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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창 43: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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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창 43:1-15)

기근이 계속되자 가져온 양식이 모두 바닥이 났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애굽에 가서 양식을 사오라고 말합니다. (2절) 곡식이 10자루가 있을 때에는 그래도 한동안 걱정이 없겠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양식처럼 쉽게 바닥나는 게 없는 건가 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물과 양식이 많을 때에는 세상에 걱정할 일이 없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거예요. 세상 재물의 특징은 유한성입니다. 한계있는 양식, 한계있는 세상 재물입니다.

눅 12장 19절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어느 부자가 내가 창고에 가득 쌓아 놓았으니 내영혼아 내속에서 편히 쉬라고 말했던 부자처럼 우리도 우리가 쌓아둔 세상 재물만 믿고 살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많이 쌓아두어도 재물은 믿을 게 못됩니다. 그야말로 날개를 내어 다 날아가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잠 23:5) 

여러분이 오늘 재물을 많이 갖고 있다고 해도 믿지 마십시오. 야곱에게 많이 있던 양식이 어느덧 바닥이 난 것처럼 세상 것은 다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야곱은 양식을 조금(me‘at, 메아트) 사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적은 양만 사라는 뜻입니다. 이런 말을 한데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이 기근이 그렇게 오래 가겠느냐는 생각인데 이 견해는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43장 1절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 기근이 너무 심해서 이 기근이 금방 끝날 것 같지 않아보였습니다. 극심한 가뭄속에서 비올 징조도 없는데, 철저한 야곱의 성격상 70명 가족의 목숨을 걸고 양식을 조금만 사라는 모험을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 견해는 야곱에게 돈이 별로 남아있지 않아서 조금만 사라고 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나올 때엔 갑부였습니다. 그런데 재산의 대부분이 양, 염소 약대 등 짐승이었습니다. 주된 수입원이 목축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뭄이 들었으니 들에 짐승 먹을 풀이나 제대로 있었겠습니까? 그렇다고 사람 먹을 양식도 없는데 곡식을 그 많은 짐승 먹이로 줄 수가 있었겠습니까? 

보나마나 7년 가뭄동안 짐승의 대부분이 먹지못해 빼빼 말라가다가 상당수가 죽었을 것입니다. 이 가뭄이 야곱의 재산을 모두 앗아갔습니다. 곡식을 무한정 살만한 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곡식을 조금만 사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발견합니다. 재산의 감소는 하나님의 계획(창46:2-4)을 이루는 과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재산이 많고 풍족했다면 굳이 애굽까지 이주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 이주시켜 거기서 살도록 하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 15:13-14)

그래서 야곱에게 더 이상 가나안 땅에 미련이 없도록 큰 기근을 주셨고 소유를 크게 감소시켰던 것입니다. 실제로 나중에 야곱이 바로왕에게 가서도 하는 말이 가나안에 기근이 심해서 왔다고 말합니다.(창 47장 4절)

"그들이 또 바로에게 고하되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여 종들의 떼를 칠 곳이 없기로 종들이 이곳에 우거하러 왔사오니 청컨대 종들로 고센 땅에 거하게 하소서" 

여러분, 하나님도 가끔 우리에게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랑하고 이 땅의 것에 집착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하는 세상 것을 기근으로 치시고 IMF로 치시고 불로 태우셔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눈을 돌려 하늘나라를 바라보게 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땅의 것이 없어질 때, 이때가 하나님을 더 많이 바라보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신호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야곱의 4째 아들 아들 유다가 말합니다.(3-5절)

"아버지 우리가 가도 양식을 사기는커녕 시므온도 무사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베냐민을 데리고 와야 믿어준다고 그랬는데 안데리고 가면 우리 모두가 스파이로 몰려 최소한 사망일 겁니다." 하지만 야곱은 베냐민만은 안 보내려고 합니다. 

* 중병에 걸리거나 엄청난 아픔을 당한 사람의 반응 4단계 

1. 부정(의사의 오진일거야. 아냐 이건 꿈일꺼야! 이럴 수가 없어!) 

2. 원망과 책임 전가("남편이 내속을 너무 썩여서 암에 걸린거야, 몇 년 전에 내가 아프다고 할 때 날 병원에 데리고 갔으면 이렇게 말기가 되지는 않았을 텐데, 저 무심한 아들, 며느리가 나에게 무관심해서 병을 키웠어 다 저놈들 때문이야!") 

3. 타협(암이라는 것은 일단 인정하되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까 노력합니다. 그래서 좋다는 약, 풀뿌리 다 먹어봅니다. 용하다는 병원 다 가봅니다.) 

4. 체념 또는 수용(그래도 안되면 이제 체념을 하고 받아들입니다.) 


야곱도 그랬습니다. 

1. 부정(42:38에서 르우벤이 한말을 부정하면서 르우벤의 요청을 절대 안된다고 못박습니다.) 베냐민은 절대 못 보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돼! 

"야곱이 가로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 행하는 길에서 재난이 그 몸에 미치면 너희가 나의 흰 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42:38) 

따라해 봅시다. "지조는 덕이지만 고집은 덕이 아니다" 

후회하지 않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결정을 내리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뿐이십니다. 사실 사온 양식을 다 먹기까지 베냐민을 안보내고 버틴 것을 베냐민 입장에서 보면 고맙지만 시므온 입장에서 보면 뭡니까? 

전체를 위해 자식이 볼모로 잡혀있는데 구해줄 생각은 안합니다. 너는 고생을 하건 말건 우린 먹을게 있으니까(다 먹을 동안 몇 개월 동안) 그냥 있겠다는 겁니다. 

이제 먹을 게 떨어졌는데도 굳이 베냐민을 안보내려고 합니다. 이 지나친 편애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야곱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것이 편애로 일그러진 가장의 모습이 아닙니까? 여러분 가정에도 이런 편애가 있지는 않습니까? 


2. 원망(43:6) 

본문에서 야곱은 아들들을 원망합니다. 

"야 너희들이 아우가 있다는 말을 안했으면 될텐데 왜 쓸데없이 그런 방정맞은 소리를 해가지고 이런 문제를 일으키느냐" 

그러자 유다가 답변을 합니다. 7절 하반절 "그가 너희 아우를 데리고 내려오라 할 줄을 우리가 어찌 알았으리이까?" 

이렇게 무슨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면 가정이나 일터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힘을 모으기보다는 서로 네탓이라고 정죄하기에 바쁜 경우가 많습니다. 

본문에서의 야곱처럼 결과론적 추궁이 다른 사람들을 억울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어떤 경우는 앞일이 뻔한데도 주책없이 말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좀 더 신중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떨 땐 그런 결과가 상식적으로는 예상되지 않을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 결과만 놓고 야단을 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오히려 자식을 억울하게 하고 노엽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실 본문에서 "동생이 있다는 말을 왜 했느냐"고 야단을 쳐봐야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미 끝난 일인데 이제 말해봐야 어쩌자는 겁니까? 다시 가서 "우리가 동생이 없는데 착각하고 잘못 말한거다" 그래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잘 압니다. 형들이 동생 얘기를 안했어도 애굽의 총리가 알고 있었을까요 모를까요? 너무 잘 알고 있지요. 그러므로 6절에서 야곱의 책망은 그야말로 쓸데없는 원망과 책임전가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이나 직장에서 무슨 문제가 생기면 늘 다른 사람을 원망하면서 책임을 전가하는 이 못된 습관이 우리에게도 있지 않습니까? 

아담이 하와에게, 하와가 뱀에게 책임을 전가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책임져야할 난처한 문제를 다른 사람의 탓이라고 서로 손가락질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전장 37절에서 르우벤은 유다처럼 설득을 잘 하지 못했습니다. 한다는 말이 "베냐민을 못데리고 오면 내 두 아들을 죽이십시오!" 그러나 할아버지가 어떻게 손주들을 죽이겠습니까? 이 말이야말로 현실성이 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아버지를 지혜롭게 설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4절 "아버지께서 우리 아우를 우리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내려가서 아버지를 위하여 양식을 사려니와 이 양식을 사는 건 우리만 좋자는게 아니지 않습니까?" 

아버지를 위하여 사는 것이기도 한데 왜 베냐민 보내기를 허락 안하십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말이 상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당신을 위한 일이라는 점을 충분히 이해시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 8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유다가 아비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것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베냐민을 안보내시면 우리가 다 죽습니다. 아버지도, 아버지의 어린 손주들도, 그리고 그렇게 아끼시는 베냐민도 굶어 죽을텐데 어찌 한사람 때문에 우리 모두를 굶겨 죽이시려하십니까? 

우리가 하는 말이 먹혀들지 않을 때에 그 두 번째 이유는 이 일이 우리 공동체 전부를 위한 일이라는 것을 납득시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8절 "유다가 아비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특히 결정권이 아버지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강제로 무엇인가를 강요하면 반발심이 있기 마련이다. 스스로 한 것을 더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9절에서는 무어라고 말합니까? 

"내가 그의 몸을 담보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 그를 물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자기도 르우벤처럼 책임을 지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르우벤처럼 과격하게 나를 죽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9절의 의미는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못한다면 앞으로 아버지가 나를 축복하실 터인데 나나 내 후손이 아버지의 축복을 못받는 크나큰 손해를 감수하겠습니다는 뜻입니다. 유다는 온 가족을 살리기 위해 자신과 자기 후손의 미래를 걸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간단하게 유다가 간청하매 야곱이 고민하다가 보내었더라고 하면 그만인데 왜 이렇게 자세히 실었는가? 예수님이 유다 지파를 통해 오시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 것입니다. 나중에 49장에서 야곱이 죽기 전에 12아들에게 축복하면서 유다에게는 이런 축복을 합니다. 

49장 8절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찌라" 

49장 10절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여기서 홀은 다윗 왕권을 의미하고 실로는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야곱이 예수님의 선조가 되는 축복을 요셉이나 베냐민에게 주지 않고 유다에게 준 것에는 이렇게 논리적으로 설득을 하며 자기를 희생시키는 책임감을 보인데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44장 33절에서 논리적인 말로 요셉을 설득하고 베냐민을 보호하는 희생적인 태도로 요셉을 감동시킵니다. 

그래서 본문이나 44장에서 유다의 말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다는 보다 현실적으로 책임을 지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특히 다른 사람보다 야곱에게 이 말은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면서까지 축복을 가로챘을 정도로 축복에 대해 집착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축복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더 잘아는 야곱이었기에 이 말이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데 실패한 원인은 그 사람이 무엇을 중시하는가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득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이득을 설명해야하고, 명분과 의리가 중요한 사람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왜 이일을 해야 하는가를 설명해야하는데 우리는 대부분 우리 자신을 기준으로 말하기 때문에 안되는 겁니다. 

전도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익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예수 믿고 교회 다닐 때의 이익과 장점을 설명해야하지만 의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말하면 인간취급 못 받습니다. 

"내가 그 알량한 이득 때문에 교회 나갈 사람으로 보이냐?" 

그런 사람에게는 "야 내가 이렇게 사정하는데 의리상 한번 나와줘야 하는 거 아냐?" 그래야 통합니다. 더 나아가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한 크리스챤을 예로 들면서 "우리가 지금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하지 않겠느냐"하면서 교회 나가자고 해야하는 것입니다. 

10절 "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더면 벌써 두번 갔다 왔으리이다" 

필요없이 시간을 소모하고 있었기에 인제 더 지체할 시간이 없어졌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우물쭈물 하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우유부단해서 우물쭈물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우리의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어야 합니다. 


3. 타협(43:11) 

그러자 야곱이 유다의 말에 설득이 되어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11절

여기서 비자는 팔레스틴에 널리 자생하고 있었던 피스타키아 베라(Pistacia Vera)의 열매로서 이 열매의 기름은 당시 사람들이 즐기던 식용유였으며 이것으로 과자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 파단행은 아몬드 나무의 일종입니다. 

전에 얍복강 가에서 형 에서에게 선물을 보낸 것처럼 이번에도 애굽 총독에게 선물을 보냅니다. 최대한 예의를 갖춰 선처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어려운 형편이지만 예의를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12절) 그리고 전에 돌아온 돈을 다시 갖다 주라고 말합니다. 두 배를 가지고 가란 말은 두 배로 갚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43:21-22에 보면 원래 잘못 온 돈을 가져다 반납하고 이번 새로 곡식 살 돈까지 합해 지난번 보다 두 배로 가져가라는 말입니다. 야곱은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도 예의만 잃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정직도 잃지 않았습니다. 


4. 수용(43:14) 

그러나 야곱의 신앙 절정의 모습이 14절에 드러납니다. 

원래 야곱은 집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손해보고는 못사는 성격이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쌍둥이 형의 발 뒷꿈치를 잡고 태어났습니다. 장자가 되고 싶은 집착이 평생을 갑니다. 그래서 장자에게 축복하는 아버지의 축복을 받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얍복강 가에서도 밤새 씨름을 하다가 날이 새어갈 때에도 내게 축복하기 전에는 갈수 없다고 붙잡고 놓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움켜쥔 손을 처음으로 놓습니다. 그의 평생 처음으로 포기하는 모습을 본문에서 보입니다. 

야곱은 아내 라헬에 대해서도 집착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라헬에게 반해서 7년간을 머슴살이하며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되었어요? 첫날밤에 라헬인줄 알았더니 그 언니 레아였어요. 그러자 포기하지 않고 7년 더 일할 것을 약속하며 라헬마저 아내로 삼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하는 아내가 요셉을 낳고 베냐민을 낳다가 죽습니다. 그러자 라헬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라헬이 낳은 아들 요셉에게 라헬에 대한 애정을 그대로 옮겨 붇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없어지자 라헬의 아들 중 단 하나 남은 베냐민에게 모든 애정을 쏟는 겁니다. 

42장 38절 "야곱이 가로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 행하는 길에서 재난이 그 몸에 미치면 너희가 나의 흰 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

여기서 음부에 내려간다는 말은 우리말로 하면 저승에 간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베냐민 없으면 나도 죽는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편협한 집착입니까? 

아내가 교통사고로 죽자 두 자녀를 두고 남편마저 자살을 하는 경우 너 없으면 못산다는 편협한 집착의 결과입니다. 본문 14절 이전의 야곱과 얼마나 흡사합니까? 여러분에게도 이런 편협한 집착이 있지 않습니까? 

아들에게 집착 -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너 없인 못산다! 
당신 없으면 못살아! 나 혼자서는 못살아! 집착이란 것처럼 위험한 것이 없어요. 

노름하는 사람이 빚을 많이 지고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본전에 집착하다가 더 깊이 빠져듭니다. 주식 투자하다가 자살하는 경우도 비슷합니다. 「증권투자실패 모자 동반자살 기도, 아들 숨져」라는 기사를 보면 남편의 증권 투자 실패를 비관한 주부가 어린 아들과 함께 약을 먹고 동반 자살을 기도, 아들이 숨진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경찰은 박씨의 남편이 최근 증권에 1억5천 만원 가량을 투자했다 큰 손해를 본것을 놓고 자주 부부싸움을 했다는 주위 가족들의 말에 따라 박씨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 평소 복용해오던 갑상선 치료제를 다량으로 아들과 함께 먹고 동반 자살을 기도했던 것으로 보고 정확한 사건경위를 조사중이라고 했습니다. 

본전을 포기할 줄 아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자살에까지 이르는 겁니다. 비록 실수한 것은 안타깝지만 포기해야 해요. 그 돈은 원래 내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해야지, 아이구 아까와라 그러면요 마음의 병, 육신의 병이 생기고 가정불화도 생길 수 있습니다. 포기하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오늘 본문에서 집착했던 것을 포기하는 용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치 에스더가 왕에게 나아가면서 죽으면 죽으리로다! 말했던 것처럼 포기할 때 용기가 생깁니다. 왕후의 지위와 왕궁의 호화로운 생활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 용기를 갖습니다. 

에스더 4장 16절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아무리 (타이타닉)호화로운 여객선이라도 침몰해가는 배면- 포기해야 삽니다.

여러분이 오늘 포기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무한 경쟁 사회에서 전전긍긍하며 하나라도 더 움켜쥐려고 애쓰며 살던 우리가 오늘 우리 손을 놓아야 합니다. 

아직도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빼앗길까봐 계속 전전긍긍하며 사는 겁니다. 
평생 포기하지 못하고 있던 것, 즉 우리의 베냐민을 포기하면서 잃게되면 잃으리로다 하는 고백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야말로 진정한 평안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야곱의 이런 포기는 단순한 자포자기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43장 14절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사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내 욕심대로 한평생 살아왔던 야곱, 집착을 끊지 못했던 야곱, 손에 쥔 것을 놓을 줄 몰랐던 야곱이 드디어 자기 욕심을 꺾고 자기 의지를 꺾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에 인생을 맡기는 삶을 사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삶! 이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여러분, 모든 것을 내가 다 할 수 없습니다. 

본문 14절에서 야곱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나 자신의 머리나 능력으로 이기는게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이긴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문제를 해결하고 고난을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문제만 바라보지 마시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그의 자비하심을 구하며 사는 삶이야말로 능력있는 삶입니다. 지조는 덕이지만 고집은 덕이 아닙니다. 집착을 버리고 하나님의 섭리에 모든 것을 맡기고 믿음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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