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 (갈 5:16-26)

첨부 1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 (갈 5:16-26)  

금년 Labor Day에도 샌디에고 교역자 협의회 주관으로 연합예배 및 체육대회가 열립니다. 전에는 여 성도들을 위하여 이인삼각 게임이 있었는데 금년에는 대신 피구가 들어갔습니다. 이인삼각을 할 때, 두 사람의 다리를 한쪽씩 묶고 뜁니다. 급하다고 한 사람만 먼저 나간다면 도리어 넘어집니다. 하나 둘 하나 둘 구호를 외치며 보조를 맞추어야 제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어떤 면에서 이인삼각과 같습니다. 누구와 함께 가느냐에 따라 열매가 전혀 달라집니다. 가정도 사업도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났다고 하여 우리의 옛사람이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믿기 전에 우리의 생각과 몸과 기질과 생활 습관이 모두 죄에 물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믿을 때에 성령이 임하여 믿는 자에게 거하게 되는데 그때부터 우리 안에 있는 죄와 성령 사이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우리에게 오랫동안 깊이 스며들어 있는 죄의 세력은 대단하기에 이를 뽑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출애굽 사건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 가지 재앙을 인하여 바로가 진절머리를 치고 이스라엘을 쫓아내는 것과 홍해가 갈라지며 자기들을 추격하는 애굽의 군대가 물에 잠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 엄청난 기적을 경험하고도 그들의 본성은 좀처럼 바뀔 줄 몰랐습니다. 홍해를 건넌 지 불과 사흘밖에 되지 않았을 때 마라에서 물이 없다고 모세에게 원망하였습니다. 광야에 나온 지 두 달 반이 되어 양식이 떨어졌을 때 종살이 하던 애굽을 그리워하며 불평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빠져나오는 데는 며칠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군사로 변화되는 데는 무려 사십년이 걸렸습니다. 죄악에 물든 마음이 깨어지고 부서지고 변화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성령의 체험을 하고서도 이 불순종의 병은 쉽게 치료되지 않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누구와 더불어 신앙생활 하십니까? 육체와 호흡을 맞추면 ‘육체의 일’을 하게 되고 성령과 호흡을 맞추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승리의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성령님과 보조를 맞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의지를 무시하고 자기 기질대로 행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자기의 기질을 꺾지 못하고 성령을 거스르면서 힘들게 신앙생활 하시는 분은 안계십니까? 마음은 원이지만 늘 육체의 욕심에 밀려 후회하는 열매를 거두지는 않습니까? 어떻게 하면 성령님과 보조를 맞추어 나아가며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바울의 권면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성령을 좇아 살면서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거두며 주님 보시기에 의미 있는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소욕 

예수를 믿어 의롭다 함을 입었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완전하게 변하여 거룩하게 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인하여 우리를 의롭다 인정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옛 사람의 죄악 된 습성이 남아 있기에 이것을 다스리지 못하면 그 습성이 자꾸 고개를 들게 마련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자기중심으로 살려고 하고 죄악 된 습성에 머물려는 강한 욕구를 말합니다. 그런데 성도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성령을 통하여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과 기도로 교제하게 되고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갑니다. 성령의 소욕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려는 거룩한 의지를 말합니다. 

성도의 내면에 공존하는 두 성품, 즉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은 끊임없이 갈등합니다. 우리의 심령 상태에 따라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강한 쪽이 약한 쪽을 장악해 버립니다. 

바울은 롬 7:15에서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고 말합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좇으려 하면서도 육신은 이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두 소욕의 갈등이 계속되는 한 성도는 결코 자유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바울은 자신 안에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과 악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음을 보고 괴로워합니다. 한 편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다른 편에서는 죄의 법에 굴복해버리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한 사람 안에 두 마음, 이는 바울만의 고민은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고민입니다. 물론 우리는 바울의 표현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 아래 있을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의 실존상황은 율법 아래 있을 때와 전혀 나을 것이 없다는 의도에서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믿어봤자 소용이 없다는 독백밖에 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실패와 좌절과 절망을 가져다주는 율법의 절대적인 무능력과 절망적 상황을 발견했습니다. 그렇다고 율법 자체가 문제가 있거나 죄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율법이 하나님의 법으로서 거룩하고 의롭고 신령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죄의 권세가 너무 강하여 인간을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직 성령만이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부각시킵니다. 

로마서 7장에서 드러난 바울의 고민이 갈라디아서 5장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됩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5:17) 악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육체의 소욕”으로 표현되고,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은 “성령의 소욕”으로 표현됩니다. 

예수를 믿을 지라도 우리 안에는 지금까지 살아 온 방식을 바꾸기 싫어하는 강한 고집이 있어서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을 소멸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단순히 죄가 옳지 않다는 생각만으로 죄가 청산되지 않습니다. 더러운 짓을 해가면서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자신의 옛 기질에 대하여 혐오감이 생겨야 합니다. 전에는 죄가 당연한 줄 알았고, 누군가 죄를 지으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였는데 이제는 죄가 얼마나 추악하고 더러운 것인지 깨닫게 하십니다. 성

령님은 죄를 짓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알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게 하고, 우리를 설득하고 훈련시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일을 하게 하십니다. 바울은 우리 속에 있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지에 주목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육체의 일을 만들어내며, 성령의 소욕은 성령의 열매를 만듭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함께 존재한다는 데 있습니다. 육체와 성령의 싸움 속에서 육체가 이기면 육체의 일이 만들어지고, 성령이 이기면 성령의 열매가 맺혀집니다. 


육체의 일

여기서 육체란 ‘죄 된 본성’을 뜻합니다. 그리고 ‘일’이란 ‘인간적인 것’, 즉 하나님께서 능력을 부여해주지 않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일’이란 하나님의 능력을 부여받지 못한 죄 된 본성이 추구하며 행하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음행, 호색, 술 취함, 방탕함 등을 말할 때 우리 안의 양심이 이를 받아들이기를 꺼리는 것을 느낍니다. 그럼에도 육체의 일들은 우리가 은근히 원하는 것들입니다. 육체가 추구하는 것들이 선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선하지 않는 것들을 추구하는 모순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는 배치되는 열다섯 가지 육체의 일을 나열하는데, 분류해 보면 성적 범죄, 종교적 범죄,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의 범죄, 자신에 대한 범죄로 나뉩니다. 음행, 더러운 것, 호색은 성적 범죄에 속합니다. '음행'은 성적으로 부도덕한 행위를 가리키고 '더러움'은 불결하게 여겨지는 남녀 관계들을 의미하고, '호색'은 방탕한 것을 즐기는 태도를 뜻합니다. 

몇 년 전 미국 대법원에서 동성애금지법에 대하여 위헌 판결을 내렸습니다. 동성애자의 성적 취향은 사생활의 영역이기에 정부가 간섭할 수 없고 이를 문제 삼는 것은 개인 사생활 침해라는 것이 판결의 이유입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동성애를 지지하는 자들은 내친 김에 동성 간의 결혼을 합법화를 추진하였습니다. 동성애자들의 주장은 이성 간에 서로 좋아하는 것이나 동성 간에 좋아하는 것이 다를 바가 없고 단지 취향의 차이일 뿐이라는 겁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설령 그런 취향이 있다 할지라도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한다면 짐승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로마서 1장에 보면 부끄러운 욕심에 빠진 자들의 모습이 언급됩니다.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롬 1:26-27) 

그런데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롬 1:32)고 합니다. 바울은 오늘의 현상을 이미 2000년 전에 정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가정과 결혼에 대한 전통적인 가치관이 흔들리는 혼돈의 시대에 저희들이 살고 있습니다.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고전 6:18). 음행은 싸워서 이기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피하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 영혼을 더럽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와 술수는 종교적 범죄입니다. 피조물을 숭배하는 것이 우상 숭배요, 악의 세력과의 은밀한 결탁을 하는 것을 술수라고 합니다. 구약에 보면 우상 숭배는 항상 성적인 타락과 연결되어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강력하게 경계하셨습니다. 

민수기 25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싯딤에서 머물 때에 모압 족속이 사용한 미인계에 빠져 바알에게 절을 하고 모압 여자들과 더불어 음행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이스라엘 남자 2만 4천명을 죽이셨습니다.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당 짓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는 대인관계 속에서의 범죄의 유형들입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발견하면 떠벌일 줄은 알아도 용서할 줄 모릅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주장하며 인정받으려 합니다. 그것이 지나치면 무리를 지어 진리를 대항하며 분열하고 싸웁니다. 

남이 자기보다 잘하거나 잘되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극대화된 이기심으로 가지고 자기만족만을 추구하다가 이웃을 해치게 됩니다. 끝으로 술 취함과 방탕함은 자기 자신을 향한 범죄입니다. 술에 취하게 되면 모든 일을 판단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고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방탕함'은 술에 취하여 흥청망청 떠드는 것을 가리킵니다. 육신의 쾌락을 좇느라 도박이나 오락에 빠지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바울은 육체의 일에 대한 목록을 쓰다가 너무 많아서 그 뒤에는 그냥 “그와 같은 것들”(갈 5:21)이라고 하며 언급하지 못한 죄목들이 많음을 암시합니다. 사실 죄의 종류들을 다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죄는 또 다른 죄를 계속해서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육체의 일들은 개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오늘 우리 사회가 겪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런 육체의 일들이 자주 나타나다 보니 이러한 죄에 대하여 점점 둔감해집니다. 이런 일들은 다 우리에게 얼마든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것들이기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하면서 바울이 경계합니다. 이 말은 한번 이런 죄에 빠진 적이 있는 사람은 다시 회개할 수도 없고 예수를 믿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들도 때로는 실수하여 '육체의 일'을 따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을 상습적으로 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죄를 계속 저지르는 것은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 앞에 나오면 어떤 죄든지 다 용서 받을 수 있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바울의 취지는 성도들이 그런 악행을 버림으로 해서 그 마음속에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이루고 날마다 변화하여 끝내는 육체의 소욕을 모두 버리기까지 성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육체를 지니기에 때로는 유혹을 받기고 하지만 그때마다 자신을 누르고 자제해야만 신앙의 성장을 이루며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됩니다. 


성령의 열매

우리의 신앙이 내적인 고백만으로는 부족하고, 행위를 통하여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은 그들의 행위가 성령께서 주관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사랑을 비롯하여 아홉 가지 덕목을 열거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바로 그리스도의 품성입니다. 성령을 좇아 살게 될 때 그리스도를 닮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닮은 '증거'들이 열매로 나타납니다. 

바울은 ‘열매’라 한 것은 자연스럽게 맺히기 때문입니다. 농부라 할지라도 억지로 열매를 맺게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도 원한다고 해서 맺히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맺히기 싫다고 해서 맺히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의 소욕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저절로 맺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에 바울은 “이에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5:23)고 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맺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맺게 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령이 하시는 일을 금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열매를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9가지로 말하고 있지만 이 성령의 열매는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제시됩니다. 이것은 성령의 열매로 제시된 속성들이 서로 연합되어 있으며 모두가 성령의 지배 아래 살아가는 성도에게서 발견되어야 할 것임을 말해줍니다. 즉 열매란 성도 자신의 소산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입니다.

성령의 열매 중 첫 번째 사랑은 아가페를 의미합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자기희생적 사랑입니다. 계속되는 여덟 가지 덕목은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 방법이 됩니다. 아가페 사랑은 다른 사람을 나의 관점으로만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가치와 인격을 인정합니다. 희락과 화평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설명됩니다.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기쁨을 얻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에 기초하여 평안을 얻습니다. 성경에서 평화란 ‘전쟁이 없는 상태’ 또는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이루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원수 된 관계를 해소하셨고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심으로써 이 땅에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평화를 누림과 더불어 세상을 화평케 하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오래 참음은 관용과 관계가 있으며,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대접하든지 그들에게 온유한 관용의 태도를 보입니다. 성령께서는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을 알게 하시고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움직일 때까지 기다리게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에 부담을 주셔서 나와 다른 이웃에 대하여 기도하게 하고 관심을 가지게 합니다. 

자비는 친절을 의미하며, 이는 다른 사람의 나약함을 고려하는 다정한 마음입니다. 이웃의 실수와 범죄를 인하여 정죄하거나 비난하기보다 그들을 이해하려고 하고 여전히 호의를 베푸는 것이 자비의 모습입니다. 

양선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관대한 것을 의미합니다. 남의 부족한 부분을 이해할 뿐 아니라 자신의 것으로 채워주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아무도 하기 싫어하는 것을 말없이 나서서 합니다. 교회에 이런 성도들이 많아야 합니다. 

충성이란 신뢰성, 충절, 견실성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품성을 나타낼 때 이 단어를 썼습니다.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오늘날도 하나님은 능력 있고 똑똑한 종보다 진실되고 충성된 종을 찾고 계십니다. 

온유는 겸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온유를 의미하는 헬라 단어가 ‘신의 뜻에 겸손하게 굴복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분노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드렸습니다. 온유한 마음은 자기가 직접 이웃의 실수를 탓하기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심판을 맡기는 마음을 말합니다. 

절제는 자기 자신을 억제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는 우리가 사용할 수도 있고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만들어집니다.


십자가에 못 박기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는 세상에 속하였는데 이제는 소속의 변화가 일어나서 천국백성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이 세상에 살지만 하늘나라 시민으로서의 소속감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확신은 죄의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막아줍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육체의 욕망을 억누르기란 쉽지 않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의 열매 대신에 육체의 일을 하게 합니다. 바울은 성도가 어떻게 해야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5:24).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번역된 헬라어 ‘에스타우로산’은 '계속 십자가에 달려 있다'는 뜻으로서 예수를 믿으면서 옛 성품이 단번에 죽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잠시 동안이나마 살아 있는 상태가 계속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정욕이 십자가에 못 박힌 채로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큰 위협은 못되고 한풀 꺾인 상태라는 것입니다. 마치 사슬에 묶인 사자와 같이 소리는 지르고 위협할 수는 있지만 더 이상 우리를 해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에 아말렉 족속이 뒤에서 치곤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뒤에 처진 이스라엘만 치다가 나중에는 이스라엘과 전면전을 벌입니다. 이스라엘은 노예로 있던 애굽을 빠져나온 이후로 다른 족속과 싸워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이 볼 때 아말렉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세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앞세워 싸우게 합니다. 산 위에서는 모세가 아론과 훌의 도움을 받아 손을 들고 기도합니다. 

그 결과 아말렉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이 전쟁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생각이 무엇입니까? 아말렉이 강하기는 하지만 해볼만하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담대함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전진하였습니다. 육체의 소욕이 우리 안에서 충동을 일으키고 우리를 위협하기는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왕 노릇하지 못하고 우리가 믿음으로 거부하면 거부할 수 있고 불순종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옛 성품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전과 같이 강하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죄 된 본성과 그 본성이 추구하는 소욕과 열정을 모두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못을 박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삶의 방향을 돌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림 받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삶과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이 있습니다. 선택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5:25-26)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의 복음을 듣고 성령을 따라 살 때는 서로 화목하였는데 거짓 가르침을 받고 육체를 따라 살면서 공동체 안에 분란이 일어나고 허영에 들떠 서로 시기하고 싸웠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모르고 성령을 좇아 살지 않는 곳에는 항상 인간의 추악한 부분들이 들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평화를 깨뜨렸습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은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하며 서로를 시기하게 합니다. 

헛된 영광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에 대해서 가져야 할 사랑과 모순되는 불화와 싸움의 근거가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영적인 교만, 상대방을 자극시키는 것, 시기하는 것에 대하여 경고합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 성도들은 헛된 영광을 버리고 성령을 따라 행할 것을 촉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구와 보조를 맞추며 신앙생활 하고 있습니까?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를 구별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 나무의 열매를 보는 것입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8). 

겉으로 아무리 치장하고 아름답게 보이려고 해도 맺히는 열매가 좋지 않으면 나쁜 나무라고 하셨습니다. 이 표식에는 중간도 없고 혼합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언제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간구하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감화에 전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릴 때마다 성령의 새로운 역사를 간구해야 합니다. 내주하는 성령을 따라 살면 성령의 열매는 우리 속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서 맺어지게 됩니다.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성령의 인도함 속에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살면서 이제부터는 육체의 욕심을 이기고 성령을 좇아 행하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거두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추천인 1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