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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령한 자로써의 능력 (고전 2: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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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한 자로써의 능력 (고전 2:15-16)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옆에 계신 분에게도 축복합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식인종이 영국의 명문 옥스퍼드 대학에 유학하였습니다.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10년 후, 어떤 여행가가 아프리카를 여행하다가 옥스퍼드에서 함께 공부한 그 동창생을 만났습니다. 그는 어느새 추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아마 유일한 대학 출신의 추장이었을 것입니다. 추장은 동창생을 반갑게 맞으며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그런데 그 추장은 다른 식인종과 마찬가지로 사람 고기를 먹는 것이었습니다.

동창생은 깜짝 놀라서 “아니 대학까지 공부하신 분이 어떻게 사람고기를 먹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옥스퍼드에 유학하였던 추장은 한 손을 높이 들어 보이며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포크로 먹지 않습니까? 보세요, 다른 사람들은 손으로 먹고 있지요? 나는 포크를 사용합니다. 이게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지요.”

배운 사람이라면 사람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합니다. 손으로 먹느냐, 포크로 먹느냐 또는 숟가락으로 먹느냐는 문화의 차이에 불과합니다. 도구를 사용한다고 해서 모두 문명인은 아닙니다. 문명인은 배운 사람이 아니라, 배운 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은 단지 십자가가 달린 건물에서 예배드리는 사람이기만 한 것입니까?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란 단지 예수님이 누구인지 배워서 아는 사람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성령님의 도우심을 믿게 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과 관련된 성도의 문제입니다. 성도는 누구입니까?
  

I. 성도는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말씀의 결론입니다. 이 결론은 고린도 교회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여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15절 말씀입니다.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앞에서 인간은 영적 존재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사람의 속에는 사람의 영(고전2:11)이 있습니다. 사람의 영은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을 모셔 들일 수도 있고, 세상의 영인 사탄의 영을 받아들일 수도 있는 영적인 통로입니다. 자신의 영에 하나님의 영을 모셔 들인 사람은 성령의 사람이고, 그 자신의 영이 사탄의 영에게 지배를 받는 사람은 악령의 사람입니다. ‘신령한 자[pneumatikov"/프뉴마티코스]’는 ‘성령에 속한’ 사람, 즉 그 사람의 영에 성령님을 모셔 들이고, 성령님의 이끄심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알게 하는 영이신 성령님을 모셔 들인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신령한 사람입니다.

1. 성도는 신령한 자입니다.

일반적으로 신령한 사람이라면 하얀 도포를 입고, 흰 수염을 휘날리며, 구름을 타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는 신령한 사람이란 말을 천천히 하고, 소위 거룩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또는 신령한 사람이란 매일 꿈을 꾸고, 환상을 보는 사람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신령한 사람이란 하나님의 영이자,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자신의 영에 모셔 들인 사람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어떤 정신병원에서 한 사람이 “나는 이순신 장군이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이 “나는 나폴레옹이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지나가던 간호사가 “누가 이순신 장군이라고, 나폴레옹 장군이라고 하셨어요?”하고 웃음으로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조용히 잠자코 있던 다른 한 환자가 근엄하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야 이놈들아! 정신 차려라! 내가 언제 너희들에게 이순신 장군이라고, 나폴레옹이라고 하였더냐!”

그 사람은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정말로 착각도 자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을 리가 없지만, 하나님이 정말로 그렇다고 하셨다면 그런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가리켜 신령한 자라고 하셨으면 우리는 신령한 자인 것입니다.

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신령한 사람입니까? 오늘 말씀은 성도가 또 어떤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6절 말씀입니다.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이 말씀은 구약성경 이사야 40:13(칠십인역)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았습니까? 누가 그분을 가르치겠습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무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가 없고, 아무도 하나님을 가르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야 선지자 당시의 정답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전의 시대에는 아무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없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강림하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없었지만 이제 사람이 주님의 마음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께서 각 사람의 영에 머물러 계시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은 이사야 40:13에서 여호와의 신으로 바로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성령님을 모셔 들였다는 것입니다.


2. 성도는 성령님을 모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신령한 사람이라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닙니다. 바로 성령님께서 그 사람의 영에 들어와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

요즘 더위가 그야말로 장난이 아닙니다. 중복(中伏)인 어제(28일)는 불볕더위가 이어지며 전국 곳곳에 폭염특보가 발효되었습니다. 기상청은 폭염특보가 발효된 지역에서는 가급적 야외활동을 자제하고 물을 평소보다 자주 섭취하라고 당부합니다. 

이렇게 더운 날, 얼음물을 한 컵을 마시면 어떻습니까? 얼음물을 입에 머금는 순간 입안이 시원합니다. 얼음 조각을 우두둑우두둑 씹어서 삼키면 얼음 조각이 녹으면서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뱃속까지 시원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더위가 가시고 시원한 기운이 뼛속까지 스미는 것을 느낍니다. 이것이 물질의 세계입니다. 물질의 세계는 이렇게 감각적으로 직접 느낍니다. 이렇게 직접 감각적으로 느끼는 것이 물질의 세계 또는 육체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정신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에 비하여 늦습니다. 직접적인 효과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요즘 사람이 아무리 현찰이 최고라고 하지만 돈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분명한 가치관과 철학을 가지고 살기에 육체적으로 고통을 당하여도 굴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같은 더위라도 정신력의 차이로 잘 견디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것은 사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영에 성령님이 들어와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물론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으로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을 분별하는 일반적인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성령님을 모셨다고 선언합니다. 

고린도전서 3:16 말씀은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어떻게 성령님께서 우리의 영에 들어와 계시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전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냥,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데 왜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아니, 내 속에 성령님이 들어와 계시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하며 답답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너희 안에 성령님께서 계시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시 고린도전서 6:19에서 거듭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말씀은 “여러분은 성령님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모시고 있습니다.”는 선언입니다.

이런 내용의 말씀을 로마서 8:15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은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종의 영’, 즉 사탄의 영을 다시는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아버지라도 부르게 하시는 ‘자녀가 되는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도 역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갈라디아서 4:6 말씀은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영,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계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믿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성령님께서 계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영에 들어와 계시는 것은 우리의 느낌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그렇다고 선언하시는 것을 믿음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기록한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신에게 성령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믿어지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신령한 자로써 성령님을 모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입니까? 우리에게 성령님께서 함께 계셔서 그래서 우리가 신령한 사람이 되어서 어떻다는 것입니까?
  

II. 그래서  

우리는 고린도전서를 시작하면서 고린도 교회의 문제에 관하여 들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였고, 거룩한 성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답지 못하였습니다. 거룩한 성도로써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첫 번째 권면은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1:10)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1:12)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자신들이 바로 하나님의 교회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여야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영을 모신 사람들이라는 것을 기억하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그들에게 이 말씀들을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 역시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을 모셔 들인 신령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15절 말씀입니다.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여기에 하나님의 교회의 강력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령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서도 판단을 받지 않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무엇이나 판단할 수 있지만 그 사람 자신은 아무에게서도 판단 받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판단하다[ajnakrivnw/아나크리노]’는 말은 본래 ‘자세히 조사하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시험하다 또는 재판하다’는 뜻이 생겼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지식이 많은 사람이라도 자신의 지식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학문 분야에서는 내로라하는 전문가라고 하더라도 영적인 일에는 깜깜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하늘의 별을 헤아리는 천문학자라도 양심의 별은 어두울 수 있는 것처럼, 영적으로는 무지하여 하나님이 없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졌다고 해도 십자가를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볼 수 있을 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세상에 많습니다.

반대로, 초등학교 문턱에도 가서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지식으로 십자가의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아는 사람은 구원의 능력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아는 사람은 십자가를 믿지 않는 세상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으로 세상을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1. 세상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지만 매우 조심스러운 말씀입니다. 매우 조심스럽다는 것은 성도가 세상의 판단을 받지 않고 세상을 판단한다는 것을 영적 우월감으로 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 우월감을 가지고 세상을 무시하고, 영적으로 교만하여져서 서로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무엇을 본다며 신령한 척을 하며 반(半)무당처럼 행동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만이 받은 신령한 계시가 있다며 이익을 챙기고 앉아있는 교주들도 있습니다. 그 정도는 아니라도 영적인 은사로 분란을 겪는 것이 고린도 교회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영적 은사를 서로 자랑하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성도가 세상을 판단한다는 말은 이렇게 매우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중요합니다. 세상이 장차 어떻게 될지를 아는 사람이 바로 성령 받은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사람은 다른 것은 몰라도 천국 가는 길과 지옥 가는 길은 판단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시골 길을 달리다가 자동차 타이어에 펑크가 났습니다. 무더운 여름날, 땀을 뻘뻘 흘리면서 펑크 난 타이어를 갈아 끼우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길 가의 정신병원에서 한 환자가 창문으로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내다보고 있거나 말거나 열심히 작업을 하였습니다. 펑크가 난 타이어의 볼트를 풀고 펑크 난 타이어를 빼냈습니다. 스페어타이어를 끼우고 이제 볼트를 조이기만 하면 됩니다. 아주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빼어 놓았던 볼트를 잘못 건드려서 네 개를 몽땅 시궁창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막대기로 아무리 시궁창을 후집어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동차 타이어 한 짝을 끼우지 않고 세 바퀴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그 환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세 바퀴에서 볼트를 하나씩 빼서, 갈아 끼운 바퀴를 고정시키고 정비소가 있는 시내까지 조심해서 나가보세요!”

정말 그러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너무나도 고맙고 신기해서 이렇게 그 환자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처럼 똑똑한 사람이 왜 정신병원에 입원하셨습니까?”
그러자 그 환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야! 임마, 내가 미쳐서 여기 있지, 너처럼 바보라서 여기 있는 줄 알아?”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있는 환자라고 아무 것도 모르는 바보는 아닙니다. 그 사람은 보통 사람이 흉내도 낼 수 없는 천재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을 받지 않은 사람이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그 영혼의 곤궁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영원한 미래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신령한 사람이 세상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떠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16절 말씀입니다.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성령님이 자신의 영에 함께 계시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신령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 사람은 성령님의 이끄심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2. 성령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고전 12:1)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고전 12:2)고 하였습니다. 영적인 것의 특징은 이끌어 가는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끌리는 강력한 힘이 바로 영성입니다. 식욕이나, 성욕이나, 권력욕이나, 명예욕에도 사람을 이끌어 가는 힘이 있습니다. 이런 것에 이끌려 가는 사람은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다.

얼마 전, 이동원 목사님이 강의 중에 이런 말을 하세요.
잘 아는 목사님이 총회장에 출마하셨기에 왜 그것을 하려고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하더랍니다.

“총회장 귀신이 내 마음에 들어왔는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가라고 해도 안 나간다.”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가라고 하는데 나가지 않는다면 참으로 강력한 귀신입니다. 그래도 악한 영은 물리쳐야 합니다.

신령한 사람은 성령님의 이끄심을 깨닫고 그 이끄심에 이끌려야 합니다. 신령한 사람에도 강력한 유혹이 있을 수 있습니다.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성령님의 이끄심을 깨닫고도 그 이끄심에 끌려가지 않으면 결국 육신의 욕심에 이끌려 간다면 육신에 속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모름지기 성도는 성령님에게 이끌리심을 받는 사람입니다. 성도는 성령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부족합니다. 실수할 수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을 확신하여야 합니다. 먼저 자신이 성령님을 모신 신령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신령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성도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그 능력으로 살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성령을 사모하여야 합니다.  

자, 여러분! 자신의 영에 하나님의 성령님이 머물러 계심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 인도하심을 받기 위하여 말씀과 기도의 사람들이 되십시오.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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