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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분량 (롬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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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분량 (롬 12:3-8)

1. 야곱의 외삼촌 라반에게 두 딸이 있었습니다. 큰 딸은 레아이고 작은 딸이 라헬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외삼촌 집에 들어가 한 달 정도 지날 무렵 라헬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간파한 라반은 야곱이 부지런하고 유능한 목자임을 알고 이렇게 제의합니다. 
“네가 나의 조카이긴 하다만, 나의 일을 거저 할 수는 없지 않느냐? 너에게 어떻게 보수를 주면 좋을지, 네 말을 좀 들어 보자.” 

그러자 야곱이 “제가 칠 년 동안 외삼촌 일을 해 드릴 터이니, 그 때에 가서,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과 결혼하게 해주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야곱이 그렇게 말할 줄을 이미 알았던 라반이 “그 아이를 다른 사람과 짝지어 주는 것보다, 너에게 짝지어 주는 것이 더 낫겠다. 그러면 여기서 나와 함께 살자.” 면서 7년 후 라헬과 결혼하게 해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맞으려고 칠 년 동안이나 일을 했지만, 라헬을 사랑하기 때문에, 칠 년이라는 세월을 마치 수일처럼 느꼈습니다. 그렇게 해서 칠 년이 지난 뒤에, 약속대로 라헬과 결혼한 야곱이 신혼 첫날밤이 되었습니다. 그 밤에 라반은 의도적으로 라헬 대신에 큰 딸 레아를 들여보냈습니다. 야곱은 그것도 모르고, 레아와 신혼 첫날밤을 치렀습니다. 아침이 되어서 야곱이 눈을 떠 보니, 한 이불 속에 있는 여자가 그토록 사랑했던 라헬이 아니라 레아인 것에 놀라 라반에게 “외삼촌께서 저에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제가 그 동안 라헬에게 장가를 들려고 외삼촌 일을 해 드린 것이 아닙니까? 외삼촌께서 왜 저를 속이셨습니까?” 며 따지자 라반이 이렇게 말합니다. “큰 딸을 두고서 작은 딸부터 시집보내는 것은, 이 고장의 법이 아닐세. 그러니 이레 동안 초례 기간을 채우게. 그런 다음에, 작은 아이도 자네에게 주겠네. 그 대신에 자네는, 또 칠 년 동안, 내가 맡기는 일을 해야 하네.” 라면서 지방 관습을 들먹이며 또 다시 7년을 더 일할 것을 야곱에 요구한 것입니다. 

야곱은 어쩔 수 없이 라반이 말하는 대로 해서 레아와 이레 동안 지내고 나니, 라반은 자기 딸 라헬을 그에게 아내로 주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사랑은 오직 라헬이었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레아는 외로움 속에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했습니다. 자식을 낳게 되면 남편이 사랑하리라 생각하고 하나님께 도우심을 간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레아의 처지를 긍휼히 여기시고 레아의 태를 여셔서 마침내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레아는 “주께서 나의 고통을 살피시고, 나에게 아들을 주셨구나. 이제는 남편도 나를 사랑하겠지” 하면서, 아기 이름을 ‘르우벤’이라고 지었습니다.(창29:14-32) 

‘르우벤’이라는 이름의 뜻은 ‘보라.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레아는 자신의 비천한 처지를 돌아보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의 뜻을 아들의 이름으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레아의 태를 열어 주시지 아니 하셨더라면 그는 천한 여인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첫아들을 주시지 아니하셨더라도 그는 사랑받는 아내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너무나 분에 넘치는 아들이었기에 ‘르우벤’이라 이름 지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르우벤’은 분명 야곱의 장손이요, 이스라엘 12지파의 대표였지만 장자의 기득권을 온전히 누리지 못했습니다. 레아가 기대한 만큼 이름값을 못했습니다. 이 사실을 야곱이 죽기 전에 르우벤에게 축복한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창49:3-4)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왜 그는 이스라엘의 장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제사권은 레위에게로, 통치권은 유다에게로, 상속권은 요셉에게로 넘겨주고 말았겠습니까? 무엇보다 그는 장자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점이 그의 치명상이었습니다. 동생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그를 죽이려고 했을 때 적극적으로 만류하지 못하고 ‘피를 흘리지 말라’는 권고 밖에 못했다는 것이 그의 무능을 입증한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치명적인 이유는 일가족과 함께 벧엘로 올라가던 도중 아버지의 첩(庶母) 빌하와 통간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건은 그의 생애에 씻을 수 없는 오명이었습니다. 여기서 아무리 르우벤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장자로 태어났다 할지라도, 자기 분수를 지키지 아니하고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힌 것이 바로 패륜적인 행동으로 모든 장자의 축복을 상실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12아들들에 대해 임종을 앞두고 축복할 때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했습니다.

(창49:28)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어느 날 빌립이 예수께 “주님,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고 부탁하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4:9-14)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예수께서 그 본체가 하나님이시지만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 오셨기 때문에 한 말씀이라도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의 안에 계셔서 모든 일을 행하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아들로서 행하실지라도 스스로 행하는 법이 없으시고 아들의 분수를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이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섬기려 오셨습니다. 마가복음 10:43-45을 보겠습니다.

(막10:43-45)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와같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그 뜻과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빌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인간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느 자리에 있든지 사람의 본분을 지켜야만 합니다. 사탄은 본래 천사였는데 천사가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분수를 지키지 않아서 쫓겨나 사탄이 된 것입니다. 

(유 1: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그 사탄이 에덴 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하와는 금단의 열매를 먹으면 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피조물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음에도 그 분수를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 어떠한 환경에서도 자신의 지위와 처소를 지키는 삶으로 항상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오늘 본문 말씀은 성도들이 어떠한 자세로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생활을 해야 하는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 섬기는 삶의 기준이 바로 ‘믿음의 분량’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 생각하여 봉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를 가장 적절하게 설명하기 위해 교회를 하나의 몸으로 비유했습니다. 우리 몸의 지체는 서로 다투지도 않고, 시기하지도 않으며, 제각기의 중요성에 대해 서로 시비하지도 않습니다. 몸의 각 지체는 그 기능이 제아무리 뛰어 났거나 혹은 그 기능이 제아무리 눈에 안 보일 정도로 작고 낮은 것일지라도 자기 기능을 다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그와 같아야 합니다. “온몸이 다 눈이라면, 어떻게 듣겠습니까? 또 온몸이 다 귀라면, 냄새는 어떻게 맡겠습니까? 그런데 실은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우리 몸에다가 각각 다른 여러 지체를 두셨습니다. 지체는 여럿이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눈이 손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 데가 없다’ 할 수가 없고, 머리가 발에게 말하기를 ‘는 내게 쓸 데가 없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사람이 몸 가운데서 더 약하다고 여기는 지체가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그리고 몸 가운데서 덜 귀하다고 생각하는 지체들을 더욱 귀한 것으로 입히고, 볼품 없는 지체들을 더욱 더 아름답게 꾸며 줍니다. 예를 들어 만약 눈썹이 덜 귀하다고 해서 그 눈썹이 다른 위치에 있다면 얼마나 불편하고 추하겠습니까. 두 눈과 두 귀가 각각 서로 그 기능이 같다 해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위치에 있지 아니하고 자기 좋은 자리에 있다면 얼마나 불편하겠으며, 또한 얼마나 추한 모습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리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기능을 다 할 때 건강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몸을 골고루 짜 맞추셔서 부족한 지체에게 더 큰 존귀함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게 하시고, 지체들이 서로 같이 걱정하게 하셨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같이 고통을 당합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입니다.”(고전12:12-27). 

이 비유에서 말씀하는 바는 성도는 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서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고,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이며, 서로 다른 역할을 제대로 해나갈 때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 지체가 각자의 임무를 다 함으로 협조할 때에만 교회 전체가 해야 할 것을 통일성 있게 제대로 다 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건강하고 아름다움 모습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각자의 “믿음의 분량”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알고 지킬 때만이 올바르고 건강한 신앙생활의 기쁨과 축복을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바로 인식하지 못할 경우에는 자신을 스스로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하는 잘못을 범하기 쉽습니다. 자신을 과대평가하게 되면 교만하게 됩니다. 

반면 자신을 과소평가하게 되면 비겁하게 됩니다. 교만과 비겁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치명적인 걸림돌이 됩니다. 교만과 비겁은 성도 개인의 신앙을 해칠 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의 성장에도 암적인 존재가 됩니다. 예수께서는 남을 섬기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고 그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 세운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각각 자신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겸손함으로 봉사하고 섬길 때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이 이렇게 겸손함으로 봉사하면 할수록 하나님께서는 그의 신앙을 성장하게 하시며 더욱 귀한 은혜와 은사를 부여해 주십니다. 이 봉사 활동에 근본적인 자세로서 예수께서는 바로 ‘섬김의 도’를 가르치시고 또 몸소 겸손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모두 씻기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요13:14-17)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성도 여러분 각자에게 주어진 “믿음의 분량”을 지켜 섬김의 봉사생활로 복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는 말씀대로 겸손히 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지켜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성도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더욱 더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3.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믿음의 분량에 따라 은혜를 나눠주셨다.” 고 했습니다. 사람이 어떤 재능이나 능력을 가졌든지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 재능이나 능력 등을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값없이 거저 베풀어주시기 때문에 그것들을 ‘은혜’ 또는 ‘은사’(恩賜)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은사가 하나님으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 ‘은사’를 ‘카리스마타’(charismata)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은사’, ‘카리스마’는 인간이 노력으로 얻을 수 없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값없이 거저 주시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슨 ‘은사’가 있든지 사람은 그것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용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분량”에 따라 각 사람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받은 바 ‘은사’, ‘달란트’가 많든 적든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주인을 위해, 주인의 뜻에 따라 사용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사용하지 않고 땅에 묻어두면 책망을 받게 됩니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 비유로써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주인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각 사람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또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다른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각각 맡기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곧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고 두 달란트 받은 사람도 두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돈을 묻어 두었습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주인님, 제게 다섯 달란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그에게 ‘잘하였다. 착하고 충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실하였으니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너는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여라.’ 고 했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사람도 와서 ‘주인님, 제게 두 달란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그에게도 ‘잘하였다. 착하고 충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실하였으니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너는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여라.’ 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와서 ‘주인님. 나는 주인님이 아무 수고도 하지 않고 남이 심고 뿌려 놓은 것을 거둬들이는 지독한 분이라고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두려워서 주인님의 돈을 땅 속에 묻어 두었다가 가져왔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돈이 여기 있습니다.’ 고 했습니다. 그때 주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네가 나를 그런 사람으로 알았느냐? 그렇다면 내 돈을 은행에 맡겼다가 내가 돌아왔을 때 이자와 원금을 함께 받도록 했어야 하지 않느냐? 그가 가진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아 넘치게 되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니라. 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곳에 내쫓아라. 거기서 통곡하며 이를 갈 것이니라. 내가 영광 중에 모든 천사들과 함께 와서 내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니라.’” 

한 달란트 맡은 자는 주인이 자신에게 한 달란트를 맡기신 뜻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냥 땅에 묻어 두었다가 결국 통곡하는 불행한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 달란트’, 아무리 작은 달란트일지라도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그 뜻에 따라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다섯 달란트 맡은 자와 두 달란트 맡은 자처럼,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께서 맡기신 뜻을 따라 행하므로 하나님과 함께 영광의 보좌에 앉는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4. 이제 하나님의 교회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믿음의 분량”에 따라 주어진 은사의 종류와 그 뜻을 보겠습니다. 

1) 6절에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언이라고 하면 흔히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언의 가장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말하는 것을 예언이라 하고, 사람의 뜻을 하나님께 말하는 것을 기도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자를 예언자라고 하고 사람의 뜻을 하나님께 말하는 자를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전하되 믿음의 분수대로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고 하면서 자기감정대로 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사람에 따라, 그리고 분위기에 따라 가감하지 말고, 또는 상대가 듣든지 아니 듣든지 개의치 말고, 하나님 말씀 그대로 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감하여 전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22:18-19을 보겠습니다.

(계22:18-19)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2) 다음으로, 7절에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즉 봉사의 은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섬기는 일, 봉사를 예언 다음으로 언급하는 것은 그만큼 봉사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사, 즉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에는 우열이 없습니다. 예언한다고 해서 우수하고 봉사라고 해서 열등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봉사’는 ‘섬김’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섬기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이 없이는 인류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만큼 섬김은 교회에 있어 중요한 은사입니다. 또한 봉사는 어디까지나 봉사로 끝나야 합니다. 남이 알아주기를 원하거나, 칭찬을 바라거나, 심지어 봉사의 대가를 받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봉사가 아닙니다. 봉사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남을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봉사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는 것이 아니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4:10-11을 보겠습니다.

(벧전4:10-11)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범사에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봉사하여 영광된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다음에 있는 은사는 “가르치는” 은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해져야 하는 것만 아니라, 깨달을 수 있도록 가르쳐져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에서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18-20)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르침, 교육이 없는 교회는 온전한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라는 말씀의 뜻은 그 가르치는 일에 열심과 충성을 다 하라는 말씀입니다. 교회에서 이 은사를 받으신 교사들은 가르치는 일에 열심과 충성을 다하여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4) 다음, “권위 하는 자면 권위 하는 일로” 즉, 권고하고 위로하는 은사가 있습니다. 권위하는 자는 무엇보다 그 마음이 따뜻해야 합니다. 그래서 권위 하는 자는 어디까지나 상대방에게 용기를 주고 위로가 되어야지, 책망하거나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권위하는 일을 주로 맡으신 권사님들에게 십자가의 뜨거운 사랑이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5) 다음,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해야 합니다. 구제의 직분을 맡은 자는 그 일을 “후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해야 합니다. 사람을 차별해서 구제하거나 자기 자신의 엉뚱한 목적을 가지고 구제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에게 유익을 끼쳐드리는 이외의 목적을 두지 말고, 모든 정성과 성실을 다 해야 할뿐입니다. 가진 자는 주되 풍성하고 후하게 베풀어 주어야 합니다.(고후8:2,고후9:13). 하나님은 즐거이 후하게 주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성실히 구제하는 생활로,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6) 다음,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교회 지도자는 교회 안에 뭐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가를 발견해서 잘못하는 자들을 바로잡고 넘어진 자들을 훈계하고 계도하여 교회를 순결하게 지키는 일에 있어서 정성을 다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7) 마지막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자비를 베푸는데서 즐거움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자비를 베푸는 일을 맡은 자들의 즐거운 표정이야말로 수혜자들에게 큰 위로와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즐거운 표정과 친절한 말씨로 신속하게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어려운 이웃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줄 때는 상대가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그리고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베풀어야 하나님께서 그 일을 기쁘게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교회 성도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인 성도 여러분에게 여러 가지 은사를 주신 목적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사람의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고 구원하시고자 하는 것이 우리,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지위와 처소를 거룩하게 지키며 믿음의 분량에 따라 겸손히 섬기고 봉사하는 삶으로 아름답고 복된 열매가 풍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더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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