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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도자의 여정 (행 8:2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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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자의 여정 (행 8:26-40)

요즘은 방송에서도 내시에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내시는 중국에서 환관이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황실 주변의 주요한 일들을 감당하는 자리였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조선시대에 유교 문화가 자리를 잡으면서 내시라는 직책이 생겨났습니다. 

내시는 권력의 지근거리(至近距離)에 있었습니다. 바깥세상을 전혀 모르는 왕의 눈과 귀가 되기도 했고, 말동무가 되기도 했습니다. 권력자의 측근에 누가 있는가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민주주의 시대에도 그런데 하물며 독재 시대에는 권력자의 측근에게 엄청난 영향력이 주어진 것이 당연했습니다. 유신시절 대통령 측근의 실력 행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우리는 잘 압니다. 

오늘 성경 본문의 내시 역시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측근입니다. 그는 영특했기 때문에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권력과 부를 모두 거머쥔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그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마음 한 구석에 채울 수 없는 공백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백이 있습니다. 그 공백은 영혼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남성은 여성을, 여성은 남성을 사모합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도 이성을 사모합니다. 목이 마르면 물을 찾고, 배가 고프면 음식을 구합니다. 사모하는 마음에 대응하는 것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유한한 인생, 짧은 순간을 살면서 영원을 사모함이 우리에게 불치의 종교심 되어 이것이 채워지지 않는 한 인생은 만족하지 못합니다. 

저는 얼마 전 ‘부유한 노예’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사람들은 부유를 위해서 계속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그 부유가 주인이 되어 사람들을 노예로 삼습니다. 

예를 들면, 교통수단이 발달되지 않던 시절에는 걸어 다니는 것이 다였지만, 곧 자전거와 자동차가 발명되었습니다. 인류가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자 집집마다 자동차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자동차는 하루 종일 걸어야 할 거리를 단 한 시간 만에 달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많은 시간이 주어질 것 같지만, 실제로 자동차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바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컴퓨터도 마찬가지입니다. 컴퓨터가 없을 땐 한가로웠던 일상이 컴퓨터 때문에 복잡해지기도 합니다. 문명의 발달과 풍요는 때로 우리 삶을 칭칭 감아버리고 우리의 마음을 한없이 외롭고 가난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영혼이 채워지기 전까지는 허기진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이 에디오피아의 내시는 영혼의 갈망을 신앙 속에 찾기로 합니다. 그에게 누가 전해주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는 순례의 길을 떠났습니다. 구도의 길은 예루살렘이었습니다. 한 달을 갔는지 두 달을 갔는지 모릅니다. 적도의 열사의 사막을 뚫고 광야를 지나 이방인들과 온갖 풍토병, 맹수와 독충의 장애물을 뚫고 예루살렘으로 갔을 것입니다. 그는 살아계신 영원한 그분을 만날 열망으로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곳에서 성경책 한 권을 삽니다. 

우리는 성경을 쉽게 구할 수 있지만 그 시대에는 성경을 구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손으로 하나하나 써내려간 성경은 참으로 그 값이 비싸서 웬만한 사람은 평생 만져보지도 못했을 정도라 했습니다. 그는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습니다. 그의 허기진 마음과 구도자로서의 열심은 그가 병거를 타고 성경을 읽는 장면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즘처럼 매끄럽고 좋은 길에서도 책을 읽으려면 가슴이 울렁거리고 눈이 아픈데 덜컹거리는 그 마차 위에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고역이었을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태국에 가서 복음을 전했을 때, 영국 BBC 방송 촬영 기사로 일하는 분이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후에 그 분이 한국을 찾아온 일이 있어서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는 시력이 안 좋아서 많은 글을 읽으면 다음 날 머리가 빠개질 듯 아파도 성경을 놓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허기진 그의 마음이 성경을 읽게 만든 것입니다. 아마 이 내시의 마음도 그러하지 않았나 상상해 봅니다. 덜컹거리는 병거 위에서 성경을 보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찾는 마음을 우리 하나님은 외면하시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때 그가 죽는 것을 마땅히 여겼던 젊은 청년 사울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잘 죽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의 순교로 기독교가 사라질 것이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로 사도들 외에는 예루살렘에서 모두 흩어집니다. 사도행전 8장 4절을 보면 흩어진 사람 가운데 집사 빌립이 사마리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를 전할 때에 사마리아의 많은 사람들이 주께 돌아오면서, 그가 기뻐하고 감사 감격합니다. 다음에는 사마리아의 부흥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사도들이 그곳을 찾아 부흥 현장을 친히 주관하고 그들에게 더 큰 한 단계의 양육을 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에서 복음이 힘차게 증거 되고 있을 그 때였습니다. 주께서 빌립에게 남으로 향해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빌립은 왜 가야합니까 라고 묻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거기에 기다리고 있는지 묻지 않습니다. 주께서 가라시니 그는 순종해서 나아갑니다. 

빌립은 한 사람이 병거 위에 앉아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가 읽는 것은 이사야서였습니다. 이사야 53장, 고난당하는 메시아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읽는 것을 깨닫고 읽느냐 묻습니다. 그 때 내시는 가르쳐주는 스승이 없는데 어찌 알 수 있겠냐고 대답했습니다. 

지혜 있는 사람의 특징은 자기가 모르는 것에 대한 솔직함으로 그의 지혜가 자란다는 것입니다. 반면 인생이 자라지 못하는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자기가 모든 것을 안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지혜는 지혜 없음에서 시작하고 지혜 없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할 때, 참된 지혜를 사모함이 생기고 지혜를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내시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가르치는 이가 없으니 어찌 알 수 있겠느냐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 병거에 가까이 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읽는 성경 본문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묻습니다.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행 8:32-33) 

한 사람이 억울하게 죽음의 길로 끌려가는 그 모습, ‘누구의 모습입니까? 이사야 본인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의 얘기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요즘 현대 신학자들 가운데는 이 이사야 53장이 이사야 본인의 이야기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굉장히 학문적 논리의 결과라 생각합니다. 오늘 날의 도올 김용옥씨와 비슷합니다. 사실 이미 여기에 관한 논쟁은 꾸준히 있어 왔습니다. 

이 말씀의 주인공은 바로 예수입니다. 이사야 53장에서는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날 데가 없어서 외양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가 자랐던 곳은 사람들이 멸시했던 나사렛이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일어날 수 있냐고 사람들이 조롱하는 장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기적을 행할 적에 사람들은 구름처럼 몰렸지만 그가 진리를 말하고 십자가 구속의 역사를 가르칠 때에는 뿔뿔이 흩어져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메시아가 죽을 수 있느냐 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을 때 사람들은 죽을 사람이 마땅히 죽는다 생각했지만 여호와의 죽음은 실로 우리 무리의 죄악을 담당시킨 죽음이었습니다. 

빌립은 이사야 53장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가 악인들과 함께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묘실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라는 부자의 묘실에 묻혔습니다. 이사야 53장에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의 죽음은 우리 무리의 죄악을 담당한 죽음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인하여 죽으셨음을 성경대로 믿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옮겨 주십니다. 구세주 되시는 그 분이 새 인생을 시작해 주십니다. 그 분은 구세주일 뿐 아니라 주님 되셔서 그 인생을 살게 해 주십니다. 그는 복음제시를 끝냈습니다. 그랬더니 이 내시가 말합니다. “여기 흘러가는 물이 바로 가까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 받는 데 장애될 것이 있습니까?” 빌립은 그를 데리고 세례를 베풉니다. 얼마 후 빌립은 사라졌다 말합니다. 과연 그가 어떤 모습으로 사라졌는지 모릅니다. 내시는 혼연히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의 곁에 가르친 빌립 없었지만 빌립이 증거한 그 예수님이 그의 곁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새로운 인생으로 자기 나라에 돌아갔습니다. 사람들에게는 갈급함이 있습니다. 마음에 채울 수 없는 공백이 있습니다.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기 때문에, 그 분 외에는  인생을 새롭게 할 수가 없고, 죄를 씻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이 필요합니다. 

인생보다 더 무거운 짐은 없다고 석가모니는 말했습니다. 그 말은 진리입니다. 그런데 석가모니에게는 대책이 없었습니다. 누구든지 수고하며 무거운 인생의 짐을 지고 갑니다. 그 인생을 향해 주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영혼이 그분을 만나고 싶어합니다. 주께서 사마리아의 빌립에게 가사 지방의 광야로 가라 명령하셨고, 그가 순종하며 나아가 내시를 만났습니다. 대단한 권력을 지닌 내시의 곁에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나아가 그의 마음을 열고 주를 영접하게 했습니다. 

저는 43년 전, 7월 24일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제가 그 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음악홀이라는 것이 없어서 음악을 들으려면 가끔 이화여대 강당에서 열리는 연주회에 가거나, 돌체 다방이나 르네상스라는 다방에 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요즘처럼 많은 강좌와 세미나도 없던 때라 YMCA나 태극당 앞 작은 홀에서 열리는 강좌가 있으면 찾아가 듣곤 했습니다. 함석헌 선생이나 류영모 선생의 강좌를 가끔 들었고, 김준곤 목사님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어느날 CCC 강좌에서 한 친구가 제게 경치 좋은 곳에 한 번 가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가보니 그것이 1965년 CCC 여름 수양회 였습니다. 도착하자마자 다른 사람들은 텐트를 치고 있는데 한 쪽에서 배구를 하길래 저도 배구를 한다고 뛰다가 발가락이 찢어졌습니다. 그것이 급성 화농으로 번져 3일간 끙끙 앓기만 했습니다. 세미나에도 강좌에도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3일째 되니까 임경일이라는 세브란스 의과대학 생이 수술을 해 주었습니다. 제 구원의 역사에 끼어든 사람이기 때문에 그 이름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그 때까지 믿음이 없던 저는 한 모임에 참석해 훼방만 잔뜩 놓고 나오기도 했습니다. 약을 바르기 위해 본부석에 앉아 있는데 산꼭대기에서 두 자매가 쏜살같이 달려 내려왔습니다. 내려와서는 아무개가 예수 믿게 되었다고,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천사처럼 빛나는 얼굴로 외쳐댔습니다. 저는 세상에 저런 감동과 기쁨이 있다는 것에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조용히 그리스도인들의 감격을 보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지금껏 살아오며 저런 기쁨을 누려보지 못했습니다. 제게 이론과 생각은 있었지만, 풍요와 감동이 없었습니다. 내 머리를 바보로 만들어도 좋으니 이것이 당신이 주실 것이라면 지금 제게 주시옵소서.’ 오후 3시쯤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밤중까지 혼자 울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저를 만나 주셨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그 풍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그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 때부터 인생을 놀라운 감격과 감동으로, 벅찬 가슴으로 사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모든 것을 가진 풍요가 제 안에 있습니다. 어둔 인생길을 걸어가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하면 빛으로 새 길을 가게 해 주십니다. 다음 행보를 뗄 수 없을 때에, 그 말씀이 내 발을 움직이도록 해 주십니다. 

어떤 때는 새벽에 너무 불안해서 잠을 깹니다. 그리고 잠을 잘 수 없습니다. 그러면 베개를 껴안고 의자에 앉습니다. 기도조차 할 수 없을 때 그대로 하나님의 품을 상상하면서 눈을 감고 묵상하고 있으면, 내 마음 속 무서운 근심과 걱정은 눈 녹 듯 사라지고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온 세상에 나를 나보다 더 사랑하시는 그 분의 눈동자 앞에 세워 주십니다. 그 때 이 세상에 나 혼자밖에 없는 것처럼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품 안을 느끼고 다시 감동하고 다시 기뻐하며 일어나는 삶을 삽니다. 

제게 그렇게 역사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저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하용조 목사와 김지철 목사와 나누게 하셨고, 그 변화에 감동했습니다. 주변의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그 감격은 곧 식는다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제가 1975년에 남서울교회를 개척했습니다. 학생들은 이론만 맞으면 바뀌지만, 처자식이 있고 직장 생활하는 사람에게는 저와 같은 감격과 기쁨은 있을 수 없다고 주변이 하도 말을 해서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하지만 남서울교회 개척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복음을 전할 때에 제게 역사하셨던 그 주님이 똑같이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발견하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없는 사람은 그가 무엇을 가졌든지 간에 그 마음은 텅 비어 있습니다. 채울 수 없는 갈망이 있습니다. 채워지지 않으니 더 많이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목이 마르다고 바닷물을 마시면 더욱 목이 갈해지는 법입니다. 바닷물로 갈증은 채워지지 않는 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이 모든 것의 모든 것 되십니다. 성 어거스틴은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평안과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사람의 마음에는 진공이 있는데 누구도 그것을 채워주지 않는다 고백했습니다. 주께서 여러분들에게 영혼의 갈증으로 고통당하는 주변을 찾아가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혼자 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언젠가 내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떠나 혼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때에도 그리스도는 우리 곁에 계시고, 그 분이 나의 모든 것 되십니다. 그 때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이시고 힘이십니다. 그 분만이 우리를 만족시켜 주십니다. 

빌립은 떠났지만 빌립이 전한 예수는 에디오피아에 남아, 아프리카가 그처럼 어두울 때도 에디오피아는 유일하게 찬란하게 복음의 빛을 남기는 국가로 2000여 년 동안 역사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께서 오늘 우리에게 엄청난 도전 주셨습니다. 주께서 주신 이 기회를 잘 준비해서 아름다운 열매 맺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빌립처럼 만드셔서 우리가 순종함으로 갈급한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구도자의 삶을 살게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홍정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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