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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양의 문이라 (요 1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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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양의 문이라 (요 10:1-1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1-2)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3)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4-5)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6)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7-9)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10:1-10)

10장의 말씀은 9장에 있었던 사건의 결과로써 하신 교훈입니다. 1절에 ‘진실로 진실로’란 귀절로 시작되는데 이 말은 대개 앞선 이야기를 부연 설명할 때 나타납니다. 바로 앞서서 맹인이 눈을 뜬 사건의 결과로써 하신 말씀입니다. 

본문은 전체적으로 양과 목자의 비유로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개념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양의 문이고, 둘째는 양의 목자입니다. 선한 목자와 절도 강도, 예수께 속한 양과 다른 목자에 속한 양, 문으로 들어오는 목자와 담 넘어 들어오는 자, 선한 목자의 목적과 도적의 목적 등이 중요한 내용입니다. 왜 이런 비유를 하셨을까요? 눈을 뜬 맹인이 참 목자이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믿게 되었는데, 오히려 예수를 배척하는 유대인들에게 주신 교훈입니다. 참 목자를 알고 따르는 것이 인생들에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


문으로 들어가는 자와 담 넘어 들어가는 자

첫 번째 비유는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 온 자와 담 넘어 들어 온 자의 비교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1-2) 본문의 핵심은 지도자의 정당성 여부입니다. 정당한 경로를 통해서 온 목자와 부당하게 나타난 지도자를 비유한 것입니다.  
  
당시에 양을 치는 사람들은 공동으로 양의 우리를 만들고 밤이 되면 각 사람의 양들을 한 우리에 몰아넣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문지기를 세워 밤새도록 지키게 했습니다. 이런 양의 우리는 대개 동굴이나, 나무나 돌로 높은 울타리를 쳐서 만들었습니다. 대개 문은 하나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우리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문지기가 지키는 문을 통과 해야만 합니다. 만일 양 우리에 문을 통과하지 않고 넘나드는 사람이 있다면 틀림없이 도둑놈입니다.
  
그러면 이 비유가 가리키는 바가 무엇일까요?  양의 우리는 유대 사회입니다. 문지기는 하나님이십니다. 문으로 들어오는 목자는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입니다. 반대로 울타리를 넘어 들어오는 자들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같은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누가 지도자로 세운 적도 없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자기를 스스로 지도자 위치를 차지했을 뿐입니다. 정당성이 없는 지도자일수록백성들을 부당하게 탄압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해서 신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마23:1-7)
  
그러나 실상 거짓 지도자들의 문제는 지도자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양들에게 있습니다. 거짓 지도자들이 많든지 적든지 속지 않고 따르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양들이 속고, 약탈당하니까 문제입니다. 우리는 현명한 양들이 되어야만합니다. 정당하게 오신 예수님과 담 넘어 들어온 거짓 종교인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자의 후손이시며(창3:15), 아브라함과 다윗의 계보이시며(창12:3,삼하7:), 유월절 양이시며(출12:), 속죄 제물이시며(레), 성전이시며(히),장대 위에 달린 놋뱀이시며(민), 처녀에게서 나셨으며(사7:14),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며(요1:), 목자들과 동방 박사들과 안나가 증거했으며, 세례 요한과 제자들의 입으로 증거를 받으신 메시야십니다. 이 예수님과 거짓 목자를 구별치 못한다면 양은 목숨을 지킬 수 없습니다.
  
거짓 목자의 문제는 오늘의 교회 지도자들에게도 적용됩니다. 하나님이 정당히 보내신 목자들인지 아니면 자기 스스로 주님의 목장에 담 넘어 들어 와서, 양들 위에 군림하는 절도나 강도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참 목자와 거짓 목자를 구별할 줄 아는 눈이 있다면 여러분은 평생토록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의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 눈이 어두워 담 넘어 온 자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구별치 못한다면 평생 거짓 목자의 채찍 아래서 영적으로 신음할 것입니다.


양과 목자의 관계

두 번째 비유는 양과 목자와의 관계입니다. 양과 목자,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3-5)  
  
첫째로, 양들이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분별할 만 한 관계입니다. H. V. Morton이라는 분이 자신의 체험담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어느 날 이른 아침 나는 베들레헴 근처에서 매우 신기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목자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양떼들과 함께 동굴에서 밤을 새운 게 틀림없었습니다. 양들은 모두 섞여 있었고 목자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갈 시간이 됐습니다. 둘 중의 한 목자가 양 무리로부터 얼마쯤 떨어진 곳에 서서 양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첫째, 둘째, 셋째, 이름을 부르니까 댓 마리의 양이 그들 향해 달려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자기의 양들을 다 불러냈습니다.” 

George Adam Smith란 사람도 서너 명의 목자가 이런 방식으로 양들을 구별해 내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목자가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고 있습니다. 양떼들은 서로 섞여 있다가도 자기 목자가 부르면 그 음성을 알아듣고 나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신자들에게 많은 것을 깨우쳐 줍니다.  
  
오늘 말씀에 보니까 목자는 양 한 마리 한 마리의 이름을 불러냅니다. 이것은 목자와 양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 내셨고, 양들은 각자 예수님을 마음 중심에서 모시고 교통하기 때문에 피차 모르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 생각하면, 예수님을 모르고도 단체로 천국에 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라도 예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맺지 않고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들의 옷자락을 잡고 천국의 일원이 되려는 생각은 당장에 버려야만 합니다. 부모형제가 교회 장로 권사라고 덩달아 천국 가는 일은 없습니다. 혹시 천국문을 지키는 천사들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실수로 천국에 들여보내는 일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과 개별적인 교제 관계가 없는 사람은 절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각 사람이 예수님을 ‘나의 목자’로 받아 들여야 됩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 서로 알고 대화 할 수 있는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각자 내가 속한 교회의 목자와도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야만 합니다. 요즘은 상업주의 물량주의의 흐름에 따라서 교회도 대형화의 추세를 밟고 있습니다. 담임목사와 교인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가 전혀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성도 사이의 횡적인 유대관계도 없고, 목자와 양 사이의 유대관계도 없는 교인이 존재한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런 일이 천국에서도 있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성도를 모르고 성도가 예수님을 모르는 경우가 있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천국에서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목사는 ‘설교꾼’이 아닙니다. 교인들 역시 설교의 ‘청취꾼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목자마다 목회 철학이 있고, 인생관이 있고, 가치관이 있습니다. 양들을 돌아보는 방식이 있습니다. 

내 교회의 목자가 어떤 사상과 어떤 목회관을 가지고 목회를 하는지 알고 따르면 복입니다. 예수님의 위대한 설교와 좋은 훈련을 다 받고도 배반자가 돼버린 가룟 유다가 있습니다. 그는 단 한 번도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설교자와 청취자의 관계에 있었을 뿐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위치에 계십니까? 먼저 예수님과 일대 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고 그 음성을 다른 사상가들의 음성과 구별해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속한 목자와 이름을 주고받는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고 그 음성을 분별하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지상에서 양이 누리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둘째로, 목자는 앞서 가고 양은 뒤따라오는 관계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가면 수만 마리의 양떼들을 개를 동원하여 뒤에서 몰고 가는 목동들이 보입니다. 그러나 팔레스틴의 목자들은 그렇게 많은 양들도 없거니와, 양떼를 뒤에서 몰고 다니지도 않습니다. 양들의 이름을 외울 만큼의 양들을 내어 놓고 목자가 앞서 가면 양들이 뒤따라갑니다. 목자가 양떼들의 길을 안내하는 주도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양이 가는대로 따라가지 않고 목자가 원하는 곳으로 인도해 갑니다.  
  
요즘은 전반적으로 목자보다는 양이 앞서갑니다. 간혹 잘 나가는 교회가 있어서 보면 개가 양 몰 듯이 몰아가는 교회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모든 것이 알려지고 공개되어 있습니다. 목사의 설교, 목회 방식, 교회 형편 등등. 교인들은 얼마든지 자기가 좋아하는 교회를 선택할 기회가 있습니다. 상업주의, 소비자 중심 사회에 익숙해진 교인들은 교회도 얼마든지 쇼핑할 수 있습니다. 설교도 쇼핑하고, 교회도 쇼핑합니다. 좋으면 택하고 싫으면 떠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교인들은 아주 똑똑합니다. 목자보다 잘난 양들이 많아요. 사실대로 말한다면 목회자는 전반적으로 좀 모자라는 사람들입니다. 저나 제 동역자들이나 다 모자랍니다. 두뇌도 모자라고, 지식도 모자라고, 인품도 모자라고, 능력도 모자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될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자라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진리를 믿는다면 모자라는 목회자에게 순종하며 따를 수 있겠지요? 하나님은 얼마든지 모자라고 부족한 지도자를 통해서, 모자라는 방벙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문제는 양의 똑똑함이 아닙니다. 양이 아무리 똑똑하다고 양을 목자 위에 세우시지는 않습니다. 교회의 원리를 바로 알고 섬기시기 바랍니다. 앞서가는 목자를 따라가는 교회, 그것이 양들의 축복입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

본문의 세 번째 비유는 주님 자신이 양의 문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아마 주님의 말씀을 들은 무리들이 문의 개념에 대해서 잘 알아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6) 

그래서 주님은 ‘진실로 진실로’의 말씀으로 다시 설명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7-9) 

앞서서 주님은 자기를 양 우리에 문으로 들어온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주님은 자기 자신이 곧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예가 많지요? 주님은 진리로 인도하시는 분이시요 동시에 진리 자체십니다. 주님은 생수를 주시는 분이시요 동시에 생수 자체시고, 영생 양식을 주시는 분이시며 동시에 생명의 떡 자체십니다. 예수님은 정문으로 양 우리에 들어오신 유일하신 분이시며, 동시에 양의 문이십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양의 문이라 하신 것은 교리적으로 몇 가지 중요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문의 위치입니다. 예수님이 어디로 통하는 문인가 하면 바로 하늘로 통하는 문이십니다. 주님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종말적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주님을 통해서이고, 현재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도 주님을 통해서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보물섬’이나 ‘십오 소년 표류기’, ‘톰 소여의 모험’, ‘헉클베리핀’ 같은 모험 소설을 즐겨 읽었습니다. 내 형편이 그랬습니다. 형제자매도 없고 가족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항상 freelancer였습니다. 그런 책을 읽고 나면 항상 망상에 빠집니다. 나도 뗏목을 타고 강을 내려가다가 어느 동굴에 들어가서 살면 어떨까? 거기에 혹시 실버 선장이 감춰둔 보물 상자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보물 상자가 있는 동굴로 가는 길을 어디일까? 

천국이 그렇습니다. 그 천국에는 자유가 있고, 온갖 보화가 가득합니다. 생명, 건강, 먹고 입고 거하는 아름다운 거처, 가장 멋진 경치, 영원한 평화, 사랑, 신뢰,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보화들이 가득합니다. 그러면 그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천국으로 통하는 문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하나님은 에덴으로 들어가는 문을 폐쇄하셨습니다. 천사들을 세워서 사람이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창3:24) 하나님은 인간과 단절하셨습니다. 그 막혔던 천국의 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인들에게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게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4) 

야곱은 밧단아람으로 가는 도중에 빈들에서 돌을 베개 삼아 잠을 잤습니다. 그는 꿈에 하늘 문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와 같이 죄악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연결하는 하늘의 문이요, 축복의 문이십니다.

둘째로, 문의 유일성입니다. 9절 말씀 중에 ‘나로 말미암아’라는 귀절이 있습니다. Murray나 Bultmann같은 신학자들은 이 귀절은 예수의 문으로서의 ‘독점성’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예수 이외에 이 세상에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또 다른 문이 있는가? 없습니다. 예수는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의 문입니다. 물론 자칭 사람들이 만들어 낸 길은 많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신 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로 들어가는 바른 길은 하나밖에 없는데 바리새인들은 이를 이용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 소위 ‘선한 사람들’이라고 불려지는 사람들이 많다. 선한 남자, 선한 여자, 정직한자, 율법의 준수자, 부모를 공경하는 자, 간음치 않고 도적질 않고 거짓 증거 하지 않는 자,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조항들을 준수하는 자 등등. 그렇다고 해도 이들은 결코 그리스도인은 아니요, 이방인이라 할 수밖에 없다. 정당하게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데, 소위 말하는 선행이 그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으며, 자랑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의로움을 내세워서 하나님이 열어 주신 문을 거절하고 각자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께 가겠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하나님께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문이 있는데도 그리로 들어가지 않고 굳이 다른 문을 찾아 헤매는 것이 바로 부패한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지금도 자기의 힘으로 하나님께 가겠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능력 있으시면 그렇게 하세요.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기는커녕 하나님의 ‘하’字도 모르고 주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을 스스로 찾는다거나 혹은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시14:1)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 나라는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문을 통하여 당당하게 드나드시기 바랍니다.


도적이 오는 목적과 주님이 오시는 목적

본문의 네 번째 비유는 주님의 목적과 도둑의 목적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
  
첫째로, 도적이 오는 목적입니다. 도적은 양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킵니다.(10) 도적은 양을 정당하게 소유하지 않고 훔칩니다. 그리고 죽입니다. 본문에 죽인다는 말은 단순히 죽인다(kill)는 의미가 아니라, 양식을 삼기 위해서 희생시키는(to sacrifice, or to kill for food) 것을 의미합니다. 도적에게는 양을 위한 목적이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오직 자기들의 이익을 챙길 뿐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양떼를 멸망시키고 맙니다. 

8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 앞서서 온 자들은 다 절도요 강도라고 했습니다. 원문상에 보면 'they were'라고 하지 않고 ‘they are’라고 했습니다.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입니다. 예수님 이전에 왔던 지도자들이 절도요 강도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종교 지도자들이 바로 절도요 강도라는 말씀입니다. 

즉,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성전을 이용하여 재산을 모으고 로마 정권과 적당히 결탁해서 백성들을 수탈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양들의 형편은 전혀 생각지 않고 지킬 수도 없는 법을 만들어 백성들 위에 덮어 씌웠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높은 자리에 앉아서 명령만 내렸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회칠한 무덤이요, 천국 문을 가로 막고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고 남들도 지옥 자식으로 만드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마23장) 이들은 다 참 목자 예수에 앞서서 불법으로 우리에 넘어 들어온 강도들입니다.
  
둘째로, 주님이 오신 목적입니다. 주님이 오신 목적은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 목적은 생명 구원입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9)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 

저는 10절의 말씀을 읽을 적마다 감사의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그런데 그 생명은 겨우 숨 쉬고 연명하는 정도의 생명이 아니라 갈수록 더 풍성해지는 생명입니다. 살아 있다고 다 생명은 아닙니다.  병상에서 인공호흡기로 연명한다면 살아 있으나마나 입니다. 힘차게 일하고 뛰는 생명력, 죄를 이기고, 악의 영들을 이기고,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힘차게 뛰는 생명력, 바로 그런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주님은 오셨습니다.

둘째 목적은 꼴을 먹이시는 일입니다.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9) 

우리는 주님을 통해서 무한한 꼴을 얻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습니다. ‘꼴’이란 말은 단순한 육의 양식만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더 크고 중요한 꼴, 우리에게 날마다 주시는 영의 양식,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는 영혼을 구하지 못하는 인간의 사상과 지식들이 많습니다. 썩는 양식입니다.(6장)  

그러나 예수님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살립니다. 평강과 기쁨! 육신을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심은 물론, 영혼에게 필요한 ‘쉴만한 물가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십니다.(시23:1) 

셋째 목적은 자유입니다. 주님은 진정한 자유를 주시고자 오셨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9절에 있는 ‘들어가며 나오며’라는 말에 상당한 관심을 가집니다. 이 말의 뜻은 단순한 왕래라기보다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크나큰 자유를 의미합니다. 먹고 입는 것만 풍족하다고 축복은 아닙니다. 종으로서 있는 한 행복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를 주시고자 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오가면서 축복을 누립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과, 꼴과, 자유를 마음껏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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