작업을 계속 했습니다. 고레스 다음으로 왕이 된 사람이 캄비세스인데 성경에서는 아하수에로라고 부릅니다. 

에스더서에 나오는 아하수에로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캄비세스 왕에게도 유다 백성을 고소합니다. 그리고 캄비세스 다음으로 왕이 된 사람은 아닥사스다 왕인데 느헤미야서에 나오는 아닥사스다 왕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사마리아인으로 페르시아의 관리가 된 르훔과 심새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유다 백성을 모함하는 편지를 올린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성읍을 건축해서 반역을 도모한다고 모함을 하자 아닥사스다 왕이 조서를 내려 성전 건축을 중단시켰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 초본이 르훔과 서기관 심새와 그 동료 앞에서 낭독되매 저희가 예루살렘으로 급히 가서 유다 사람들을 보고 권력으로 억제하여 그 역사를 그치게  하니” (스 4:23).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가 조서를 내려서 성전 건축을 막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 기초만 놓고 더 이상 진척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은 불신자들도 아니고 배교자들이나 이단자들도 아닙니다. 정통신앙을 가지고 종교혼합주의를 단호히 거부하는 참된 성도들이었고 헌신된 성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모함과 권력으로 인해 하나님의 일을 중지하게 된 것입니다. 
 
학개서의 문제는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반대와 공격이 오자 실망과 좌절을 하여 중단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옛날에만 있었던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늘날도 동일합니다.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듣고 깨달아 성령 충만을 받고 교회와 구역에서 봉사하다보면 방해가 옵니다. “너 장로 되고 싶어서 그러냐? 왜 그렇게 난리를 치냐?”면서 별 소리를 다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그만두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학개 선지자가 말씀을 증거한 유다 백성들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성가대를 봉사하다가 떡을 돌렸는데 성가대장하려고 떡 돌리냐면서 몰아붙입니다. 그러면 떡 돌리고 그 다음 주에 교회에 안 나오는 것입니다. 또 두 사람이 떡 해왔는데 한 사람 것은 맛있고 다른 한 사람 것은 맛이 없다고 해서 안 나오고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Ⅳ. 다리오 왕의 조서(B.C. 520) 

B.C. 536년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가 발표되자 유다 백성들은 16년간 성전 건축을 중단하였습니다. 먼 길을 돌아와서 헌금하여 성전을 지으려고 했지만 방해로 인해 16년 동안 아무것도 못한 것입니다. 이때 에스라 5장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학개, 스가랴 선지자를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학개가 두 달 먼저 예언을 시작했는데 B.C. 520년 학개와 스가랴가 다시 일어나 성전을 건축하라고 하자 스룹바벨과 여호수아가 성전 건축을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는 그대로 유효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자 강 서편에 주둔하는 페르시아 총독 닷드네와 그의 보좌관 스달보스네가 스룹바벨에게 찾아와서 질문하는 것입니다. 

누구의 허락을 받고 성전을 건축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아보셨으므로 저희가 능히 역사를 폐하게 못하고 이 일을 다리오에게 고하고 그 답조가 오기를 기다렸더라” (스 5:5). 누구의 허락을 받고 짓느냐고 묻기만 하지 성전 건축을 방해하지는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막아주신 것입니다. 
 
페르시아 총독 닷드네와 스달보스네는 아닥사스다 뒤를 이어 왕이 된 다리오에게 편지를 보내어 고레스 칙령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다리오 왕은 유다 백성들이 성전을 건축하는 이유를 알아보게 되었고 실제로 조사해보다가 고레스 칙령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다리오 왕은 고레스 칙령과 동일한 조서를 내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 역사를 막지 말고 유다 총독과 장로들로 하나님의 이 전을 본처에 건축하게 하라” (스 6:7). 

결국 다리오 왕이 조서를 내린 B.C. 520년 성전 건축이 재건되었고 4년 만인 B.C. 516년에 성전이 완공되었습니다. 16년 동안 중지되던 것이 4년 만에 완공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전을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결론 
  
학개서의 배경을 이렇게 자세히 말씀드리는 이유는 학개서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정확히 듣기 위해서 입니다. 학개서에 나타난 유다 백성들의 문제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거나 헌금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헌신되지 않았거나 너무 인색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주님께서 명하신 일을 행하는 도중에 닥쳐온 반대, 어려움, 모함, 방해 때문에 넘어지고 좌절한 것입니다. 

축구 선수가 공을 몰고 가다가 태클이 들어와서 넘어졌다고 계속 넘어져 있으면 되겠습니까? 다시 일어나서 뛰어야지 넘어져서 누워있으면 되겠습니까? 학개서의 메시지는 우리가 선한 일을 하다가 반대가 올 수도 있고 욕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모함하고 오해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처리하실 것이고, 우리는 그런 반대를 뚫고 주님의 일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와 어려움을 뚫고 나가는 믿음과 용기가 부족한 것이 유다 백성들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학개서의 교훈은 우리 성도들이 인생을 살면서 사업을 하다가 어려운 일이 왔거나 가정에 어려움이 왔다고 해서 좌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와서 넘어졌다고 해도 다시 일어나 어려움을 뚫고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우리 성도님들은 다 뚫고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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