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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아버지의 뜻을 따랐는가? (마 21:2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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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아버지의 뜻을 따랐는가?  (마태복음 21:28-32)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질문을 던지며 대답해보라고 주신 두 아들의 비유와 그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입니다.   우리가 읽은 한글 개역성경과 스크린에 비친 NIV 번역의 차이를 발견하고 궁금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한글 본문에는 맏아들이 포도원으로 가겠다 대답하고 가지 않았으며, 둘째 아들은 처음에는 가기 싫다 하고 나중에 뉘우치고 포도원으로 갔습니다.   예수님이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묻자 사람들이 ‘둘째 아들입니다’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NIV에 보면 정반대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첫째 아들이 싫어요 했다가 나중에 뉘우치고 돌아갔으며, 둘째는 ‘예’ 하고 결국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첫째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다고 대답합니다.  

성경에 이처럼 전혀 다른 번역이 있으니 어떻게 된 것일까 궁금합니다.   대부분 영어 성경은 NIV와 같은 순서로 되었고 우리말 성경 중에도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 등은 영어성경과 같은 순서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어느 것이 맞고 틀렸다 말하기 어려운 것은 모든 번역들이 성경 원본이 아닌 사본들을 자료로 번역했고 원본을 필사했던 사람들의 실수로 사본들 사이에 미묘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본들의 차이 때문에 성경 원본의 의미가 무시되거나 달라진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늘의 본문도 본래 예수님이 말씀하시려던 의미가 번역의 차이 때문에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번역본들마다 첫째와 둘째 아들의 순서가 다르지만 중요한 것은 첫째냐 둘째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아버지의 뜻을 따랐느냐는 질문에 처음에는 싫어요 했지만 나중에 뉘우친 아들이라 대답하는 점에서 모든 사본과 번역들이 동일하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비유에 나오는 맏아들과 둘째 아들이 각각 누구를 상징하느냐는 해석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맏아들을 이스라엘 민족이라 하고 둘째를 구원 받은 이방인이라 해석하기도 하는데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예수님의 다른 비유 중에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이스라엘 민족 밖의 잃어버린 영혼 이방인이고 큰 아들을 이스라엘이라 해석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비유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는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의 순서와 상관 없어 보입니다.  질문처럼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가 중요한 주제입니다.  세리와 창기들은 처음에는 아니요 했다가 나중에 뉘우치고 돌아온 아들처럼 세례 요한이 선포한 회개의 복음을 듣고 돌아온 사람들이라는 점을 강조됩니다.   

반대로, 처음에는 ‘예’ 했지만 결국 가지 않은 아들은 사람들 앞에서는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회개와 천국의 복음을 선포하는 세례 요한을 거절하였던 사람들이라는 책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누구였습니까?   세리와 창기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않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등 유대교 지도자들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가리키는 책망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말씀하신 배경이 무엇입니까?  예루살렘 성에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여 자신을 다윗의 후손 메시야로 드러낸 예수님의 행동과 성전의 장사치들을 내쫓으시며 청결하게 하신 행동, 그리고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일을 보고 화가 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런 권세를 주었느냐?’ 물었습니다. 성전에서 이런 종교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인 자기들에게 허가를 받은 사람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공식적인 허가를 받지 않은 예수님을 사이비 종교 지도자로 몰아 예루살렘 성에서 퇴출시키려는 의도로 물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생들은 토론을 벌일 때 누가 더 어려운 질문을 하여 상대방이 대답하지 못하도록 하느냐에 관심이 있습니다.   어려운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대답을 잘하면 그의 명예가 올라가고 질문한 사람이 그 사람보다 못하다는 판정을 받습니다.   그대신 대답을 못하면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고 명예가 떨어집니다.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은 이런 의도에서 예수님의 약점을 잡으려고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들을 자주 던졌습니다.  

그런데 질문을 받은 예수께서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하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온 것이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하고 물으십니다.   떼를 지어 몰려와 일방적으로 질문 공세를 폈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입장이 바뀌어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서로 의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럿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했지만 예수님의 질문에 시원한 대답을 줄 수 없었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만일 하늘로부터 왔다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반격을 당하게 될 것을 자기들도 알았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즉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라 하면 요한을 믿지 않은 것도 문제지만 요한이 예고하고 소개했던 예수님의 권위 또한 하늘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의 약점을 잡으려 했던 그들이 도리어 궁지에 몰렸습니다.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온 것이라 대답하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고 따르는 백성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 두려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더 두려워했던 비겁한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한 그들은 결국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합니다.  정말 몰라서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대답하기 곤란하여 모르겠다는 대답 아닌 대답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포도원의 두 아들 비유로 그들에게 되물으시며 대답을 대신합니다.   우리가 읽은 개역 한글성경에 나오는 대화를 봅시다.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얘야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하니 아들이 ‘예, 아버지 가겠습니다’ 하고는 가지 아니하였다.   둘째 아들에게도 이같이 말하니 그 아들이 ‘싫습니다’ 하더니 나중에 뉘우치고 갔다.  그렇다면 둘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하시니  사람들이 둘째 아들이라 대답합니다.   

옛날 유대인 사회는 씨족들이 한 동네에 모여 살고 함께 일하며 어떤 일을 할 때 한 자리에 모여 오늘 누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의논하고 시작하는 대가족 공동체였습니다.  이렇게 많은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며 일을 맡겼습니다.   옛날 유대 사회는 또한 명예를 대단히 중요시 여겼습니다.   명예를 중요시 하는 유대 사회에서는 모든 요구사항에 일단 예라고 대답하는 것이 일반적인 습관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예’ 했지만 그 약속이 실제로 지켜질지 아닐지는 나중 문제이며 일단은 예라고 대답해야 서로의 명예를 높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화적 관습을 따라 맏아들은 온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일단은 ‘예’ 하고 대답함으로  아버지의 명예를 존중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하러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이라면 맏아들의 입장을 이해하여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싫어요 했던 아들은 아버지와 가문의 명예를 떨어뜨린 불효자였고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아 마땅한 죄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면전에서 불순종한 아들은 물론이고 아들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한 아버지의 명예까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과연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는가?’ 물으심으로 당시의 사회에서 일반화된 공식을 깨뜨리셨습니다.   조금 전에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물으실 때는 모르겠다 하던 사람들이 너희 생각이 어떠하냐 하고 비유를 들려주시고 물으실 때 이번에는 대답을 합니다.  비유란 참으로 묘한 힘을 가졌습니다.  직설적으로 물으면 우물쭈물 하지만 비유로 물으면 금방 대답을 합니다.   당시 사회에서 비난을 받아 마땅했던 작은 아들이 사실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두 아들의 비유를 해석하시며 요한의 세례를 받아들인 사람과 거절한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요한의 세례와 가르침을 끝까지 용납하지 않으면서 도리어 천국 복음을 듣고 회개하는 사람들을 정죄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끝내 회개치 아니하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들처럼 겉으로만 ‘예’ 하고 뒤돌아서면 ‘아니요’ 하는 교만하고 회개할 줄 모르는 자들이 아니라 처음에는 ‘아니요’ 했을지라도 나중에 뉘우치고 돌아온 세리와 창기들과 같은 죄인들을 위해 있다.  그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 하시며 완악한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이것이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유대인을 대신하여 이방인을 불러 하나님 나라 유업을 나누게 하셨고, 입술로만 고백하고 행함이 없는 유대인들보다 자기 죄를 깨닫고 돌아오는 세리와 창녀들을 자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 등 율법 선생들의 외식적인 종교활동을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없었지만 예수님은 대놓고 책망하셨습니다.  
      
누구의 허락을 받아 감히 성전에서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  하며 예수님을 몰아내려 했던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 입으로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뜻에 순종했다고 대답함으로 졸지에 예수님의 비유 속의 맏아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명예를 대단히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 특히 개인의 명예와 가문의 명예를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던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대답하는 순간 그들의 명예는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땅바닥으로 곤두박질 쳐졌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분통을 터뜨리며 예수님을 잡아들이려 할만한 수치스런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설명을 듣고 난 그들이 얼마나 당황하고 자존심이 상했는지는 33절-44절에 두 번째 비유를 듣고 난 다음에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했던 행동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나 거기 있던 백성들의 눈이 두려워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고 마음으로만 분을 삭이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명예가 소중한 줄은 그렇게도 잘 알면서 하늘 아버지의 명예는 가볍게 여기는 불충한 자녀들의 행동이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주일 아침에 예배드리고 돌아갈 때 마음을 새롭게 하고 이번 주일부터는 믿음생활 잘 해야지 했다면 그건 하나님 앞에서 예라고 대답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주일 하루 반짝하다가 역시 이전 습관으로 돌아가버린다면 실제적으로는 아니요가 되었습니다.  세례교인이 될 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예 라고 서약한 내용들이 있습니다.  세례 받을 때 교인으로서 지켜야 할 그리스도인의 구별된 삶을 힘쓰겠노라 약속한 것은 공적인 자리에서 예 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활을 돌아보면 그 약속을 너무 가볍게 무시하며 지내는 일이 허다합니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이라 나는 물론 하나님의 체면을 위해 예라고 했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약속을 지키기 어렵다는 핑계로 한 두 번 순종하다 점차 모르는체 하고 삽니다.   오늘 우리는 성찬식에 참여합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며 입으로 맛을 보는 그리스도의 성찬을 통해 예라고 대답했던 그 약속들을 되새기며 변치 않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또 다짐하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제대로 지키지 못할 약속이니 차라리 아니요 라고 거절하고 나중에 상황을 따라 순종하면 오늘 예수님 비유하신 것처럼 나도 작은 아들 그룹에 속하지 않을까 이런 기대는 하지 맙시다.  그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순종하는 자리로 돌아오기까지 겪어야 하는 고통스런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을 가볍게 여기지 맙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대답도 예지만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며, 혹시라도 아니요 했지만 회개하고 돌아와 순종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말씀드린 대로 무화과나무 같은 나를 하나님 나라 포도원에 심으신 은혜도 크고 놀라운데 열매를 맺지 못하고 땅만 버리는 나를 오래 참아주시며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고 감사할 뿐입니다.   열매 없는 나를 위해 한 해만 더 참아달라 간청하며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던 주님, 쓸모 없는 인생을 위해 오늘도 기도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과 은혜로 우리가 살았고 또 회개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스스로 의롭다 여기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며 멸시하는 자칭 의인들을 위한 나라가 아니라 죄인임을 고백하고 나중에라도 뉘우치고 하늘 아버지께 돌아오는 탕자와 세리와 창기 같은 작은 아들들에게 열려 있는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려던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여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처음부터 예 하신 주님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신 마지막까지 예 하심으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 아들이었습니다.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를 위해 살과 피를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주셨습니다.   주님의 성찬에 참여하는 교우 여러분, 불순종하던 나를 불러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게 하신 사랑을 감사하며 주님의 순종과 은혜에 기쁨으로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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