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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포도원의 무화과나무 (눅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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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의 무화과나무 (누가복음 13:1-9)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올리브나 대추야자나무와 함께 팔레스틴 지역에 자라는 과일나무들 중에 대표적인 나무들입니다. 포도나무는 달콤한 열매는 물론 갈증 날때 시원하게 마시는 포도주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사랑을 받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에 비해 그 가치가 한참 떨어지는 흔한 나무입니다.  팔레스틴의 무화과나무는  정성스럽게 가꾸지 않아도 어디서나 잘 자라고 많이 열릴 때는 일년에 다섯 번까지 열매를 딸 수 있을 정도로 왕성한 생산력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나무는 사실상 그해에 땅만 버리고 귀중한 물만 낭비하는 쓸모없는 나무로 인식됩니다.  그 나무 아니고도 열매를 맺는 무화과나무는 얼마든지 널려있기 때문에 오늘 성경에 나오는 무화과나무처럼 열매 없는 나무는 가차없이 베어버리는 것이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활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에 등장한 포도원의 무화과나무는 속된 표현으로 엄청난 행운을 누리는 나무이며 영적인 표현으로는 무한한 은혜를 받고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 농부 중에 그 어떤 사람도 포도밭에 무화과나무를 심어 귀중한 물을 소비하고 거름을 주며 정성껏 돌보는 바보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포도원에 무화과나무가 자라고 있는 것을 보았다면 주인은 그 나무를 얼른 뿌리채 뽑아 버리거나 잘라 불태우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냥 두면 다른 포도나무에 손해를 끼치고 이웃 사람들에게 게으르고 어리석은 농부로 낙인 찍혀 무시를 당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포도원에 심은 무화과나무 비유는 유대인의 율법과 농사법의 배경을 이해하고 들어야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성경지리 역사를 연구하는 어느 목사님이 복음서에 나타난 유대적 문화 배경을 설명한 책을 썼는데 오늘 우리가 읽은 비유를 이해하는데 아주 좋은 자료를 제공합니다.  오늘 본문해석의 중요한 아이디어는 이 책에 나온 내용을 인용하였고 앞으로도 복음서에 등장하는 유대인의 풍습을 말씀드릴 때 이 책의 설명을 자주 인용하려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잘 이해하려면 먼저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이 히브리식 사고방식에 익숙한 유대인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어떤 포도나무 과수원 주인이 자신의 포도밭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다’는 말로 시작했을 때 그 말씀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은 세상에 그런 바보가 어디 있어?  라고 반응했을 겁니다.  포도원 주인의 마음이 너그럽다 못하여 판단력이 부족한 바보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포도밭에 무화과나무를 심는 바보도 없지만 삼 년씩 찾아왔는데도 열매 하나를 얻지 못하고 있는 주인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사람일까 하며 예수님의 이야기가 비현실적이라고 마음으로 비웃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고 열매를 기다리는 주인은 삼 년씩이나 찾아왔는데 매번 허탕만 치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런 무화과나무가 어떻게 그 오랜 세월 동안 도끼로 찍혀 불에 던지우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인가? 무화과나무가 행운아가 아니면 주인이 바보든가 둘 중의 하나라는 말입니다.  누가 이런 행운과 은혜를 누리는 사람일까요? 첫째는 그때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이며, 다음은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제목을 달리할 수 있습니다.  <포도원의 무화과나무라> 라는 제목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입고 사는 우리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이라면 ‘농사의 기본도 모르는 어리석은 포도원 주인’이라고 비웃는 투로 제목을 붙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관점에서 보면 말씀의 중심은 길이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라 해야 맞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은혜를 입은 사람이 아니라 이런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죄인들을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주인의 마음이 한 없이 너그럽고 그 기다림이 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도 없이 기막히고 놀랍습니다.  과수원 주인이 열매를 얻으러 삼 년을 찾아왔다는 부분을 주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율법을 준수하는 히브리인들에게는 유실수를 심는 법과 그 나무에서 열매를 얻는 것에 대한 법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 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 (레19:23) 라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이 법을 따른 주인은 무화과나무를 심고 몇년 뒤에 열매를 얻으려고 과수원에 찾아갔을까요?  4년째?  아닙니다.  4년째 열리는 열매는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는 3년이 지난 뒤 열리는 첫 열매였습니다. 유대인의 신앙습관 속에 모든 생축의 첫 새끼들과 나무들의 처음 난 열매는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레19:24; 민3:13, 8:17). 그러므로 포도밭 주인은 4년째에도 무화과 열매를 얻으러 가지 않았습니다. 이런 배경을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들을 때 주인이 무화과나무를 심은지 4년이 아니라 5년째 되는 해에 처음으로 열매를 구하러 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레19:25).

그런데 어떤가요?불행하게도 그 나무에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무화과나무는 더 두고 볼 필요도 없이 당장 잘라버려야 하는 것이 유대인의 상식적인 생각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 나무를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주인을 욕하기 시작합니다. 도대체 저 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저 쓸모없는 나무를 자르지 않고 포도밭에서 자리만 차지하도록 놔둔단 말인가? 바보도 보통 바보가 아니다 하고 멸시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인은 다음해 6년째 되던 해에 두번째 방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열매는 여전히 없었습니다.  이웃 사람들은 포도원 주인이 작년에 욕을 많이 먹었으니 이번에는 당연히 잘라버리겠지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주인은 그 나무를 잘라버리지 않았습니다.사람들이 이번에는 더 심하게 욕을 합니다. 쓸모없는 무화과나무 때문에 귀중한 포도밭이 버려지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그 밭에 포도나무를 심으면 더 많은 포도를 거둘 수 있고 더 많은 포도주를 생산할 수 있었을텐데 하며 속상해 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주인이 무화과 열매를 거두기 위해 세 번째 찾아온 해는 과연 나무를 심은 지 몇 년째가 되는 해일까요? 7년째? 아닙니다. 오늘 성경 이야기 속에 나오는 유대인들은 모두  율법에 익숙하고 히브리식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유대인에게 7년째는 어떤 해일까요? 그렇습니다. 무화과나무를 심고 7년이 되는 안식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인은 그 해에는 열매를 구하러 포도밭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주인이 무화과 열매를 얻으러 찾아간 세번 째 해는 무화과나무를 심은 지 8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포도원에 들어섰을 때 눈앞에 펼쳐진 것은 아직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가 뻔뻔하게 버티고 서있는 실망스런 광경입니다.

그제서야 주인은 진노하여 과수원지기에게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 열매를 구하였지만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하였습니다. 곁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그러면 그렇지 이제야 이 사람이 제 정신이 돌아왔구나’하며 반가워했고, ‘저 쓸모없는 무화과나무가 잘라지는 꼴을 오늘에야 비로소 보는구나 속이 다 시원하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복병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과원지기입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합니다. 사람들은 뒤퉁수를 한 대 맞은 듯 멍한 충격을 받고 열이 나서 과원지기를 당장이라도 죽일 듯 에워싸고 욕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주인에게는 이런 멍충이 과원지기를 당장 해고하라고 아우성치며 입에 거품을 물고 항의했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바보라고 생각했던 포도원 주인보다 더 심한 바보가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여기서 끝을 맺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유대인들은 세상에 이런 비현실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포도원 주인과 멍청이 과수원지기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비웃으며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예수님을 이상한 듯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려고 했던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포도원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고, 포도나무는 일반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이스라엘을 상징하며, 무화과나무는 하나님 나라의 유업에서 벗어난 사람들, 이방인들을 의미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과수원지기는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이 비유에서 묘사된 하나님은 기대할 수 없는 것에 대해 한없이 기대하며 참고 기다리는 바보 하나님이셨습니다.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 때 기다리는 것은 이해할 만합니다. 그러나 아무데나 아무렇게 던져놓아도 열매를 맺어야 할 무화과나무가 그 좋은 땅 포도원에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데 몇 년을 기다린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포도원 주인처럼 바보같은 기다림으로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포도나무를 제쳐두고 무화과나무를 심으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비켜내고 그 자리에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얻지 못한 사람들을 대신 심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무화과나무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여러 해가 지나도 열매를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들을 바라보던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그 나무를 베어 버리라 명하였지만 주인의 앞을 막아서며 한 해만 더 기회를 달라고 간청하는 과원지기가 있습니다.  포도원의 무화과나무에게 이 과원지기는 더없이 은혜롭고 자비로운 대상입니다.  그 과원지기가 바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임 당하신 예수님이시며 우리는 과원지기의 간청으로 살아남은 무화과나무들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신 기간에 길가에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고 가까이 가서 열매를 구하였으나 아무 것도 없을 때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마21:19)  하고 그 나무를 저주하여 뿌리로부터 마르게 하신 일을 기억하십니까? 생명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분이 그때는 왜 그렇게 심한 저주를 내리셨을까요?그때가 아직 무화과 철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는 이상하게 잎이 무성하여 마치 무화과 열매가 있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기대감을 주었습니다.  잎이 무성하면 열매 또한 풍성해야 무화과나무로서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아무 것도 없었던 이 나무는 제 철도 아닌데 마치 열매가 가득 열린 것처럼 사람을 속여 실망시키는 나무였습니다.  다시 말해 거짓으로 꾸며 하나님과 사람을 속이는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유대인의 영적 상태와 같았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 자리에서 나무를 책망하여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신 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계신 주님이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보시고 얼마나 실망하셨는지 그 심정을 실감나게 보여주신 경고의 메시지였습니다. 

주인의 오래 참음과 과원지기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들은 이 말씀을 듣고 있던 그 당시의 유대인들이며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 자신들이 아닐까요?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 배경이 무엇입니까? 1절부터 5절의 말씀에 대한 부연설명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로마 총독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갈릴리 지방 사람들은 예로부터 외국세력에 대한 적개심이 강해 로마에 대한 반정부운동을 벌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총독 빌라도는 팔레스틴 식민지 백성들이  반정부운동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갈릴리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본보기로 삼았습니다. 유월절 같은 큰 명절에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이면 시위대들의 반정부 데모가 자주 발생하였는데 이번에도 빌라도가 성전에서 제사드리던 사람들 중 갈릴리에서 온 시위대를 무참하게 학살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리고 로마 군인들에게 희생된 갈릴리 사람들의 피가 희생제물의 피와 뒤범벅이 되는 아수라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들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예수께 찾아와 보고한 사람들은 빌라도의 칼에 죽은 갈릴리 사람들이 지은 죄가 많아 그렇게 끔찍한 죽음을 당했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웃의 죽음과 슬픔을 죄의 댓가로 해석하여 그들을 정죄하고 은근히 자신들의 의로움을 내세우려는 사람들의 악한 생각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주님은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명이 죽은 사건을 추가로 언급하셨습니다. 빌라도의 칼에 처참하게 죽임 당한 사람이나 공사장에서 사고로 죽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아 죽었다고 생각하지 말라.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이와 같이 망하리라 하시며 너희도 속히 회개의 열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라고 충고하셨습니다. 

빌라도의 칼에 죽은 갈릴리 사람들의 죽음을 이야기거리로 삼는 자신들 역시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가엾은 존재라는 사실을 모른채 들떠 있습니다. 그들은 제 눈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보며 비난하고 정죄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이 바로 포도원에 심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라는 사실을 모르고 예수님의 비유를 들으며 비웃고 있었습니다.  그 주인이 아무리 바보처럼 보였고 과원지기가 멍충이처럼 보였을지라도 주인의 오래 참음과 과원지기의 간청 때문에 자신들이 지금껏 생명을 유지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를 알지 못하고 비유를 듣고 있던 그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며 정죄할까 두렵습니다. 우리는 모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할 포도원의 무화과나무들입니다. 나같이 부끄럽고 연약한 인생을 영원히 멸망할 세상으로부터 골라내어 하나님의 나라 포도원에 심어주셨으면 주인의 한 없는 은혜에 보답하는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벌써부터 오래 참고 참으시기를 몇 번이나 하시는데 아직 죄의 심각함을 모르고 세상과 하나님 나라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답답해 하실까요? 지난 주일 말씀드린 것처럼 언제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해야 하겠습니까? 

끔찍한 사고와 사건들 그리고 전쟁과 자연재해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소식이 들려옵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당하는 재난을 두고 하나님의 진노로 당연히 받을 심판을 받았고 당할 죽음을 당한 것이라 정죄하고 있으니 참으로 기가 막히고 두려울 뿐입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과 흉허물을 들추어 내어 내 의로움을 드러내는 기회로 삼거나 내 허물과 죄는 꽁꽁 싸매고 감추면서 나는 의로운양 살아간다면 잎사귀만 무성하고 실제로는 열매 하나 없었던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처럼 이후로는 영영히 열매 맺을 기회를 잃고 말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진노에도 불구하고 과수원지기이신 우리 예수께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시려고 한 해만 더 기다려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하지 않으신다면 감히 우리가 이렇게 부끄러운 모습을 가지고도 멀쩡하게 생존할 수 있을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가 더 깨끗하고 더 흉한 죄인인가 서로 비교하여 정죄하거나 안심하며 정의의 사자인양 뽐낼 자격이 없는 가엾은 죄인 중의 한 사람일 뿐입니다. 참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을 손에 쥐고 계시며 한 해 더 기회를 줄테니 이젠 하나님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으며 살라 하실 때 주신 기회를 선용하며 그 은혜에 감사함으로 살아갑시다. 성도 여러분의 삶속에 하나님이 기뻐하실 선한 열매들이 풍성하게 맺혀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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