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눅 19:37-40)

첨부 1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눅 19:37-40) 

여러분! 돌들이 소리를 지를 수 있는가? 
물론 하나님의 능력으로 소리 지르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의미는 그런 뜻이 아니다. 40절 하반절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이란 조건절의 말씀이 있고 그 뒤에 나오는 내용은 가정이다. 

여기에서,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뻐하면서 열광적으로 찬송을 부른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마땅히 찬송을 불러야 할 사람들이 찬송을 부르지 않는다면 돌들이 소리를 질러 예수님의 입성을 찬송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사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신자의 영적 체온을 잴 수 있는 척도 중의 하나가 찬송이다. 찬송 부르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영적 상태를 진단해낼 수 있다. 지난 6월 합신 목회대학원 하계 강좌에서 원장인 이승구교수님의 찬송 인도하는 모습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 비유하자면 음식을 먹는데 아주 맛있게 먹는 모습이랄까? 대체로 지식이 많은 사람들의 찬송 소리는 작다. “아, 저분은 성령 충만한 분, 은혜 충만한 분이구나!” 그분의 딱딱한 강의가 은혜롭게 들려졌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부분인 예루살렘 입성의 모습이다.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가실 때 제자들과 백성의 큰 무리들이 기뻐하며 환호하였다. 그때 바리새파 사람들이 나타나서 예수님에 대하여 환호하고 찬송하는 것을 중단시켜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요청을 한 마디로 일축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만일 이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하셨다.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을 찬송하는 일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 쉬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오늘 본문은 한 자리에서 두 가지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열광적으로 찬송하는 무리들의 모습, 그리고 다른 하나는 찬송하지 못하도록 막는 무리들의 모습이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열광적으로 찬송하는 대열에 속하게 되었고 또 다른 무리는 찬송을 거부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었는가? 


찬송하는 무리들 - 제자들

1.찬양의 동기

37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1)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찬양의 동기는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한 것이다. 무리들은 예수님의 행하신 일들을 목격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하신 일들을 목격한 사람들이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수 많은 표적을 보았고 말씀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얼마 전에는 여리고에서 소경 바디매오를 고치셨던 일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더욱 열광시켰던 것은 바로 베다니 사람 나사로 부활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주석가 윌리암 헨드릭슨은, “특별히 대중을 흥분시킨 사건이었다”라고 했다. 이것을 통해 백성들의 마음 속에 메시야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 일으킨 동기가 되었다. 저 분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 그리스도 곧 메시야이시구나! 기독교 신앙은 다분히 체험적이다. 모든 신자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신앙의 체험을 가지고 있다. 예)예배시간, 부흥회, 수련회, 선교대회등

주님의 말씀을 들었든지, 아니면 주님의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목격했든지, 그들을 흥분시키고 찬송하게 한 것은 그들이 주님의 능한 일을 본 경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주님을 만난 경험이 있는 사람이 주님을 찬송하게 된다.

2)어떻게 찬양했는가?
“기뻐하며 큰 소리로..” 주님을 만난 경험이 있는 사람, 주님을 깊이 만난 사람들은 특징이 나타나는데 찬양할 때 기쁨으로 한다는 것과 큰 소리로 찬송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벙어리 목석 같이 앉아 있는 사람도 있다. 주님을 만난 경험이 없거나 오래되어서 감동과 감격이 식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의 말씀..

엡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찬송해야 할 이유가 세 가지 있다. 첫째는 창세 전에 우리가 택하심을 받은 것. 둘째는 죄 사함의 은혜를 받은 것 셋째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그의 기업이 되게 하신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기억하고 있다면 찬송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찬양의 내용

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1)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마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호산나”란 용어의 의미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란 뜻이다. “다윗의 자손이여”란 말의 의미는 다윗의 왕통을 이어받은 자, 곧 메시야를 의미하는 것이다. 복음서에서 자주 불리우는 예수님에 대한 호칭이 무엇인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예수님을 부를 때 그들은 그렇게 불렀다.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고 우리의 왕이 되심을 노래한 것이다. 그들이 만난 예수, 그들이 목격한 예수는 왕이시고 구원자, 곧 메시야 되심을 노래한 것이다. 예)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2)하늘에는 평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눅 2: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천사들의 노래의 내용과 거의 같다. 하나님의 목적은 예수님을 통하여 인류와 평화롭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 그리고 화목제물이 되셨다. 

엡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찬송가 412장,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내영혼을 고이싸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구속함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기쁨으로 큰 소리로 우리의 구원자, 우리의 왕되신 예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다. 


찬송하지 못하는 무리들 - 바리새파 

1.바리새인들의 금지 요청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그들은 왜 무리들의 찬양을 제지시키려 했는가? 두 가지 이유를 추정해 볼 수 있다.

1)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되심을 인정치 아니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의 끈질긴 의혹, “당신은 누구인가?”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고 선포하셨다. 그들은 돌로 치려 했다. 

요 10:37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제자들과 은혜를 입은 사람들의 공통된 고백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메시야로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적 관계로 생각했다. 만약 예수님이 선지자 정도였다면 그들은 환영하였고 추종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았다. 메시야로 칭송을 듣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2)무리들의 찬송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것이므로 속히 금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백성들로 하여금 불경죄 짓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불신앙의 입장에서는 정당한 조치라고 생각되지만 자신들의 불신앙과 무지로 인해 찬송의 기쁨을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 속에서 바리새적인 모습들이 발견된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다. 예배도 형식과 습관에 매여 감동과 감격이 없다. 신앙생활에 활력이 사라지고 의무감으로 직분 때문이라면 바리새파 바리러스에 감염된 것이다. 이것에 감염되면 예배의 자리에 나와 있으면서도 기쁨 없이 무거운 입으로 찬송하게 된다. 

2.예수님의 답변

40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요청을 한 마디로 일축하셨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1)찬송의 당연성이다.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는 말씀이다. 메시야의 도래는 너무나 기쁜 일이었으므로 백성들은 잠잠하게 보고만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그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2)찬송의 필연성이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표현은 격언적이다. 격언은 진리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므로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메시야의 나타나심은 너무나 중대한 사건이므로 어떤 방식으로든 마땅히 찬양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백성들이 큰 기쁨으로 찬송하고 환호하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며 그것을 저지하는 것이 오히려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셨다. 

어느 목사님이 교도소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설교를 마치고 나오는데 배포하는 소식지를 받았다. 거기에는 간증 편지가 실려 있었다. 주인공은 김현양, 엽기적 살인 행각으로 온 국민에게 큰 충격을 일으켰던 지존파 살인범이었다. 그는 사형 언도를 받고 형 집행을 기다리는 중 어느 집사님의 전도를 받고 회심하였는데 그 집사님에게 보내는 편지의 사본이었다. 

“집사님 생각하면 제가 왜 그렇게 바보 같은 인생을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와 생각하니 제 눈이 무엇인가에 가려져 있었던 것이 틀림 없습니다. 저는 죄에 대한 대가로 죽지만 세상에서는 죽음으로도 용서 받을 수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제가 여기서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을 생각하니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여 눈물만 흐릅니다. 저는 요즘 늘 이 찬송을 부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은혜 받은 성도들의 마음 속에는 이처럼 영혼에 울려퍼지는 노래가 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굳어져 있다. 감사와 감격이 사라졌다. 입술이 굳어져 있다. 왜 그런가? 본문 속에 두 부류의 사람들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1)예수님을 구주로 왕으로 만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2)심령 속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바리새적인 모습 - 경건의 모양만 남음. 

예)어느 학생들의 연합집회에서 찬양팀의 찬송 인도가 길어지면서 청중석에서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기 싫어 죽겠는데 또 하네, 아이 씨~”


찬양의 유익

기독교 신앙은 찬송의 신앙이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전도하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착고에 채인 상태에서 찬송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행 16: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찬양에는 어떤 유익이 있는가?

1.찬양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선언하며, 사탄의 공격에 대항하는 믿음의 방패를 들게 되며 주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게 할 수 있다.
2.찬양은 우리의 삶 가운데서 성령의 인도하심과 감동을 경험하게 해준다.
3.찬양은 모든 진실한 성도의 연합에 크게 기여 한다.
4.찬양은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로 고정하고, 귀를 주님의 말씀에 집중하는데 도움을 준다.
5.찬양은 하늘나라의 언어이므로 찬양을 통해 하늘 나라를 미리 맛보게 된다.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 

기쁨으로 큰 소리로 불러야 한다. 찬양의 성도들의 특권이다. 만약 우리가 찬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돌들이 소리 지르게 하실 것이다.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으로, 주님의 나의 주가 되시며 왕이 되심을 인하여 우리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찬양과 찬송을 회복하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